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근원인 아버지,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고백의 저변에는 오늘날 달라진 아버지의 위상이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바라보고 의지했던 아버지와 오늘날 아버지로 살고 있는 저자 자신의 모습과 무게에서 느끼는 차이이다.
그런데 바뀌었다. ‘아버지는 엄하고 어머니는 자애롭다’는 엄부자모嚴父慈母란 말이 암호처럼 들리는 세상이 되었다. 언제 누가 어디서부터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온통 친근한 아버지, 푸근한 아버지, 허물없는 아버지 타령으로 온 세상이 난리다. 말 잘하지 못하는 아버지나 무뚝뚝한 아버지는 낙제감이다.(65쪽)
마침내 저자는 혼돈을 고백한다. 오늘날 아버지로 살고 있는 자신의 위엄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친구로 편안한 동료가 되어 버리는 순간 원래 있어야 했던 저 위의 아버지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한다. 그의 물음은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당신은 아버지를 존경하는가, 아니면 무서워하는가?” “아버지를 신뢰하고 따르는가, 아니면 억지로 끌려 다니는가?” “친근한 아버지의 사랑을 진정으로 느끼는가, 아니면 만만하게 여겨 늘 나만 위하는 아버지여야 한다고 여기는가?”(66쪽)
질문은 확대된다. 더욱 직설적이며 당돌한 질문을 거침없이 던진다. 예수 없는 교회가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단 말인가. 왜 기독교적인 삶을 산 인물들을 교회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는가.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 설교의 온도차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모두 똑같은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줘야 하는가. 왜 핑계를 대는가. 왜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로봇이 되려 하는가. 왜 사랑 없이 가르치려 하는가. 왜 목적만을 추구하며 사는가.
그의 질문은 잠시 생각을 멎게 하고 말문을 막히게 한다. 너무 원론적이기도, 너무 과감하기도, 너무 직설적이기도 하면서 그의 말처럼 “너무 당연해서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에 대해 묻기 때문이다. ‘글쎄 왜 그럴까’ 또는 ‘맞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 하는 사이 유광수는 색다른 이야기 실타래를 푼다.
고전과 현실과 성경이 뫼비우스 띠처럼 서로의 세계를 넘나든다
저자는 우리의 고전과 성경을 오묘하게 오버랩시킨다. 〈혹부리영감〉 이야기를 풀고, 삼강오륜의 차별적 이데올로기를 고발하고, 홍길동과 전우치를 비교하고, 강태공 이야기를 들려주고, 열녀론을 비판하며 『청구야담』의 한 페이지를 들추고, 심지어 〈변강쇠가〉의 변강쇠와 옹녀까지 불러내고, 〈여우누이〉와 황주목사 아들들을 소환하고, 〈박씨전〉을 분석해주고, 〈장자못 전설〉을 들려준다.
한편 현재 일어나는 이들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는 세상이라고, 금수저·은수저·흙수저가 있는 현실이라고, 부모의 과잉보호로 자식들이 제 갈 길을 찾지 못한다고, 결과만 보고 본질은 흘려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주객이 전도된 것도 모른 채 살아간다고, 운명론에 갇혀 자신을 잃고 산다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저자, ‘아버지’는 미래를 말했다
저자는 안타까워하며 다시 한 번 고백한다. ‘아버지 당신’이 너무나도 그립다고 말이다.
지금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자리에 여호와든 야훼든 하나님을 넣어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과연 어떤 답이 나오는가? ‘아버지’ 그 이름의 무게는 천금과 같다. 함부로 부를 수 없다. 무섭고 멀고 귀찮아서가 아니다. 감히 막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간절하기에 그렇다. 든든한 버팀목이자 끝없는 후원자인 그분이기에 그렇다. 그런 그분이 나를 응원하고 지켜보시기에 비록 나는 약하지만 강했고 부족했지만 넉넉했다. 눈물이 웃음으로 바뀔 수 있었다. 이름의 무게를 알지 못하는, 아니 이름에 무게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시대에, 정말이지 ‘아버지 당신’이 너무나도 그립다.(67쪽)
하지만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스스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그 길을, 시간을, 기회를 주는 ‘아버지’의 관용을 전한다. 아직 기회가 있음을 강조한다.
부활한 예수는 ‘과거’에 자신을 배신한 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지금 ‘현재’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옹졸함을 지적하지도 탓하지도 않았다. 오직 예수는 ‘미래’를 말했다. 제자들은 예수가 말한 미래를 믿었다. 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도 않고 현재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미래를 말한 예수가 떠난 뒤, ‘미래는 자신들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들은 나섰다. 예루살렘에 모였고 기도했고 기다렸다.
후회하고 낙심하고 좌절한 사람들, 분노하고 울분에 차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예수는 과거도 현대도 아닌 미래를 말했다. 앞으로 나아가라고, 믿음을 가지라고, 용기를 가지고 한 걸음 내딛으라고 부탁했다.
예수의 부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부탁은 나와 당신에게 무모한 제자들이 되기를 권유한다. 그 무모함은 과거에 좌절하지 말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는 권유다. 미래를 만들어가라는 간곡한 부탁이다. (2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