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침략인가, 인조의 오판과 무능이 불러온 전쟁인가?
명청 교체기 국제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인조의 외교 정책과 병자호란
병자호란, 어떻게 볼 것인가?
인조반정은 병자호란의 원인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인조는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명나라에 은혜를 갚는다는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반정에 성공한다. 따라서 인조에게 전 정권 세력 척결과 광해군의 외교 정책 폐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왜 그랬을까? 인조는 떠오르는 강자 후금을. 한낱 오랑캐로 규정할 뿐이었다. 더구나 인조는 명을 부모의 나라로 떠받드는 정책으로 일관해,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이해하려고도 수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구체적인 첫 번째 사건이 정묘호란이다. 1618년 명과 후금은 사르후에서 전투를 벌인다. 조선은 강홍립을 필두로 1만 3,000의 지원군을 파견하는데, 중원 진출을 노리는 후금은 명을 치기 전에 조선을 먼저 정벌해야 할 군사적 필요성을 확신한다. 게다가 후금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 주둔을 조선이 불러들인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어리석은 군주 인조의 시간은 정묘호란으로 그 서막을 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저자는 병자호란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병자호란은 갑자기 닥친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에 앞서 40여 년 전에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불과 10여 년 전에도 정묘호란을 겪었다.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는 각종 경제적 요구는 물론, 명나라를 치는 데 협조하라며 수시로 조선을 압박했다. 이런 와중에도 인조 정권은 시종일관 국방이나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 팽창에만 열을 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행한 명나라의 은공을 갚아야 한다며 대명의리를 위해 정권의 명운을 걸다시피 했다”
정묘호란 후, 조선은 대명의리에 빠져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도,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군사력 증강 등 전쟁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10년 후 홍타이지가 즉위하고 명나라 정복이 본격화하면서 또다시 전쟁의 참화에 휩쓸려야 했다. 병자호란은 유례없는 굴욕의 상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과연 인조는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비겁한 왕으로만 역사의 시간에 멈춰 있어야 하는가?
“나를 구하라” 근왕령 발동으로 인조를 구하려다 죽어간 수많은 병사, 의병, 그리고 지휘관들
절대군주가 불러일으킨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백성이었다.
최고 권력자 인조
인조는 반정에 성공한 조선의 전제군주였다. 그리고 반정의 실질적인 책임자이기도 하다. 광해군이 무리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트렸다며 반정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나 그는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몽진을 떠났다.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백성을 버리고 자기 살길만 찾는 군주를 백성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청나라가 기마병을 앞세우고 순식간에 서울 인근에 당도하자 인조는 강화로의 피난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반란이 무서워 군사훈련을 금지했던 인조 정권의 정책으로 인해 전력이 약화된 조선군은 홍타이지와 백전노장 장수들이 이끄는 청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남한산성에 갇혀 청군의 홍이포 공격에 속수무책이던 인조는 도성 이남의 군 지휘관들에게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동원하여 자신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병자년 12월, 삼남에서 몰려온 군사들, 의병들, 지휘관들은 혹독한 추위와 군수물자의 부족 속에서 왕을 위해 혈전을 벌였다. 남한산성에 스스로를 가두고 주전파와 주화파 놀이를 주관한 것도 인조였고, 거듭되는 패전에 스스로의 목숨을 구걸한 당사자도 인조였다.
병자호란을 홍타이지의 조선 침략에서만 원인을 찾는다면 왕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수많은 병사, 의병, 장수들 그리고 억울하게 청으로 끌려간 수십만 명의 백성들의 역사적 한(恨)은 여전히 방기되고, 역사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남지 않을 것이다.
인조의 권력욕이 불러온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
오만과 무능으로 조선 최악의 비극을 불러온 군주, 인조
소현세자의 죽음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했다. 하지만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며느리 강빈을 사사하고 손자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죽게 내버려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포로였지만, 명의 멸망을 직접 경험했고 청 제국의 복잡한 정세와 아담 샬을 통해 발전한 서양의 과학 문명을 학습했다. 그는 혼군의 시선으로 정권 안위에 급급했던 아버지 인조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 수 있었다. 소현세자에 대한 기록과 사실은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의 냉대 속에서 귀국 2달 만에 세상을 떠난 이유가 그의 건강에 있든, 소현세자가 친청파로 돌아섰다는 오해와 청나라에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저지른 독살이든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이 서양 문물을 수입해 발전할 기회를 잃어버린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역사는 멈추지 않고 해석되고 해석된다. 소현세자의 죽음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어리석은 왕이자 아버지 인조의 비정함의 결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혼군, 즉 어리석은 왕의 광기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