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 문광훈 교수(충북대학교 독일언어문화학과)는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에서 ‘자서전과 반성적 회고’를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 『나의 과거와 사상 』에는 게르첸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경험담이 시대순으로 서술되어 있다. 유명한 모스크바 참새 언덕에서의 어린 날의 맹서에서 시작하여 젊은 날의 체포, 투옥, 추방, 망명, 망명지에서의 정치적 활동과 언론 활동으로 이어지는 게르첸의 삶은 그대로 19세기 러시아의 사회사로 수렴된다. 저자는 개인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독특한 조합을 이루고 있는 게르첸의 자서전을 자서전의 모범 사례로 꼽고, 개인의 자서전 쓰기까지 그 생각을 확대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다른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평전이면서 자서전 글쓰기라는 독특한 구성을 갖췄다.
“여러모로 19세기는 유럽에서 위대한 세기로 기억되고 있으나 러시아의 19세기는 이례적으로 위대한 세기였다. 의존할 만한 전통의 상대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러시아 소설은 일거에 폭발적으로 분출하여 세계문학의 가장 높은 봉우리의 하나를 이루게 된다. 그러한 경이의 비밀이 암울한 사회사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게르첸의 개인사를 통해서도 묵시적으로 드러난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개인사와 사회사의 수렴과 교차를 통해 한 시대를 더욱 충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 유종호, 추천사 중에서
민중의 실상을 직시하면서 사회적 진보를 추구한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게르첸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1812년 부유한 러시아 지주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반 야코블레프는 게르첸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지 않고 아마도 게르첸이 ‘마음의 자녀’였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뜻의 ‘게르첸’이라는 성을 붙였다.
게르첸은 대학 시절에 차르 정부를 비판하고 사회개혁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두 번의 유형을 겪었다. 그리고 35세 무렵 러시아를 떠난다. 그 후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23년에 걸친 기나긴 망명 시절 동안 그가 골몰한 것은 언론 활동이었다. 그는 1853년 런던에서 ‘자유러시아통신(Free Russian Press)’을 설립하였고, 1856년에 정기간행물인 《종(鍾, Kolokol)》을 발행하였다. 1857년부터 11년 동안 나온 이 간행물을 통해 그는 러시아 차르 정부의 무능과 관료주의의 폐단, 농노제의 억압과 민중의 고통스러운 궁핍을 가감 없이 보도하였다. 이 간행물들은 러시아 사회로 몰래 반입되어 사회정치적·지적 분야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마침내 1861년 러시아의 농노해방을 실현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게르첸은 진보적 언론인으로서 무엇보다 농민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매진했다. 그가 추구한 사회주의는 이른바 농민적 인민주의(agrarian populism)였는데, 이것은 사회구조가 농업에 기초한 집산주의적(collectivist) 모델을 따르는 것이었다.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사와 관련하여 자주 거론되는 나로드니키(Narodniki) 운동은 바로 이 모델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게르첸은 나로드니키 운동뿐만 아니라, 이 운동에서 퍼져나간 여러 형태의 비슷한 운동들, 이를테면 미국에서 일어난 농민 공동체 운동의 이념적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러시아 지성사에서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그 지형도를 이루는 인물의 숫자요, 그 이념적 다양성이다. 지적으로 뛰어나고 열정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고, 이 많은 사람들은 제각각으로 다르다. 특히 19세기 러시아 지성사는 세계 최고의 지적 지형도를 보여주었다. 이 전체 지형도에서 게르첸은 흔히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리고 사회주의 이념의 역사에서 그를 마르크스와 대등한 위치를 가진 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는 과격한 사회주의 이론가나 왕당파, 러시아 정교주의자나 슬라브 민족주의자 같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면서도 민중의 실상을 직시하고자 하였고, 자신의 계급적 입장으로부터도 거리를 유지하고자 애썼다.
“글은 곧 삶이 된다.”
‘반성적 거리’가 만들어낸 시대적 사건의 기록물
본격적으로 게르첸의 자서전을 분석하기 전에 저자는 자서전이란 무엇인가를 말한다. 오래전부터 자서전의 형식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는 자기 인식, 자기 서술 개념, 자서전의 면모를 지닌 문학 작품, 자기 글쓰기 형식의 발전 과정, 자서전의 반성적 측면 등 자서전에 대해 꽤 심층적인 분석을 펼친다.
