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영웅 안중근, 발자취를 따라 그의 면모를 다시 본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는 총성과 함께 한 장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총성과 함께, 하얼빈에 왔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대로 쓰러졌다. 장부는 곧바로 러시아 공안에 체포되어 일본 정부로 인도되었다. 그가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일본 정부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결국 1910년 3월 26일, 그는 처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바로 우리 민족의 횃불 같은 정신으로 남은 영웅 안중근이다. 우리는 그를 단지 독립운동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숨겨진 면모를 좀 더 세밀히 알아보자.
안중근의 역사는 곧 일본 제국주의 투쟁의 역사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 황해도의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성균관진사인 부친 안태훈과 조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나 부족함이 없던 안중근. 그는 왜 그런 편한 삶을 버리고 이토 부미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의 상황을 이해해야 가능하다.
당시 조선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위태로운 처지였다. 나라 밖으로는 동서양의 강대국들이 무력을 앞세워 틈만 나면 조선을 삼키려고 눈을 번뜩였고, 나라 안에서는 관리가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이 다반사여서 백성들이 마음 편히 생업이나 학업에 힘쓸 처지가 못되었다. 게다가 갑신정변, 청일전쟁, 을미사변, 러일전쟁 등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나면서 점차 국운이 기울고,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다.
이에 대해 안중근은 지식인이자 선각자로서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이를 타개하려면 백성들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먼저 택한 방법은 백성을 위한 계몽책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비를 모두 털어 삼흥학교를 세우는가 하면, 이후 천주교 계열의 돈의학교를 인수한다.
하지만 일본의 만행은 점점 극에 달해 가고 조선의 미래가 끝을 알 수 없는 벼랑 아래로 치닫게 되면서 식민주의라는 거대한 폭풍우에 휘말리자 계몽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해 의병운동을 전개한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었다. 이러한 그의 일련의 행보는 지식인이자 선각자로서 시대적 고뇌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방법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후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국내외(특히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북한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독립운동가인 것이 그 근본적 이유겠지만, 단지 그것만이 그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안중근이라는 한 인격체에서 드러낸 다채로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이들에게 깊은 존경을 불러올 것이다.
대한민국 영웅 안중근은 정작 어떤 사람이었나?
그렇다면 이 책에 나온 삶의 궤적에서 본 안중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1. 안중근은 사상가이자 위대한 실천가였다. 안중근은 이미 100 여년 전에 동북아를 넘어 아시아의 평화 체제를 구상한 사상가이자 그 구체적인 실천방략까지 고민한 위대한 실천가였다.
2. 안중근은 문명개화론자이자 행동가였다. 그는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대한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자, 동시에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 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였다.
3. 안중근은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의 이해타산 속에서 만국공법이나 국제법
이 한낱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자신이 먼저 포로에 관한 국제공법을 준수하고 본인도 그에 따라 정당하게 재판받기를 당당히 요구한 이상주의자였다.
4. 안중근은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는 의병투쟁이 무력할 때 국제열강에 대한 충격요법으로 한국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고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고발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공판 과정에서도 개인의 운명보다는 거사의 목적을 알리는데 주력한 탁월한 전략가였다.
5. 안중근은 구한말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이자 교육자, 애국독립투사였다. 그는 청년기 이후 사회의 요구에 호응하면서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을 전개한 구한말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였다. 근대 민족의식, 민권사상, 국권사상을 가지고 있던 투철한 사상의식을 가졌던 그는 조국이 식민지의 나
락으로 떨어지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을 한 교육자였으며, 의병투쟁에 직접 참가한
실천적 애국독립투사였다.
6. 안중근은 국제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민족 독립의 논리와 동양 평화의 논리를 불가분의 관계로
구조화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주의를 무력화시키고 민족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그는 자민족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강조하며 지역 협력을 강조한 열린 민족주의자이자, 진정한 동양 평화의 주창자로서 국제 평화주의자였다.
7. 안중근은 탁월한 문장가이자 서예가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붓에 담아 탁월한 논리를 펼치는 문장가였다. 메시지가 강렬하면서도 은유와 비유를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점에서 그는 훌륭한 필력을 소유한 작가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에게 글을 부탁했고, 그가 남긴 유묵을 볼 때 그는 탁월한 서예가였다.
8. 안중근은 위대한 종교인이었다. 그의 모든 활동에서 항상 중심이 된 것이 있었다. 바로 카톨릭이다. 궁극적으로 그의 생활과 정신에 주축이 되었던 종교적 신념에 항상 충실했던 그는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안중근이라는 한 사람의 면모를 모두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만 표현되고 있는 그의 숨겨진 면모를 좀 더 드러내 그를 좀 더 면밀히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 이 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그의 숨겨진 면모를 볼 수 있다면 그의 사상과 생각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민국에서 전세계에 일본의 잘못을 알리고, 일본을 벌한 의사(義士)로 추앙받고 있는 영웅으로서 항일 활동가 가운데 가장 많이 칭송되는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일제에 고통받는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을 품고 일본의 침략을 이끌던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는 의거를 행하였다. 이후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인(聖人)의 자세를 지켜 마지막까지 일제의 유혹을 뿌리친 진정한 애국자이다. 그의 나라를 생각하는 올곧은 정신과 이를 잘 드러내주는 서예 작품들 또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의거는 당시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 만들려는 일본의 야심에 대하여 대한제국에게 자존심을 보여주는 쾌거였다. 조선 침략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함으로써 일본이 자신들의 보호국화를 위한 타당성에 대하여 국제법적 불법성을 널리 알린 대 의거였다. 그리고 일부 한국인들의 강력한 항일 투지와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또한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 라고도 항변하였다. 이후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했다. 안 의사의 거사는 일본의 의도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는 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기에 일본은 예정대로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
그러나 안 의사가 서거 후에도 일본에서는 의거 후 일제강점기에 들어갔음에도 안중근 연구회가 만들어졌다. 특히 놀라운 건 뤼순 감옥의 간수들 중 그의 전담 간수이던 지바 도시치 등 여럿이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스스로 일본인임이 부끄럽다고 하였다. 이어 중국은 하얼빈역에 아예 안중근 기념관을 건설하여 그의 기상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안중근을 다시 불러내는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 책을 통하여 안중근의 위대함과 숭고한 인간성에 대하여 흠모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게다가 각 장마다 각주를 별도로 분리해서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