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 최초의 위대한 선택, 출아프리카의 길
- 10만 년 전, 아프리카대륙을 벗어난 인류는 어떻게 지구를 정복했나
‘세계사에 등장한 최초의 길이자 인류가 내디딘 가장 위대한 첫걸음을 꼽으라면?’ 바로 ‘출아프리카의 길’, 즉 아프리카대륙에 맨 처음 뿌리내린 인류가 그곳을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이동한 사건이다.
인류가 내디딘 첫걸음 ‘출아프리카의 길’이 왜 위대할까? 장대한 그 길 위에서 인류는 성장ㆍ발전했고, 찬란한 문명의 서막을 열었으며, 그 길이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콘크리트 바닥 위에 떨어져 싹을 틔우지도 뿌리내리지도 못하는 식물 씨앗처럼 태동하지도, 성장하고 발전하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원시 인류가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다른 대륙, 나아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그 길은 최초의 길이자 이후 인류가 개척하고 걸어 나간 수많은 다른 길보다도 더욱 위대하고 중대한 여정이었다.
인류의 조상은 약 20만 년 전쯤 아프리카대륙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약 12만 년 전쯤 그들은 아프리카대륙을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보자. ‘왜 인류의 조상, 즉 초기 인류는 풍요로운 삶의 터전인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대륙,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생각을 했을까?’ ‘미지의 세계’를 향한 초기 인류의 강한 호기심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와 관련해서 학자들의 다양한 주장과 학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관점은 인류가 직립 이족 보행을 하게 된 덕분에 인류의 ‘뇌 용량’이 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류가 직립 이족 보행을 하게 되면서 뇌 용량이 점점 커졌으며, 그랬기에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관심과 호기심도 강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이동한 인류의 그 첫걸음, 즉 ‘출아프리카의 길’은 세계사에 등장한 최초의 길이었으며 가장 위대한 도전이었다.
▣ 지식혁명의 불길을 전 세계로 확산시킨 제지법 전파의 길
-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해 포로로 잡힌 제지 기술자가 세계 ‘기록 기술’의 역사를 바꾸다
‘전쟁을 계기로 지식혁명의 불길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확산시킨 역사적인 길을 꼽으라면?’ 8세기,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중국 당나라에서 이슬람 아바스왕조를 거쳐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제지법 전파의 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위대한 길이 없었다면 인류는 이토록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지도,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지도, 뛰어난 문화유산을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8세기 중반 무렵, 강력한 중국 통일 왕조 당나라와 우마이야왕조의 뒤를 이은 또 하나의 강력한 통일 왕조 이슬람 아바스왕조 사이에 중앙아시아 패권을 놓고 건곤일척의 전투가 벌어졌다. ‘탈라스 전투’가 그것인데, 당나라 현종이 중앙아시아를 평정하기 위해 서역 사령관 고선지를 파견한 일이 본격적으로 갈등을 유발하기 시작했다. 750년, 고선지는 1만 병력을 이끌고 카슈가르에서 파미르 고원에 이르러 타슈켄트의 국왕과 왕비를 볼모로 잡았다. 이에 겁을 먹은 주위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등 소그드인 소도시국가들이 아바스왕조에 원군을 요청했다.
아바스왕조는 그 국가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야드 이븐 살리흐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도 군사 8만 명을 동원해 전투 태세를 갖췄다. 양국 군대는 이듬해인 751년 톈산산맥 북서 기슭에 자리 잡은 페르가나 지방 탈라스 강변에서 격돌했다. 전투는 당나라군의 대패로 끝났다. 당나라 군대에 가담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카를루크 부족의 배신으로 협공당했기 때문이다.
