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과 비판이 공존하는 공감의 언어
박명순의 문학평론은 공감의 언어다. 여기서 공감이라는 말에는 공명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비판도 포함되어 있다. 어쩌면 ‘공명’ 자체에 비판이 기본 속성으로 깔려 있을지 모른다. 비유하자면, 작품을 먼저 끌어안은 다음에 체온을 충분히 공유한 후 작품의 ‘얼굴’을 확인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행위에는 이미 공유한 체온을 충분히 믿지 못해서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차이마저 서로 긍정하자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박명순의 문학평론에는 날이 서 있지 않고 마치 새 둥지 같은 느낌을 준다. 비판은 곧 탄핵이라는 살벌한(?) 정의가 고래로부터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언어이지, 박명순의 언어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박명순의 비평 언어는 분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말 걸기’ 내지는 ‘대화’에 가깝다. 다음의 예를 보자.
『고향』에는 부대끼며 살아가는 농민의 일상이 실감 나게 담겨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마름 안승학이 우체통에 넣은 엽서가 집에 배달되는 것을 신기해하는 수준의 촌사람들입니다. 김유정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떠돌이나 극빈의 인물들은 아닙니다만. 도긴개긴 부족한 인물들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저마다의 삶을 꾸려나갑니다.
당연하지만 이상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희준과 갑숙조차 유혹에 약한 결함을 지닌 인물입니다. 못난이 아내와 못난이 남편이 티격태격하나 문제를 해결해낼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건강한 생명력이 넘쳐납니다.(「민촌 이기영의 『고향』을 만나러 갑니다」, 31)
글이 경어체로 씌었다는 점, 그리고 읽기를 감행하고 있는 텍스트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범상하게 보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문제는 경어가 단지 외형적인 게 아니라는 점과 텍스트의 인물들에게서 “건강한 생명력이 넘쳐”나는 점을 찾아 읽는 것이 외형상의 경어체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록 경어체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박명순의 문학평론이 어떻게 독자로 하여금 공감의 길을 따라가게 하는지 잘 보여준다.
독자(또는 작가)는 잠재적 환자이자 현실적 치유자로서 존재한다. 진정한 환자만이 그 치유의 길을 가장 잘 안내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미루어 짐작한다. 이 추론은 대부분 성공적이며 따라서 질병은 때로는 작가에게 창작 의욕으로 작용하고 직접적으로 작품에 깊이 관여하기까지 한다. 이 경우 작품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작가의 세계가 투영된다. 권정생의 『강아지똥』(길벗어린이)의 탄생에 옷깃을 여미는 이유이다.(「문학에 나타난 질병의 얼굴들」, 159~160)
지역 문학에 대한 애정
이 책에는 저자가 거주하는 충청 지역의 작가, 시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자심하다. 이는 다순한 ‘지역주의’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글쓴이들이 자기 지역의 문학을 알게 모르게 떠나 ‘서울’을 지향하는 태도부터 돌아봐야 할 문제다. 저자는 이미 이기영의 소설을 읽으면서부터 이 로컬리티를 놓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이기영은 농촌에 살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충남의 천안 사투리가 정겹습니다.”(29) 사실 충청 지역의 내로라 하는 작가와 작품만 읽어도 문학평론의 본령을 수행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이며, 이는 충청도뿐만의 사정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호출한 충청 지역 작가와 시인의 목록을 다채롭기까지 한데, 비록 짧은 독후감이지만 수필을 쓰는 임명희를 주목하기도 한다.
『공장 지대』에 담긴 1970~1980년대 변혁운동의 한복판에서 밀려난 ‘일상성’의 고백과 기록의 서사는 10대 소녀의 표정을 노동자의 시선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이론이 아닌 체험으로 채웠던 그녀들의 삶과 노동은 교조적 당파성의 빈틈을 채워, 시대의 실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경험이 강제하는 고통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분명 작가에게는 커다란 축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하지만 우연하게 주어진 이 역사적인 축복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안에서 만들어낸 한글 독해 소모임이나 바둑 모임의 의미를 저는 자생적 노동운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임명희 작가에게 보내는 글」, 474~475)
이에 대해 추천사를 쓴 황규관 시인은 “자칫하면 인정 비평으로 흐를 수 있지만, 박명순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자기 지역에 사는 작가와 시인을 주목하는 비평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현상은 격려할 만하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충청 지역 작가들을 호명할 때도 저자는 예의 그 공감의 언어를 잃지 않는다.
이 책은 1부에서 소설 비평을, 2부에서 시 비평을, 3부에는 일종의 주제 비평을 실었다. 특히 3부에 대해서 저자는 “우리 시대 문학의 흐름과 관련하여 ‘연대’, ‘생명력’, ‘한국시 미래’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담아봤다면서 여러 시인과 소설가를 호명하는데 그 면면이 치우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저자의 성실성을 엿볼 수 있는 바, 이미 ‘작가의 말’에서 밝히기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해명하지 않듯이 저도 묵묵히 글쓰기에 집중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작품에 공감하는 바가 남다르다. 이언주의 시를 읽으면서 표출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것은 여실히 드러난다.
엄격한 의미에서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고통을 다소 줄여줄 수는 있을 것이나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일 또한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다. 하지만 그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그들이 받은 고통을 우리 시대의 질병이나 인간존재의 미미함으로 인식하는 일은 귀하다. 비천함과 고귀함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속됨과 성스러움의 실체를 증명하는 시편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음률의 강렬함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이다.(「시를 통한 연대의 가능성」, 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