자서전이란 말 그대로 자기 스스로 쓴 글로 자기 서술의 형식을 띤다. 그래서 자서전에서는 작자와 화자, 주인공이 같다. 자서전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쓰는 만큼 주관적이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며 검토하고 성찰하는 ‘반성적 거리’가 개입한다. 이 반성적 거리감 덕분에 주관성을 조금씩 덜어내고 더 높은 객관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잘된 자서전이라면 보도문 이상으로 객관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작자 개인의 내밀하고 실존적인 사연이 없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자서전에서는 개인사와 시대사, 개별적 실존과 집단적 역사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이렇게 두 영역이 겹친 삶을 사는 것은 대개 정치가나 철학자 혹은 성인 같은 위대한 인간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서전의 저자가 위인(偉人)인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하여 이들이 펼쳐 보이는 개인적 삶의 서술은 그 자체로 시대적 사건의 기록물이 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인물의 크기, 성명에 상징되어 있는 별난 출생과 성장 과정, 백만장자 혁명가라는 특이한 정체성, 파란만장한 정치적 이력과 망명 생활, 당대의 주도적 사상가요, 오피니언 리더라는 몇몇 국면만을 고려하더라도 평전 주제로서 막강한 매력과 견인력을 지닌 인물이다.” - 유종호, 추천사에서
소설가적 묘사력, 저널리스트의 현장성, 학문적 능력 …
균형 감각으로 버무려낸 한 권의 깊은 사상서
게르첸의 자서전에는 1800년대 삶이 보여주는 혁명과 좌절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 군상이 전방위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서정적 추억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객관적 진단이 있고, 가족구성원이나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소소하고 정감 넘치는 인상들도 들어 있다. 그래서 사회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실존적 차원에서도 검토해 볼 만한 대목이 많다.
어느 대목에나 등장인물과 관련되는 사건과 그때그때의 대화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소설가적 묘사 능력과, 그 자리에서 사건을 보고하는 듯한 저널리스트적 현장성, 그리고 그 당시 나타난 느낌과 생각을 고전적 비유와 문학적 인용으로 연결 짓는 학문적 능력이 두루 배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글에서나 묘사되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마음이고, 이 객관적 태도에 밴 균형 감각이 아닌가 여겨진다.
게르첸은 밀(J. S. Mill)이나 오언(R. Owen), 바쿠닌(M. A. Bakunin) 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나 사상가와도 활발히 교류했다. 게르첸의 기억 속에 포착된 이 거장들의 생생한 초상화는 그 자체로 뛰어난 문학적 기록이면서 험난했던 시절에 대한 중대한 성찰적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자서전이 보여주고 있는 사고와 문체는 그 자체로서 벌써 경의와 숭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실에의 반응이면서 시류를 거역하는 깊은 사고와 섬세한 문체는 자서전을 한 권의 의미 깊은 사상서로 올려놓고 있다.” - 유종호, 추천사 중에서
인간과 삶의 조건에 대한 내밀한 성찰을 실천
‘자서전 읽기’에서 ‘자서전 쓰기’로
저자가 게르첸의 글을 통해 결국 배우고자 하는 것은 삶의 미시적 변형 가능성이다. ‘우리의 삶과 현실이 어떠하고, 이 현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내 삶을 살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과 그 삶의 조건에 대한 내밀한 성찰이다.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의 삶을 돌아보듯이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이렇게 돌아보면서 자기를 넘어 세계의 친구가 되듯이, 그렇게 읽은 자서전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자서전을 직접 쓸 수도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삶을 보다 넓고 깊게 변형해 갈 수도 있다. 이것은 좀 더 적극적인 실천의 방식일 것이다. 이 실천의 시작은 현실의 직시에 있다. 게르첸의 자서전은 인간의 이런 근원적 욕구를 확인시켜 주고, 본성의 한계만큼이나 본성적인 이 고귀한 의지를 돌아보게 한다. ‘자서전 쓰기’에서 나아가 자기 자신의 친구가 되어보는 ‘자서전 쓰기’는, 삶의 뜻과 보람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권해볼 만한 일이다.
