첨성대의 천문대설은 관련 전문가들로부터 오랫동안 많은 비판 빋아
첨성대는 석굴암과 함께 경주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대 과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표상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소개됐다.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삽도가 들어간 책이라면 표지나 앞부분에 거의 예외 없이 첨성대 사진이 실렸고, 과학사와 관련된 책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1960년대의 10원짜리 지폐 앞면에는 첨성대가, 뒷면에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 알려졌던 거북선이 그려졌다. 그리고 1970년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현대식 망원경을 갖춘 천문대를 소백산에 지을 때 부속건물 하나는 첨성대 모양으로 지어 첨성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첨성대는 처음에는 현존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로 소개되었으나, 1973년에는 세계 최고의 천문대라는 타이틀이 붙여졌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천문대로 7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1982년판 기네스북에는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수록되기도 하였다 한다. 우리에게 첨성대는 지금까지 그렇게 각인되었다. 그런데 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에 대한 해외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첨성대는 꽤 이른 시기에 유럽에 알려졌다. 프랑스에서 기상학을 공부하고 온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가 제물포에 기상관측 책임자로 와서 1910년에 첨성대에 관한 글을 쓰고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유럽에 소개했다. 그로 인해 첨성대는 일찍이 1911년에 과학학술지 네이처의 뉴스난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네이처 편집자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저 탑처럼 생긴 조형물에는 천문대로 볼 수 있는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1959년에는 중국과학사의 세계적인 학자 조지프 니덤의 『중국과학문명사』 3권에 삽도와 함께 중국어 발음 잔싱타이(Chan Hsing Thai)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그것의 주공측경대라는 규표(圭表)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주공측경대가 첨성대와 닮은 것 같다고 하여 단 7줄 분량으로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었고 내용에도 오류가 있었다. 별 관심이 없던 유럽과는 달리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의 천문학자들은 가끔 자기 나름의 의견을 제시했다. 1981년 경주에서 열린 제3차 첨성대 토론회에 참석했던 교토대학의 야부우치 기요시는 결정적인 반대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천문대로 생각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다.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이름이 ‘별을 쳐다보는 대[瞻星臺]’라는데야 천문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쿄대학의 나카야마 시게루는 1971년에 첨성대를 답사한 후에 다목적용 천문대일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는 그 해에 일본천문학회의 『천문월보(天文月報)』에 한국의 첨성대는 꼭대기에 올라 육안으로 관측 활동을 하기 위해 세운 천문대라고 발표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1984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에서는 말이 딴판으로 바뀌었다. 그는 첨성대를 ‘냉각탑 형태의 원통형 탑’으로 소개하면서 천변(天變)을 관측하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탑 위로 올라가서 관측할 필요가 없고, 한밤중에 천변을 재빨리 보고하기에는 탑 내부가 너무 어둡고 좁으며 발 딛는 곳도 불안하고 위험스럽다고 논평했다. 첨성대가 세계 최고의 천문대라는 외침은 동굴 안에서만 울릴 뿐이다.
외국처럼 냉담하지는 않지만 국내의 반응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국내의 교과서, 대중서적, 학술서적에 거의 모두 천문대로 소개되고 있어서 국내 학자들이 대부분 천문대설에 동의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실 그런 것도 아니다. 천문대설은 관련 전문가들로부터 오랫동안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 역사 연구자들도 연구분야가 첨성대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천문대라고 하니 그렇게 받아들일 뿐이다.
첨성대를 관심을 갖고 꼼꼼히 살펴보면 천문대라 하기에는 구조나 형태에 이상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첨성대를 천문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런 지적에 대해 종종 이렇게 답하기도 한다. 과거의 천문학은 지금과는 달리 종교적, 주술적인 점성술의 색채가 짙었기에 첨성대가 엄밀한 조건을 갖춘 천문대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
라고. 점성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더 나아가 점성술에서 잉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唐)의 『개원점경(開元占經)』이나 조선의 『천문류초(天文類抄)』는 천문학을 위한 책이 아니라 별점을 치기 위한 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분야(分野)라는 말도 하늘의 별들이 각각 12조각으로 구획된 땅의 운명을 쥐고 있다고 믿어서 그 나눠진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서양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아이작 뉴턴도 만유인력을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얻어 발견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케플러의 법칙을 수학과 물리학으로 풀어 알아낸 것이다. 그런데 요하네스 케플러는 ‘점성술은 고도로 지적인 어머니, 천문학을 먹여 살리는 모자란 어린 딸’이라면서 자신에게 호구지책이었던 점성술에 대해 연민의 애정을 드러냈다. 또한 케플러의 법칙에 활용된 자료는 그의 스승 튀코 브라헤의 관측 테이터였는데, 망원경이 나오기 전에 경이로울 정도의 시력과 관찰력으로 완벽하고 정밀한 데이터를 구축했던 스승 브라헤도 점성술에 몰두했고 또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점성술사라고 해서 대충 관측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행위 자체는 천문학이나 점성술이 다를 까닭이 없다. 다만 관찰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천문대설에 반기를 들고 자국의 문화재에 붙여진 세계 최고의 천문대라는 명성에 흠집을 내는 일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인 데다가 때로는 쏟아지는 비난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천문대설 찬반 논쟁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송상용은 1981년에 경주에서 열린 제3차 첨성대 토론회에서 논쟁이 있었던 사실이 신문에 보도된 후의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학계 일각에서는 노골적인 불만이 튀어나왔다. 국보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해서 국위를 손상한다는 얘기였다. 작가는 좀 생각을 달리한다. 진실을 밝혀 보려는 역사가들의 노력이 어째서 국위를 실추시킨다는 것인가? 설사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해도 큰일 날 것은 없다."
