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 미술관
미 전역을 수차례 순례하며 기록한 미국 미술관의 모든 것!
“1990년 3월 18일 이른 아침,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시 경찰관 두 명이 미술관 문을 두드렸다. 경비원은 미술관 비상벨이 울려 급히 왔다는 경찰관의 말에 즉각 문을 열어주었다. ‘투캅스’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명의 경비원을 포박해 지하실에 가뒀다. 그러고는 전시실을 마음대로 휘젓고 돌아다니며 그림 13점을 훔쳐 유유히 사라졌다.”
경제학자 최정표 교수의 『부자와 미술관』에 등장하는 미술품 도난 사건. 책에서는 그 13점의 현재 가치 총액이 아마 1조 원에 달할 것이라고 소개한다. 도난이 일어난 이사벨라 미술관은 미국 재벌가의 상속녀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이사벨라 가드너의 개인 소장품으로 설립된 미술관으로, 설립자의 예술적 안목과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던 화가들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 ‘(미국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보스턴 미술관의 분관 같아 보이’는 그리 크지 않은 미술관인데도 그 소장품의 가치는 이처럼 어마어마하다.
『부자와 미술관』은 미술관의 소장품과 작가들의 이야기를 아예 생략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더 중점을 두는 것은 미술관의 경제적 측면이다. 미국이 세계적인 미술관들과 미술품 컬렉션을 지니는 데까지는 엄청난 자금과 경영적 수완이 필요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미국의 재벌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적극적인 투자, 그리고 그 성과를 사회에 돌려주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었다.
부자들의 문화적 안목과 시대를 앞선 경영전략,
예술품들을 담은 또 하나의 예술인 미술관 건축 이야기까지
유럽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슬로건 아래 미국 명망가들의 주도로 설립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제이콥 로저스(로저스 기관차회사, 800만 달러 기부), 로버트 리먼(리먼 브라더스, 3,000여 점의 소장품 기증) 및 J. P. 모건(모건 스탠리, 7,000여 점의 작품 기증) 등의 기여로 세계 최고 미술관의 대열에 올라섰다. 록펠러 가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뉴욕 현대 미술관은 ‘최고 작가의 최고 대표작’을 소장하는 거인이 되었다. 현대미술로 명성이 높은 휘트니 미술관은 2008년 레너드 로더(에스티 로더)로부터 1억 3,000만 달러라는 기증을 받았다. 워싱턴 D.C.를 대표하는 내셔널 갤러리 역시 당대의 대재벌 멜론의 기부(미술관 건립에만 1,000만 달러)로 이루어졌다. 중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시카고 미술관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의 기부 목록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UCLA가 관리를 맡고 있는 해머 미술관의 작품들도 아먼드 해머(옥시덴털 페트롤리움)의개인 소장품으로 이루어졌다. 샌디에이고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레지날드 폴란드처럼, 컬렉션을 다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증자와 기부자를 적극적으로 확보하는 것 역시 미술관의 중요한 능력으로 받아들여진다. 허시혼 미술관 등 탁월한 전시를 선보이는 미술관들 역시 개인의 희사로 만들어진, 미국이 자랑하는 문화공간들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많은 미국 재벌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사업과 투자에 도통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카네기, 프릭, 멜론 등 사회적으로 꼭 아름답게만 돈을 벌지 않았던 기업가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의 예술에 대한 열의는 미국을 문화적으로 무척 풍요로운 공간으로 만들었다. 저자는 재벌들이 사회에 기여한 미술관을 둘러보노라면, 관객에게는 그들의 아름다움만 보일 수밖에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미술관의 관람료는 많아야 이십 달러 남짓이다. 관람객 입장에서 수백, 수천억을 호가하는 그림들이 수없이 걸려 있는 미술관을 그것으로 둘러볼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수지맞는 장사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미술관의 경제적 역할은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미술관은 사회의 문화적 저변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며, 미국이 지금 유럽을 제치고 세계적 문화제국이 되어 있는 원인도 찾아보면 미술관 건립으로 그 씨앗이 뿌려진 셈이 된다.
책에서는 당대의 아방가르드였던 인상파 화가들, 또한 현재의 일반인들의 관점으로도 무척 난해해 보이는 추상표현주의 등 현대미술에 대해 미국 부자들이 보여준 혜안을 이야기한다. 투자자들 곁에서 자문을 맡았던 조언자들의 일화도 상세히 소개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술인 건축과, 통상적인 미술의 이미지를 벗어나는 실험적 조형미술을 시도하는 미술관들의 모습도 자세히 전한다. 오늘날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우연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책이다. 한국의 문화정책입안자들과 기업가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와 조언들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