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정판에 부쳐
-왜 갈등론인가?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은 현상학적 사회학, 민속방법론 등 현대사회학 이론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과 함께 4대 고전학자로 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짐멜은 생전에도 대표작 『화폐의 철학』(Philosophie des Geldes, 1900)을 비롯한 많은 저작들이 유럽 각국에서 번역되는 등 유명세를 타고 있음에도 정작 본국 독일에서 43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시골 대학 교수가 될 정도로 각광을 받지 못했다.
짐멜의 사회학을 이해하려면 『화폐의 철학』 외에 짐멜의 주저 『사회분화론』(1890), 『사회학의 근본문제』(1917) 등을 읽어야겠지만 내용도 전문 사회학자가 아니면 이해가 어려운데다가 짐멜의 문장도 난해하여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초판을 번역할 때도 애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독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개정판을 출간하게 되었다. 그간 독자들의 질책도 있었지만 막상 초판 원고를 살펴보니 5년 사이에 옮긴이 생각이 발전(?)해서 그런지 문장이 어색한 곳이 상당수가 발견되었고, 약간의 오역도 발견되었다.
하여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 번역한다는 생각으로 문장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개정판에서는 일부 용어도 보다 적합한 용어로 대체하고, 초판과는 완전히 다른 아니 더욱 발전된 책으로 탈바꿈했다.
이 책이 단순히 짐멜의 사회학을 재조명하자는 의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하고 있는 갈등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을 될 것으로 기대한다.
2. 사회학자로서 짐멜의 역할
게오르크 짐멜(1858~1918: Georg Simmel)은 『돈의 철학』(Philosopie des Geldes)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짐멜은 칼 마르크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켕과 함께 현대 사회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요한 고전 사회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독일(당시 프로이센)에 태어난 짐멜은 시기적으로 보면 막스 베버(1864~1920)와 거의 동년배이고, 마르크스(1818~1883)보다는 40년 뒤늦게 태어났다. 짐멜이 태어날 무렵 마르크스는 이미 성숙하여 마르크스이론은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기이다.
짐멜은 막스 베버,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nd Tőnnis)와 함께 독일 사회학회를 창립하고, 그의 저작들은 당대의 1세대 사회학자들에 의해 많이 읽히고 인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출신인 탓인지 아니면 탁월한 학문적 유명세로 인한 학계의 시기심 탓인지 오랫동안 교수직을 갖지 못하고 현재의 시간강사 같은 사강사(Privat Dozent) 지위에 머물렀다. 짐멜은 43세이던 1901년 베를린대학 명예조교수 자리가 주어졌으나 그 자리는 급료도 없고 학사행정에도 관여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직책이었다. 당시 짐멜의 저작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폴란드어로 번역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그에게는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10여년 후 1914년 정교수가 되었지만 그곳은 변방의 도시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지방대학이다. 그리고 4년 후 짐멜은 숨을 거두었다.
짐멜은 사회학자이면서 철학자이다. 그는 『사회 분화』(Über sociale Differenzierung), 『사회학』(Soziologie), 『사회학의 근본 문제』(Grundfragen der Soziologie) 같은 사회학 저작 뿐 아니라 『윤리학 개론』(Einleitung in die Moralwissenschaft), 『역사철학의 문제』(Die Probleme der Geschichtphilosophie), 『돈의 철학』(Philosophie der Geldes), 『칸트와 괴테』(Kant und Goethe), 『종교』(Die Religion), 『쇼펜하우어와 니체』(Schopenhauer und Nietzsche), 『철학의 주요 문제』(Hauptprobleme der Philosophie), 『인생관』(Lebensanschauung), 『예술철학』(Zur Philosophie der Kunst) 등 철학, 종교, 윤리학, 예술 등에 관한 저작을 남김으로써 그의 학문적 경지는 종합학문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작에서 보듯이 짐멜의 학문적 영역은 종합학문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짐멜의 학문적 영역은 분절된 분과학문을 단순히 종합해서 묶어 놓은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현상을 반영하는 일관된 사회관을 표방하고 있다. 사회학의 주요 관심은 사람들(또는 집단들) 간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마르크스의 계급관계, 베버의 개인 행위 간의 관계, 뒤르켕의 사회분화는 물론 현대 사회학의 구조기능주의, 갈등이론, 교환이론, 상징적 상호작용이론 할 것 없이 모두 관계-상호작용-를 다루고 있다. 그 관계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즉 우호적이냐 적대적이냐, 대립적이냐 상호적이냐에 따라, 요컨대 갈등관계에 있느냐 아니면 통일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많은 이론들이 분기되고 대결하고 있다.
