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분별하는 선지자로,
하나님께로 피해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공동체로
《다시 재난, 다시 하나님 나라》는 코로나19가 잦아드는 시점에 나왔으나 여전히 재난을 이야기한다. 다 잊고 새 출발 하자는 분위기인데, 이를 무색하게 하는 발언이다. ‘이 와중에 또 재난이라니!’ 재난은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는 저자의 말처럼 지진에 전쟁에 세계 곳곳에서 재난 소식이 계속 들려온다. 그 와중에 작은 희망들도 피어나지만, 세계가 더 나아지리라는 전망은 가당찮다.
재난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는 이 같은 ‘예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예언은 그 까닭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언과는 다른 개념이 등장한다. 예언은 단지 미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그에 근거해 다가올 일을 자명하게 ‘예고’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일을 구약성경의 요엘 선지자가 수행했다고 말하면서, 지금도 그 같은 선지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익숙한 명제에 “모든 신자가 선지자”라는 말을 추가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재난을 맞아 휘청이는 이유는 요엘 같은 선지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할 가능성이 큰 이유는 선지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그들의 선지자적 설교가 거의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재난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풀어서 가감 없이 전하는 요엘 같은 선지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91~92쪽) 다시 말해 많은 교회가 재난이 덮친 이유를 직시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신에 흘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처럼 모든 신자가 선지자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종 목적지는 뜻밖에도 ‘공동체’로 향한다. ‘설명’하고 ‘예고’하는 여러 목소리가 넘쳐나면 교회 공동체가 더 시끄러워질 법도 한데, 그 결과는 성도들이 단단하게 연결된 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로 드러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선지자는 자기 느낌이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는 큰 그림과 성령에 기초해 예언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임해서 예언한다고 하면, 샤머니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인은 뭔가 신적 인간이 되거나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과 꿈과 이상은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일하심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그 소중한 지식을 통해 세상사와 인생사를, 더 나아가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갖는다는 뜻입니다.”(129-130쪽) 모든 신자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131쪽)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이쯤 되면 왜 저자가 그토록 재난에 천착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재난을 통해 시대를 분별한 사람들이라야 요새이자 피난처인 하나님에게로 피할 수가 있고, 그렇게 모여야 마지막 날이 올 때까지 서로 돕고 지킬 수가 있다. 하지만 많은 교회는 재난에서 하늘의 징조를 읽지도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께로 피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저자는 바울의 입을 빌려 “충성하지 않은 본래 가지도 하나님께서 아끼지 않으셨는데, 접붙인 가지라고 아끼실 것 같냐고”(81쪽) 도전한다.
이토록 무거운 메시지를 가뜩이나 재난 상황에 전하려면 아무래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저자는 “누가 귀 기울일까 싶어 낙심했습니다.…요엘 선지자 심정이 이랬겠구나”(258쪽)라고 토로한다. 하지만 곧 “너에게 절망의 몫은 없단다. 너는 네게 맡겨진 삶을 살아라”(126쪽)라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선다. 요엘 선지자에서 저자에게로 전염된 이러한 태도가 이 책을 통해 더 넓게 퍼져나가기를 기대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재난에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의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까닭은 그 고통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그 끝을 ‘알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썼듯이 부디 한국 교회가 재난을 통해 자기 민낯을 직면하고, 하나님께로 피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서 드러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