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통해 보는 우리 내면의 풍경과 세상을 둘러싼 이야기
김호석 화백은 우리 선조가 사용했던 한지를 직접 재현해낸 이력으로도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 때 사라져버린 한지를 재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 전국을 돌면서 기능장들을 찾아 애기닥나무와 구지뽕을 교잡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겨우 찾은 나무를 화실 옆 밭을 일구어 직접 심고 교잡해 얻은 나무로 직접 한지를 만들기도 했다. 프랑스 박물관에서는 이 종이의 우수성을 알아보고 박물관 고자료나 물품을 복원하는 재료로 공식 채택하기도 했다. 화백은 자신이 힘겨운 과정에서 재현한 한지에 자신의 작품을 옮겨놓는다.
도시풍경, 역사화, 인물화, 가족화, 동물 곤충, 몽골 사람들과 자연, 초상화, 종교화로 이어져 드디어는 거의 추상화에 가까운 그림까지 화백의 작품은 저자인 요세파 수녀에게 두른거림과 설렘을 한가득 안겨주는 섬처럼 펼쳐진다. ‘저 섬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멀리 잘 보이지도 않는 섬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 책은 김호백 화백의 작품이라는 섬을 여행하는 저자의 여행기와도 같다.
화백은 세상의 기준으로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은 대상을 그려낸다. 스러져가는 것, 아주 사소한 것,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에 깊은 생명력을 부여한다. 저자는 그러한 그림의 의도를 마치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잡아내고, 더 깊게 들어가 의미를 생성해낸다. 원망 가득한 개의 눈빛 속에서 개만도 못한 세월호를 둘러싼 못난 인간의 자화상을 표현한다. 메주와 팥죽의 그림에서 소중한 것임에도 점차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우리 삶의 깊은 흔적을 되짚어본다. 또 생이 저물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깊은 생명의 근원과 ‘자기 비움’으로 새로운 생명을 이어준 숭고함을 들여다본다. 코로나 시대의 초상을 통해 우리 인간이 생태계에 저지른 만행을 성찰해간다. 망하는 것이 지구가 아니라 인간임에도 ‘도마뱀의 뇌’처럼 어리석어지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책임을 꾸짖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중하고, 고맙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화백의 시선만큼이나 그것을 읽어내는 요세파 수녀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겨버릴 수 없다. 저자의 그림 읽기는 세상의 수많은 것은 다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으며,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영성적 통찰로 이어진다. 길을 가다가 마주칠 수 있는 도롱뇽이나 개구리 한 마리는 더는 보잘것없는 미물이 아니다. 그 가냘픈 몸짓 하나하나가 말을 걸어오며 인간인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잔잔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쥐꼬리 하나를 보면서, 작디작다며 우습게 보는 존재가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잘났으며 그리 대단한지 살펴보라고 한다.
저자를 통해 화백의 그림은 세상을 더욱더 풍성하고 섬세하게 보는 창이 된다. 작가의 그림에 관한 작품론이나 감상평을 넘어 매우 독특한 묵상의 글로 승화한 이 책은 속도에 지치고 겉보기에 그럴싸한 것에 현혹해 참으로 많은 것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멈추고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안목을 전해준다. 또한 요세파 수녀가 잔잔하게 전해주는 여러 메시지는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초라하거나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해도 충분히 살아갈 이유가 있음을 일러주고, 또 굳세게 살아가게 할 힘을 전해준다.
이처럼 독특하며 많은 생각거리와 통찰을 전해주는 그림 에세이는 흔치 않다. 많은 정보와 데이터로 이뤄진 현대사회다. 하지만 더 깊게 들여다보는 힘은 약해졌다. 김호석 화백의 그림과 장요세파 수녀의 글은 양적으로 풍성해 보이지만 우리 삶에서 결락했던 많은 부분을 채워준다. 세상이 원하는 기준으로 무언가를 채워가면 한도 끝도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중하며, 고맙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메시지는 자신을 진중하게 긍정하게 하고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선물 같은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