3. 갈등은 통합을 위한 한 방편
-갈등은 서로 대립하는 것들 사이의 긴장을 해소한다
갈등(conflict)의 사회적 중요성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도 원리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었다, 갈등은 각종 이익집단, 통일체, 조직체를 생겨나게 하기도 하고 또 변화시키기도 한다. 한편, 갈등을 유발하는 현상 또는 갈등이 수반하는 현상을 고려하지 않고 갈등을 통합을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는 것은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언뜻 보면, 이것은 수사학적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상호작용을 통합과정이라고 한다면, 갈등도 마땅히 통합과정의 한 형태로 간주해야 한다(갈등은 가장 강렬한 상호작용의 하나이며, 개인 혼자의 힘만으로는 일어날 수가 없다). 증오, 시기, 욕구, 욕망 등 통합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갈등의 근원이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갈등은 서로 갈라지는 이중성(divergent dualism)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갈등은 통일(unity)을 성취하기 위한 한 방법이다(서로 갈등하는 당사자들 중 하나를 제거하는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말이다). 요컨대 갈등이란 대략적으로 비유하자면 질병으로 인한 장애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때 심하게 통증을 느끼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현상[갈등]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 준비를 하라”(sivis pacem para bellum)는 말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현상[갈등]은 아주 일반적인 현상인데, 이 격언은 특수한 경우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갈등은 서로 대립하는 것들 사이의 긴장을 해소한다. 갈등은 평화를 지향한다는 말이야말로 갈등의 본성을 명백하게 나타내는 유일한 표현이다. 갈등은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과 서로 옹호하는 요소들을 종합한다.
갈등의 이런 성질은 대립과 수렴 두 형태의 관계가 둘 이상의 개인 또는 집단 사이의 무관심(indifference)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무관심은 통합의 거부를 의미하든 폐기를 의미하든 순전히 부정적인 측면을 내포한다. 무관심이 순수하게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갈등은 긍정적 측면을 내포한다. 즉 갈등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통합되어 있다. 이 두 측면은 개념상으로는 분리할 수 있지만 실제 경험에서는 분리되지 않는다.
갈등: 집단 통일의 원동력
-반대(갈등)는 사회 통합을 추동하는 기본 형태의 하나다
이와 관련해서는 많은 복잡한 사례들이 존재하는데 그중 대립되는 두 개의 유형이 있다. 첫째, 사회에는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 같은 많은 소집단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소집단들 내에서도 구성원들은 수많은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다. 소집단 내에서는 일정한 정도의 불화 - 내부의 분열과 외부와의 논전 - 가 궁극적으로 집단을 통합하는 많은 요소들과 유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불화는 사회학적 구조의 통일과 분리될 수 없다. 이는 결혼에 실패한 경우에는 물론 결혼생활이 어지간히 견딜만하거나 적어도 참고 견뎌낸 생활양식으로 점철된 경우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런 경우의 결혼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갈등의 양에서 보면 ‘하찮은’ 결혼이 아니다. 오히려 결혼은 그러한 많은 요소들(이 요소들 중에는 분리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한다)로부터 그것만의 명확하고 특색 있는 단위 로 발전된다.