탈라스 전투 결과는 중앙아시아가 ‘이슬람 사회’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크고 중대한 변화, 세계사의 물줄기를 뒤바꿔놓는 변화가 이 한 번의 전투 결과로 일어났다. 그게 뭘까? 바로 중국의 뛰어난 ‘제지법 기술’이 탈라스 전투 이후 이슬람 아바스왕조를 거쳐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며 기록 기술 문화를 혁명적으로 바꾸며 인류문화와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초석이자 원동력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승리한 아바스왕조 군대가 사로잡은 당나라 포로 가운데 ‘제지공’이 끼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제지 기술이 퍼져 나간 것이다. 757년, 아바스왕조는 지체하는 일이 없이 제지 기술을 받아들이고 사마르칸트에 제지 공장을 세웠다.
그로부터 몇십 년 후 『천일야화』로 유명한 아바스왕조 제5대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는 제지 산업을 국영사업으로 정하고 수도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제지 공장을 세웠다. 이렇게 생산된 다마스쿠스산 종이는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이 시대는 이슬람 세계가 급속도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그랬기에 이슬람 문화권이 확장하는 것과 동시에 제지 공장이 곳곳에 세워지면서 제지 기술이 전파되었다.
▣ 유럽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꾼 바이킹의 원정길
- 바이킹의 침략이 없었다면 유럽의 봉건제도도 없었다?
‘중세 유럽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봉건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길을 꼽으라면?’ ‘바이킹의 원정길’이다. 793년에 벌어졌던 잉글랜드 북부 린디스판섬 수도원 습격 이후 바이킹은 몇백 년 동안 잉글랜드ㆍ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사회를 침략하고 위협하며 일대 변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촉발했을까? 우선, 바이킹의 침략 위험이 커지고 일상화하자 유럽 사회는 방어에 집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부로 진출해야 하는 상업과 교통이 쇠퇴하고, 대신 자급자족 방식이 주를 이루는 농업 중심 경제로 변화했다. 그 과정에서 철제 농기구가 발전하고 삼포식 농법을 도입함으로써 농작물 생산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 ‘농업혁명’으로 이어졌다.
바이킹의 침략으로 이보다 더 크고 주목할 만한 변화가 유럽 사회에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봉건제도의 정착과 발전’이다. 왜 ‘바이킹의 침략이 봉건제도를 정착시키고 발전시켰다’라고 말하는 걸까? 이는 유럽 사회가 잦은 외적의 침입, 즉 바이킹의 침략에 맞닥뜨리자 멀리 있는 국왕보다 ‘가까운 곳에 사는 유력자’의 지원이 훨씬 절실하게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유력한 영주 휘하에는 수많은 가신이 모여들었다. 이로써 세력이 커진 영주는 기사단과 토지를 확보하고 자기 영토 내 지배력을 가진 ‘제후’로 성장했다. 이렇게 주종관계가 겹겹이 맺어지면서 유럽 봉건제도가 형태를 갖추어간 것이다.
이렇듯 북방의 미개척지에서 내려온 바이킹은 기존 중세 유럽의 사회 구조를 완전히 뒤집고 새로운 판을 구성하는 열쇠를 쥐고 있었다.
모든 역사는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
- 39가지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통찰하면 세계사의 장대한 흐름이 한눈에 잡힌다
이 책 『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39가지 길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위대한 선택, 출아프리카의 길’에서 시작해 ‘무역과 식민지를 발판으로 고대 지중해 세계를 평정한 페니키아인의 길’, ‘역설적으로 아테네에 ‘민주주의의 길’을 열어준 페르시아 전쟁의 길’, ‘서로마제국 멸망을 불러온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길’, ‘유럽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꾼 바이킹의 원정길’, ‘신항로 개척 시대의 포문을 연 레콩키스타의 길’,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반열에 올려놓은 드레이크의 세계 일주 항해의 길’, ‘‘잠자는 사자’ 미국의 코털을 건드려 스스로 멸망의 길로 들어간 일본 군국주의의 길’에 이르기까지 고대, 중세, 근세, 근ㆍ현대를 망라하는 인류 역사를 만들어낸 위대하고도 흥미진진한 39가지 길 이야기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