이제 이 책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경주의 유적들은 첨성대, 나정, 무열왕릉, 신라 종묘, 성부산, 망성산 그리고 나아가서는 박혁거세의 오릉까지 모두 하나의 서사(敍事) 구조로 연결된다. 인간과 제왕의 탄생, 우물과 별 그리고 알, 말과 닭, 죽음과 별. 이렇게 일관된 의미의 연결고리를 지닌 고대인의 스토리텔링 자원이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얼마나 있을까? 첨성대는 천문대라는 집착으로 인해 첨성대뿐 아니라 경주의 여러 귀중한 자원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1910년에 와다 유지가 첨성대를 천문대로 규정한 이래로 110여년의 세월이 흘러 지나가는 동안 첨성대의 성격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었다. 그렇지만 거의 전부가 첨성대가 전적으로 천문대이거나 부분적으로 천문대라고 생각해 왔다. 즉 매일 천체를 관측하는 상설천문대가 아니라 특별한 때에만 관측하는 비상설천문대라 할지언정, 기본적으로 천문대가 아니더라도 때로는 천문대로 쓰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름이 ‘별을 쳐다보는 대’이니까. 그러나 잘라 말하건대 첨성대는 천문관측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첨성대의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에는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다. 그것은 천문대설만이 아니라 나머지 학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부분에 대해 새로운 학설들이 의혹을 제기하고, 기존의 학설들은 해명을 했고, 해명이 미진하다 하여 논쟁은 되풀이되었다.
그 의혹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천문대라면 왜 계단을 설치하지 않았을까? ②출입구로 보이는 창구를 왜 저렇게 높은 곳에 내었을까? ③출입구를 왜 저렇게 작게 만들었을까? ④왜 꼭대기 관측공간을 비좁게 만들어 놓았을까? ⑤기단석, 정자석, 창구는 왜 모두 정남을 향하지 않았을까? ⑥월성 앞에서도 비교적 해발고도가 높은 동쪽을 놔두고 왜 서쪽에 치우쳐 세웠을까? ⑦왜 묘한 곡선 형태를 이루면서 아래쪽이 부풀어 있을까?
이 7가지 의혹은 기본적으로는 천문대설에 제기된 의혹이었다. 그러나 다른 학설들도 7가지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근래에 참신한 주장으로 관심을 끌었던 우물설도 천문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으므로 기존 천문대설의 의혹을 떠안은 채 새로운 의혹에 맞닥뜨려야 했다. 특히 ⑦의 아래가 부푼 형태는 천문대설에는 사소한 문제였지만 우물설에는 중대한 문제거리가 되었다. 우물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다니? 또한 ⑧우물이라면 중간 높이에 왜 작은 구멍을 뚫어 놓았을까라는 새로운 의문이 추가된다. 물론 이는 천문대설에 제기된 ②의 의문과 중복된다고 답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 천문대설에서는 출입구가 높게 있는 것이 문제이지만 우물설에서는 구멍 뚫린 우물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천문대설을 부인하는 학자들의 발목을 잡아 왔던 가장 무거운 질문이 남았다. ⑨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면, 또 우물이라면 왜 ‘별을 쳐다보는 대’라고 불렀을까?
지금까지의 천문대설이나 그 대안으로 제시된 학설들은 7가지 질문 또는 9가지 질문 가운데 단 몇 가지에만 답변했을 뿐, 나머지는 대개 언급조차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는 이 책에서 9가지 질문 모두에 답하려 한다.
더 나아가서 ⑩『세종실록』에서는 첨성대 건립 연대를 633년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에서는 647년이라 했는데 어느 것이 옳으며, 틀린 기록은 왜 남게 되었을까? ⑪『삼국유사』 왕력(王曆)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점성대(占星臺)로 기록되어 있는데 왜 그런 별명이 생겼을까? 이 두 가지 질문에도 해답을 내어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