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의 창작 노트는 매일 더 두꺼워진다.
안경진 조각가는 작업을 쉬지 않는다. 흙을 만지며 작품에 몰입하는 일이 그가 자신을 증명하는 길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 끊임없는 생활의 요구에서 완벽히 떨어져 나올 수는 없다. 그때, 조각가는 헤나가 아니라 펜을 든다. 작업을 쉬지 않는 작가이기에, 그의 창작 노트도 매일 더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예술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믿음
안경진 조각가의 대표 작품은 그림자 조각들이다. ‘그림자 조각’이란 조각 그 자체는 물론 그것의 그림자까지 작품이 되는 조각이다. 그는 “그림자는 조각 작품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고 하면서 우리 바로 옆, 허공에 존재하는 그림자의 의미를 찾는다. 물성을 지닌 조각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그림자, 여백의 무게가 더 육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외롭게 걸어가는 남자의 형상은 ‘원’이라는 완벽한 형상의 그림자를 만들며, 거친 바람을 거슬러 자신의 이상향을 향해 길을 떠나는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한다. 종이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끄는 할머니의 형상은 그가 젊은 남녀였을 적의 모습을 그림자로 드리우며 조각에 새겨진 미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이처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던 조각의 그림자가 의미를 띠면서 존재와 비존재, 물질과 여백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호보완 관계임을 깨달을 수 있다.
실제로 안경진 조각가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시청각 장애인들과 함께 조각 작업을 하는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시청각 장애인들은 촉각을 활용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안경진 조각가는 그들을 상징하는 조각을 만들어 세상에 그들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림자 조각이라는 표현 방식을 넘어 예술이 실제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여백의 무게 -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는 그런 저자의 철학과 작업 과정도 담고 있어 독자들에게도 예술의 의의를 재고하게 한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조각
짧고, 빠르고,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주목을 받는 세상이다. 예술도 변하고 있다. 기존의 예술 형식을 뒤엎는 컨템포러리 아트조차 나름의 방식으로 물성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메타버스’ 같은 가상현실 속에서 예술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아티스트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런 시류에서 조각은 여러 예술 장르 속에서도 입지가 좁다. ‘조각 = 장식’이라는 대중의 인식 속에서 거친 것, 거대한 것, 한 마디로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것’은 대중의 관심 밖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안경진 조각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어떻게 구축하고 있을까. 그림자 조각은 필연적으로 조명이 설치되어야 하고, 그림자가 드리울 여백, 공간이 필요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작품”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런 엇갈림에서 빚어지는 예술가의 고뇌를 솔직하게 풀어놓는 한편, 그럼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견지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물론 안경진 조각가가 기존 조각 작업 방식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환경오염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려 하며, 3D 그래픽을 배워 작품 제작 방식도 다각화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세상의 흐름과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확고하게 다지면서도 유연한 자세를 취할 줄 아는, 동시대 예술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여백의 무게 -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는 조각가의 창작 노트인 1장, 작가가 직접 쓴 작품 해설이 곁들여진 작품집인 2장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개정판은 초판보다 큰 판형 속에 안경진 조각가의 작품을 큼지막하게 담았다. 작품마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진가들이 촬영하였으며, 특히 안경진 조각가의 대표 작품인 그림자 조각들은 실제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예술의 평면적 복사본인 사진이 원작의 아우라를 전부 담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많은 이들이 책이나 영상에서 본 명작을 보기 위해 원작이 전시된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 책 또한 독자가 전시장을 찾아 감상자로 거듭나기를 유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예술, 특히 조각이라는 장르에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긴 여정의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