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 시간 아이돌 음악은 진정한 예술이 아닌 것으로 여겨졌고, 그 가수와 팬에게는 ‘딴따라’와 ‘빠순이’라는 멸칭이 붙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돌 가수는 ‘아티스트’로 불리며, 팬덤은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존재로 주목받는다. ‘예술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뱅크시의 작품들은 그가 작품을 파괴하는 기행을 펼칠수록 오히려 값이 올라가고, 미국 팝아트의 거장 클래스 올덴버그의 거대 햄버거 조형물은 ‘작품’이 되었지만 고등학생들의 거대 케첩병 조형물은 해프닝에 그쳤다. 어떤 작품이 예술이 되고 안 되고는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 작품은 오로지 천재 예술가의 영감만으로 탄생할까? 이런 ‘예술 보는 눈’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은 ‘예술’과 ‘사회’를 함께 읽도록 제안한다. 그림, 음악, 영화, 애니메이션, 문학 등 어떤 영역의 예술도 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하나의 작품에는 당대의 정치, 경제, 문화, 제도가 거울처럼 반영되어 있고, 그렇게 나온 작품 또한 사회를 변화시킨다. 예술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날 각광받는 대부분의 예술작품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협업으로 탄생하며, 그렇게 나온 작품이 ‘진짜 예술’로 인정받는 과정에도 사회적 힘이 작용한다. 심지어 어떤 작품이 ‘내 취향’이라는 느낌이 들더라도, 그 취향 또한 알고 보면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많은 예술 관련 입문서들이 개별 작가와 작품, 장르나 기법, 역사 등에 초점을 둔다면, 이 책은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들을 드러냄으로써 색다른 방식으로 ‘예술 보는 눈’을 길러준다. 인상파의 부상부터 BTS 열풍까지 여러 장르와 작품, 다양한 한국 사례들을 통해 예술작품들은 익숙하지만 ‘예술사회학’은 생소한 독자들, 미술관에 가면 왠지 모르게 위축되는 독자들도 예술에 흥미롭게 접근하도록 만든다.
‘위대한 작품’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예술을 바라보는 사회학의 시선
‘걸작’의 조건은 무엇일까? 범접할 수 없는 영감, 천재적인 발상, 세련된 기법, 높은 완성도 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사회학의 눈으로 보면 이 조건들은 상당 부분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지금껏 ‘예술 바깥의 일’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데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흔한 예로 우리는 영화를 ‘레드카펫’ 위 사람들의 작품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 한 편이 완성되기까지는 감독과 배우 등 ‘핵심인력’뿐 아니라 섭외, 분장, 홍보 등을 맡는 ‘보조인력’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높은 명성은 생전에 그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명성 관리’가 큰 역할을 했다. 수많은 화가 아내의 이름들이 그랬듯, 오늘날 모리조의 이름도 기억하는 이가 드물지만 말이다.
예술을 소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로맨스 소설은 흔히 가부장적 가치관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 책에 소개된 연구에 따르면 로맨스 소설은 여성 독자들이 자기 시간을 갖도록 유도해 가부장제 질서에 균열을 내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지극히 개인적인 호불호라고 믿는 소비의 ‘취향’조차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책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계급에 따라 그림을 선호하는 취향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혀낸 부르디외의 연구를 비중 있게 소개하며 ‘인스타그램 속 미술관 사진’의 의미도 짚어본다. 이렇듯 예술과 사회를 결합해 읽는 예술사회학의 시도는 작품의 숨겨진 측면을 드러내며 색다른 작품 감상법을 제공한다.
익숙한 작품들의 낯선 뒷모습을 파헤치다!
장르나 기법을 몰라도 ‘예술 보는 눈’을 기르는 법
예술과 사회가 맺는 ‘관계’의 눈으로 보면 아는 작품도 다르게 보인다. 이 책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당대 사회에 관해 많은 정보를 주는데(반영이론), 예를 들어 한국 근대문학 속 많은 주인공들이 결핵으로 죽어간 배경에는 당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리고 작가들 자신도 피하지 못했던 결핵의 대규모 유행이 있었다.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화가들이 구약성서 속 인물 ‘유디트’를 성녀나 요부로만 묘사한 것 또한 미술계가 오랫동안 남성 화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왔음을 보여준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유명한 작품 〈마라의 죽음〉과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에서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작가의 실제 삶이 엿보인다.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 변화시키기도 하는데(형성이론), 원작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진 〈도가니〉가 여론을 움직여 ‘도가니법’(성폭력범죄의처벌특례법 개정안) 제정을 이끌어낸 사례가 대표적이다. 만화 〈아톰〉의 상상력이 일본에서 로봇 ‘아시모’의 개발에 큰 영향을 준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 또한 이러한 형성이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데,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경우 사회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대중문화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실제로 나치시대에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 등은 빼어난 영상미를 자랑하지만, 히틀러의 통치 전략으로 활용되면서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처럼 예술과 사회의 만남에 주목하는 것은 익숙한 작품들의 낯선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예술 자체에 대해서도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끈다. 이는 장르나 기법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입문자들도 어렵지 않게 예술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과거와 현재, 이론과 사례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예술사회학 가이드북
이 책이 기존의 예술사회학 책들과 구분되는 점들 중 하나는 다양한 사례 인용이다. 기존 책들은 대부분 번역서라서 독자들이 한국 사례로 학습할 기회가 부족했는데, 이 책은 한국 드라마와 가수, 영화 등 우리가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사례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실제로 〈기생충〉과 〈아가씨〉 등의 영화뿐 아니라 〈SNL 코리아〉 등 TV 프로그램,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부터 하상욱 시인의 〈애니팡〉까지 여러 분야를 넘나든다. 이는 지은이가 14년 넘게 동명으로 대규모 대학 교양수업을 진행하면서 쌓은 노하우와 피드백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예술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생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이론부터 베버, 베커, 벤야민, 부르디외 등 다양한 사회학자들의 이론들을 소개한다. 핵심만 추려 본문 곳곳에 박스로 구분했기 때문에, 이론 설명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면 읽지 않고 건너뛰어도 큰 지장이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 장마다 다양한 시각 자료가 배치되어 있으므로 작품 위주로 빠르게 살펴보는 읽기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는 인상파의 부상과 BTS 열풍 등의 주제를 예술, 사회, 생산, 분배, 소비의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입문 지식뿐 아니라 실전 적용 방법도 동시에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