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해지고 싶다
세월을 잡았다고 한 선인들이 있었던가, 세월을 앞서 갔다는 신선은 있었던가. 세월은 바람보다 부지런 하고, 한강수보다 잰걸음으로 내어달린다.
세월은 저만큼 앞서가는데 해놓은 게 없이 하루는 쏜살같다. 추운 겨울을 대비해야지 하고, 마음다짐 하다보면 벌써 겨울 처마끝에 달렸던 고드름은 다 녹아서는 봄을 부른다. 70이 넘어 그동안 살아온 삶을 되짚어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생각들을 가늠할 때 오래 되새김질을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여자로 태어나 가문을 이을 수 없었지만 어릴 때 어른들은 충렬공 송상현 자손이라 하며 머리를 쓰다듬던 것을 생각하건데 충절이란, 가슴에 담을 가치가 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은 일본군 장수가 명나라를 치러가니 길을 내어달라고 했지만 송상현 할아버지는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줄 수 없다’고 동래성 안의 사람들이 싸그리 죽을 때까지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셨다고 한다. 그분을 생각하면 애국심이 절로 생긴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을 일본의 많은 압박을 받고 살아오셨어도 되레 묵묵히 공부를 하셨다.
시조 악보 보고, 시조 노래하고, 낮에는 농사를, 밤에는 책을 보거나 붓을 들어 학의 날개처럼 펄럭이며 시조를 써 읊으셨다.
나 어렸을 적 아버지는 낡은 광목천에 그린 태극기를 소중히 간직하며 가볍게 펼치지 말라 하셨다. 대추나무에 연같던 자식들로 인하여 독립운동은 내놓고 하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맘은 당신께서 마음을 찍어 그리신 태극기를 그리며 일본의 압박을 이겨내셨다.
충렬공 자손은 일본이 지배하는 동안은 공부도 하지 말고, 공무도 맡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삼촌 두 분은 총귀가 밝아 고등학교까지 다니고는 번듯한 곳에 취직은 했지만 일찍 세상을 작고 하셨다.
일본 사람들이 토지를 몰수하려 할 때 아버지는 글을 보는 눈을 가졌기에 마을 이장을 보며, 가지고 있던 전답을 삼촌 이름으로 돌려 놓았다. 밑빠진 항아리에 물을 길어 담듯이 열심히 농사만 지었지만 점점 가난하고 옹색함은 깊어만 갔다. 이런 연유로 고향을 벗어나 다른 명승고적을 간다는 것은 언감생시 꿈같은 이야기였다.
충렬공시호를 받으신 할아버지는 하사받은 재산이 있었으나 자손이 아들 한 분 있었으나 일찍 돌아가시고 재산을 넉넉히 가꿀 분이 없어 넉넉한 편이 못 돼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은것 같았다. 그리고 툭하면 일본 앞잡이들이 애써 농사 지면 알뜰하게 각출해 가고도 모자라 집집마다 뒤적뒤적 해 나뭇간이다 뒷곁 땅속에 묻어두었던 것들을 다부지게 찾아내 빼앗아 갔다.
뺏기고 뺏기다 남은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가 써놓으신 한시에 대한 눈이 어두워 번역을 의뢰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시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작품은 없고 당나라 시인의 시인데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나 중국에서는 꽤나 이름이 알려진 분들이었다.
시를 아버지께서는 어떤 감수성으로 향흠했을까? 어딘가에 고즈넉한 본문 글이 향취를 뿜어내며 있으리라.
청아한 언어의 향취를 거닐던 아버지는 특별한 일은 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서 청빈한 선비의 정신을 간직했고, 진사라는 아버지 호칭으로 살아오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당당하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인생의 꽃을 피울 나이에 위암에 걸려 청주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서울대병원에서 수술 받고 치료했으나 삶에 대한 애착은 강하셨지만 끝내 떠나셨다.
어머니께서 간병을 하시다가 태기가 있음을 알고 유산을 생각해보았지만 죄짓는 일같아 세상에 내놓은 게 막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달 후에 예쁜 여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당에 조금 다녔으나 글이 좋아 동네에서 글씨를 쓸 일이 있거나 행사 때 머릿글을 도맡아 일필휘지 하셨다한다. 장례식 때 만장에 글을 쓰거나 서류 작성 등이 돌아가신지 62년이 흘러 당신의 흔적이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마지막 남아있는 유품을 정리하여 번역을 하였으니, 특히 자손들은 당신의 뜻을 받들고 , 당신의 진심을 헤아려 삶의 푯대로 삼고, 학문을 익히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던 당신의 뜻을 우러러 가치 있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 송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