둘째, 사회 분열과 계층화가 첨예해져서 구성원들 상호 간에 순수한 형태의 적대감(hostility)이 나타나는 구조에서도 그러한 적대감은 긍정적이고 통합적인 역할을 한다. 예컨대 인도의 사회체계는 카스트제도의 위계뿐 아니라 카스트 간 상호 배척에 직접 의지하고 있다. 적대감은 집단 내에 있는 여러 경계들(boundaries)이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적대감을 종종 의도적으로 장려하기도 한다. 적대감은 이러한 역할을 넘어 직접 사회학적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 즉 적대감은 종종 여러 계급과 개인에게 상호적 위치를 제공해준다. 만약 적대감의 감정과 표현이 적대성의 원인을 수반하더라도 나아가 적대감의 객관적 원인이 동일하더라도 계급이나 개인은 그러한 상호적 위치를 발견하려 하지 않거나 동일한 방식으로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서로 배척하는 요소들 -달리 말해, 파괴적인 요소들 -이 소멸된다고 해서 사회적 삶이 반드시 풍요롭고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책임 소재가 소멸되면 더욱 중대한 속성을 낳듯이) 전혀 다른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즉 집단 내에서 협력과 애정, 상호부조, 이익 등의 조화의 동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체로 경쟁 상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때 경쟁은 집단의 형태, 참여자의 상호적 위치, 참여자들 사이의 거리를 결정하며, 그 객관적 결과와 상관없이 순전히 여러 긴장들의 형식적 지형까지도 결정한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구성원들의 태도에 기초하는 집단에도 나타난다. 어떤 구성원이 자신이 속한 집단에 반대한다고 해서 순전히 부정적인 사회적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반대는 종종 삶을 견뎌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횡포와 독단, 변덕, 무분별에 대해 대항할 수 있는 힘과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가진 특성들만으로는 사람들과 맺고 있는 어떤 관계도 견뎌낼 수가 없다. 우리는 필사적인 노력을 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종식시킬 수는 있지만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이는 한편으로는 억압(oppression)을 묵묵히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면 억압이 증가한다는 사실(물론 이것은 여기서 본질적인 사실이 아니다)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opposition)가 (상이한심리적 조건하에서 겸손과 인내처럼) 내적 만족과 기분전환, 위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반대는 우리가 환경의 완전한 희생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반대는 우리의 장점을 의식적으로 증명해주며, 또한 우리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물리치고 싶은 여러 조건들에 생명력과 상호성을 부여해준다.
반대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목표를 성취한다. 이 경우 반대는 실제로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순수하게 은밀하게 진행된다. 반대는 설사 실질적인 효과를 나타내지는 못하더라도 내적 균형(때로는 언젠가 둘 중 한쪽이 둘 관계에서 우위에 있더라도)을 달성하기도 하고, 묵묵히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또 반대는 실제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느끼게 하고, 그 지속성 때문에 관찰자를 종종 당혹스럽게 하는 각종 관계들을 구제해 주기도 한다. 이 경우 반대는 관계 자체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관계를 존속시키게 하는 여타 요인들과 뒤엉켜 있다. 반대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관계를 구성하는 명확한 기능의 하나이다. 순전히 외적이고 실질적으로 별로 중요성하지 않은 관계인 경우에는 잠재적(latent) 갈등-혐오와 상호 소외감 또는 반감-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것들은 아무리 자주 일어나더라도 좀 더 친밀한 접촉에 기초하고 있어서 곧바로 긍정적인 증오와 투쟁으로 바뀐다.
그러한 반감(antipathy)이 없다면, 우리는 현대도시의 삶을 상상할 수 없다. 현대의 도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매일 다른 사람들과 무수한 접촉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내부조직은 동정(sympathy)과 냉담(indifference), 혐오(aversion)가 어우러진 아주 복잡한 위계로 구성되어 있다(이 중에는 아주 단명한 것도 있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도 있다). 이러한 복잡한 위
계에서 냉담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리적 활동은 어떤 명확한 감정을 가진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거의 모든 인상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은 잠재의식적이고 일시적이며 쉽게 변하는 성격을 띠고 있어 그러한 활동이 냉담으로 치환되어 보일 뿐이다. 현실에서 그 같은 냉담은 우리에게 부자연스럽게 나타나는데, 우리는 수많은 모순적인 자극들이 가진 모호한 성격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감에 의해 도시의 이러한 전형적인 위험들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반감은 확고한 적대감이 나타나기 전의 예비 국면으로서, 우리가 도시생활을 영위해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거리감(distances)과 혐오감(aversions)을 생겨나게 한다. 반감의 정도와 배합, 반감의 출현과 소멸의 리듬, 그것을 충족시키는 각종 형식들-이 모든 것들에 의해 (통일의 요소들과 더불어) 대도시의 생활형식이 분해할 수 없는 통일체로 형성된다. 반감은 얼핏 보면 사회를 해체(dissociation)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통합을 이루는 기본 형태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