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얻는 자만이
부와 권력을 손에 넣으리라!”
과거 유럽에서 웬만한 재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의 우편 서비스는 이용하기가 까다롭고 무척 비쌌다. 그럼에도 권력층이 이러한 비용과 노력을 감수하면서까지 빠르고 정확하게 소식을 주고받으려고 한 이유는 정치·외교와 상업 분야에서 정보가 승기를 잡는 핵심적인 열쇠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1490년에 창설한 ‘제국 우편 제도’를 근본으로, 유럽의 우편 네트워크와 시스템은 18세기까지 이 제도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확장되고 정교해진다. 뉴스 시장의 변천은 무엇보다 통신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으며, 통신 체계의 발달은 인쇄술과 제지술, 운송 수단의 발전 등 당대의 첨단 기술이 집약된 결정체였다. 순례 등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면 여행조차 쉽지 않던 시대에 1 대 1로 이루어지던 뉴스의 전달이, 절대다수에게 정기적으로 배포되는 신문의 형태로 확립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는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현대 신문에 비하면 디자인과 구성이 다소 엉성했다고 해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뉴스 인쇄물들은 종교 개혁, 신대륙의 발견, 레판토 해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등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서도 인쇄술은 뉴스 매체와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각종 뉴스 발행물은 이를 접하는 사람에게 부와 권력의 원천이 된 동시에 진지한 사업의 대상이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그토록 다양한 뉴스의 세계
뉴스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매체는 다름 아닌 ‘입소문’이다. 지금과 달리 중세 시대에는 문자로 쓰인 소식보다 전령이 입말로 전한 소식을 더 신뢰하는 문화가 퍼져 있었다. 또 특권층이나 상인 계급이 큰돈을 지불해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필사본 아비지와는 달리, 서민들이 무료로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경로는 장터와 선술집, 여관에서 이웃이나 여행자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였다.
그뿐 아니라 범죄자를 공개 처형하거나 각종 공적인 명령이나 새로운 법안을 공표했던 광장, 심지어 교회의 설교단까지도 뉴스가 전달되는 훌륭한 장(場)이 될 수 있었다. 기록되지 않았기에 지금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이러한 ‘구술’ 매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뉴스의 역사에서 큰 부분을 간과하는 셈이다.
한편 뉴스는 향유 계층과 필요에 따라 전혀 다른 경로로 유통되기도 했다. 중세 시대 이탈리아 외교관들이 주로 활용한 기밀 급보 서비스나 첩자 활동으로 얻어낸 정보가 대표적이며, 이러한 정보는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을 넘어 전쟁의 승패, 번영과 파멸의 차이를 가르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쩌면 지금보다도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소식을 교환한 14~18세기 유럽에서 항상 문젯거리였던 것은 정보의 진실성과 신뢰성이었다. 이 때문에 옛 유럽인들은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짜 뉴스를 가려내야 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SNS에서 ‘가짜 뉴스’에 신음하는 우리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유와 검열 사이의 줄다리기가 만들어낸
언론과 저널리즘
우리가 아는 언론과 저널리즘의 기능이 정부를 감독하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과거의 매체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익명으로 작성된 풍자적인 정치 팸플릿이나 길거리에서 노래로 불린 발라드 같은 매체가 있기는 했지만, 당시 문서로 작성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계층은 아주 소수의 특권층이었다. 따라서 매체는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들의 효율적인 통치와 권력을 뒷받침하는 도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관영(官營) 매체나 다를 바 없었던 이러한 매체를 위해 글을 쓰는 기자라는 직업은 천시되었고, 독립적인 편집권이나 저널리즘이 설 자리는 없었다. 과거 유럽 국가들의 정부에 언론은 통제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정치에 대한 언급이나 의견 개진은 언제나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졌으며, 민중이 정치로 눈을 돌리는 매우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각 매체는 왕이나 권력자에 대한 찬양이나 국내가 아닌 나라 밖의 외교 급보로 채워지곤 했다. 이러한 탓에 국내 뉴스를 주로 싣는 일간 신문의 등장은 더딜 수밖에 없었고, 언론이 광범위한 여론을 형성하기까지는 18세기 말까지 기다려야 했다.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정보의 유통을 통제하려는 세력과 그 가운데서도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고자 한 세력 간의 지난하고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언론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을 거치며 다수의 대중에게 향하는 전기(轉機)를 맞이한다.
뉴스에 대한 갈망은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었다
지금까지 뉴스가 보편적인 관심사로 이어져 온 기저에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본능적인 열망이 깔려 있다. 초창기 신문이 예상외로 대중 사이에서 지금처럼 보편적인 매체로 자리 잡는 데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도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뿐 아니라 흥밋거리로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사건을 몇 줄로 간단히 ‘보고’하는 형식의 글이 관심을 끌지 못한 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가령 과학적인 사고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18세기까지도 혜성의 출현 등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기이한 자연 현상을 다룬 뉴스가 많이 발행되었다. 지극히 종교적이었던 당대의 세계관과 맞물려 이는 신의 뜻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흔히 해석되었다. 심지어 지금은 믿기 힘든 고양이를 낳은 여인의 이야기나 하늘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동물이나 말을 탄 기수, 아니면 괴물을 목격했다는 사람의 증언이 진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예사였다.
뉴스의 역사에서 신문이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다면 대중이 언제 어디서든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잡다한 이야기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단돈 몇 푼으로 새로운 소식의 바다를 헤엄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