이 책의 구성
저자는 ‘2022년의 게르첸’이라는 관점에서 『나의 과거와 사상 』을 해석하고 논평하면서 재구성해 보고자 시도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저자가 게르첸 자서전의 기존 목차를 따르면서도 어떤 점에서 재조정하면서 이루어졌다. 이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 「자서전과 반성적 회고」는 이번 논저의 중심으로 게르첸의 자서전 『나의 과거와 사상 』을 분석한 것이다. 1장에서는 게르첸의 일생을 스케치하고 이 책을 조감하며 자서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회상록인 『나의 과거와 사상 』을 분석함으로써 자서전의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2장 「가족관계」부터 저자는 『나의 과거와 사상 』을 꼼꼼하게 읽어내려 간다. 우선 게르첸 아버지의 네 형제를 살펴보고, 40대의 아버지가 독일 여행 중 만난 한 여성에게서 태어나게 된 게르첸의 기이한 가정사적 처지를 알아본다. 어린 시절의 생활과 독서 가운데 차츰 느끼게 되는 농노의 현실에 대한 자각과 그 후 갖게 된 농민 공동체의 비전 그리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공감과 자연 체험이 놀라운 관찰력과 기억 속에서 흥미진진하게 묘사된다.
3장 「대학 시절 - 20세 무렵」에서는 게르첸의 20대 대학 시절을 살펴본다. 사회변혁에의 의지가 타올랐던 대학생 시절 모스크바 대학 안에 자리 잡은 ‘참새 언덕’에서 친구들과 행한 맹세와 여성의 삶에 대한 성찰 등이 다루어진다. 4장 「감옥과 추방, 귀환과 또 추방(1834~1847)」에서는 감옥과 추방, 귀환과 다시 추방으로 이어지는 30대의 일상을 소개한다. 체포와 구금의 나날 속에서 게르첸이 관료 계급을 비판하는 가운데 당대 최고의 문학비평가였던 벨린스키(V. Belinsky)나 차다예프(P. J. Chaadayev) 등과 교류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5장 「혁명의 현장(1847~1852)」은 1847년 해외로 망명한 이후 게르첸이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위스와 영국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살펴본다. 그는 1850년대를 전후한 서구 사회의 여러 혁명에서 주역이었던 부르주아들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냉정한 시선으로 서술한다. 6장 「영국에서의 언론 활동」은 1852년에서 1862년 사이에 있었던 영국에서의 언론 활동을 조명한다. 이 언론 활동은 『나의 과거와 사상 』에서 서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으로 저자는 2부 「시민적 자유를 위한 헌신 - 게르첸의 언론 활동」에서 좀 더 폭넓게 이에 대해 다룬다.
7장 「삶의 막바지(1860~1870)」는 게르첸의 말년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혁명적 문필가로서의 자기 삶이 데카브리스트 운동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이 운동에서 내건 ‘인간 품위의 감정’을 옹호하면서 “소유의 폭정” 속에서 상투적인 것들이 득세하는 ‘독재 대중’을 비판한다. 8장 「남은 것들 - 결론」에서는 자서전 쓰기를 ‘자기 자신의 친구 되기’로 규정하고 자서전을 읽고 쓰는 것의 의의를 생각해 본다.
2부 「시민적 자유를 위한 헌신」은 게르첸의 언론 활동을 살펴본 것으로 1부에 대한 보충적 논의로 캐슬린 파르테(Kathleen Parthe)가 2012년에 엮어낸 A Herzen Reader를 분석한 것이다. 이 책은 게르첸이 1850년에서 1867년 사이에 쓴 여러 편의 에세이와 논설 가운데 100편의 글들을 발췌하여 파르테가 영어로 번역한 후 묶은 것이다. 2부에서는 흔히 ‘혁명적 저널리즘’으로 알려진 1857년에서 10여 년 동안 이어진 그의 언론 활동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9장 「1850년대의 현실」에서는 게르첸의 언론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1850년대의 현실은 어떠하였는지 그가 살았던 당대 현실의 사회정치적 성격을 스케치한다. 10장 「혁명적 저널리즘(1857~1867)」에서는 그의 언론 활동에서의 기본원칙과 글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여기에서는 그의 정치적 목표나 인권에 대한 보편주의적 입장이 드러난다.
11장 「개혁적 자유주의자」에서는 이 같은 언론 활동에서 드러난 게르첸의 좌파적 열망을 지닌 혁명적·개혁적 자유주의자의 면모를 살펴본다. 12장 「서글픈 유산 - 결론」에서는 게르첸의 개혁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언론 활동이 오늘의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는다. 그의 개혁적 자유주의가 지닌 에토스에 대한 조명은, 마치 강성 도덕(hard moral)에 대하여 연성 도덕(soft moral)이 있듯이, 사회주의 혁명 이념의 연성적 차원들, 다시 말해 인간과 그 현실의 가능성에 대한 더 깊고 넓은 시각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