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책을 러시아어의 한 단어, 오브체니(obuchenie)를 생각하면서 마치려 한다. 그것은 이 책의 정신을 반영한다고 우리는 믿고, 사회정의 교육자로서 우리 작업의 틀을 세우기 위한 한 유용한 렌즈를 제공한다. 선견지명이 있는 심리학자, Lev Vygotsky(1987)는 “목적의 상호성에 의해 지배되는 협력적 상호작용”(p.212)으로서 오브체니를 묘사한다. 이 용어는 교수하고 학습하는 행동과 의도를 한 단어로 담아낸다(van der Veer & Valsiner, 1991). 교수하는 행동 에서, 한 사람은 동시에 그리고 필수적으로 역시 학습을 하며, 그 역도 마찬 가지이다. Vygotsky는 교훈적인 교육 실제에 대한 공개 비평가로서, 교사-학습자의 이분법을 거부하였다. 전통적인 심리학으로부터 한 주요한 파기(a major break)에서, 그는 오브체니는 성장을 형성하는 조건들을 만들어가기 위한 교류, 공유된 주의력 및 상호 조정을 통한 결정적인 인지적 발달과 새로운 이해의 출현을 위해 전문가와 초보자가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논의하였다. 다른 말로는, “교사”는 “학생”으로부터 배움으로써 학습을 위한 조건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학습한다. “학생”은 그들이 어떻게 배우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교사”를 이끈다. 상호적인 교수-학습을 통하여, 개인은 협력적인 파트너십에 의해, 그것을 통하여 변모될 수 있다(Stetsenko, 2010).오브체니는 직접적인 영어 번역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때때로 교수하는 행동으로서, 다른 때는 학습의 행동으로, 그런데 다른 때는 교수와 학습 양쪽의행동으로서 번역되어왔다. 영어에, 저자들의 전문적인 맥락의 링쿠아 프랑카(lingua franca)에서, 우리는 교수를 위해 한 단어를 학습을 위해 한 단어를 가지고 있다. 언어의 제한성은 이것들을 다른 기대와 성과를 가진 두 가지 분리된 활동들로 제시한다. 두 단어들의 바로 실재 자체가 비판교육학에서는 한문제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교수와 학습을 구별되는 행동으로, 교사와 학생을 구별되는 정체성으로 지각하는 것으로 문화에 동화되고 적응되었 다. 이러한 언어를 통하여, 교사와 학습자, 그리고 성인과 아동의 위계와 역할들은 구조화되고 유지된다. 영어란 언어는 우리를 배반한다.
아마 그것은 교수와 학습의 이분법의 중단과 학교와 학급을 통해 흐르는 힘의 위계의 방해를 허용할 교육을 상상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바로 그언어의 거부이다. 아마도 아동이 그들 자신의 학습에 주인공이 되고 학교는 불의를 질문하기 위한 장소가 되는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이수준의 불안정성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학생들은 정의, 공평성 및 통합성의 이미지를 통하여 사회적 관계의 세계를 만들고 다시 만들기 위한 태세를 취할 수 있다. 오브체니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서 우리는 세계를 변모 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변모된 것을 발견하게 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