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포집(秋浦集) / 황신(黃愼) 저
판사항 木版本
발행사항 1684
형태사항 2권 2책: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19.3×13.9m,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행 20자 주쌍행(註雙行), 내향삼엽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 29.8×18.5m
인(印):종명(宗明). 장서각도서인(藏書閣圖書印)
묵인(墨印):식암거사대학지장(息庵居士大學之章)
본 문집은 2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1684년에 식암(息庵) 김석주(金錫胄, 1634〜1684)가 썼다. 조선 시대 인재의 보고였던 선조〜인조 대를 살다간 신흠(申欽)이 “충절과 정사의 재주는 추포보다 뛰어난 인물이 없다”고 한 말을 서두에 소개한 뒤 당시 상황 속에서 황신의 위상을 정립하였고, 뒤이어 “이월사(李月沙), 유어우(柳於于) 등 여러 사람과 주고받은 시는 작품 수준이 비슷해서 우열을 가릴 수 없으니, 선생이 여사(餘事)에서 얻은 바를 알 수 있다.”라고 하여, 문장 방면에서도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남아 있는 작품 수가 적지만 의롭고 굳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서해문(誓海文)〉이 상존해서 굳이 한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갈무리했다.
권1에는 시(詩), 소차(疏箚), 계사(啓辭)가 실려 있다. 시(詩)는 27수의 적은 편수가 시체별(詩體別)로 배열되어 있는데, 절반 이상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지은 작품이다. 〈자라산 풀숲에서 읊다[紫蘿山草間有吟]〉와 〈객사에서 회포를 적다[旅舍書懷]〉는 난리 초기에 느낀 통분을 표출하면서 자신을 초나라 충신 굴원(屈原)에 견주었고, 통신사가 되어 일본을 향하면서 지은 〈부산 왜영에서 배를 띄울 때 지은 시[在釜營將泛海有作]〉는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을 칭송하는 가운데 목숨을 바칠 각오를 의연하게 드러냈으니, 서문에서 언급한 ‘충절’이 한 글자 한 글자에 스며 있다. 1593년에 송응창(宋應昌) 아문(衙門)에서 만난 이정귀(李廷龜)ㆍ유몽인(柳夢寅)과 서로 돌아가면서 지은 연구시인 〈안흥 즉사(安興卽事)〉는 이들 세 사람의 문학적 수준을 가늠하기 좋은 시작(詩作)이며, 〈일본에 사신 갔을 때 지은 시[使日本時作]〉와 〈옥련환체로 지은 시[玉連環詩]〉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느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문면에 또렷하다.
소차(疏箚) 9편은 1596년부터 1611년까지 올린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연도순으로 배열하지 않았다. 계(啓) 22편은 소차와는 달리 비교적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권2의 계사는 또 그렇지 않아 명확한 편차 원칙이 드러나지 않는다. 〈통정대부를 사직하는 상소[辭通政疏]〉는 일본 왜영에 머문 공로를 인정하여 선조(宣祖)가 가자(加資)하여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을 제수하자 특별한 공을 이루지 못한 데다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빈 장수들과 대등하게 받을 수 없다며 고사한 상소이다. 1601년(선조34) 12월에 문경호(文景虎)가 상소하여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해 죽였다고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대사헌으로 있던 저자가 성혼의 무고를 조목조목 반박한 것이 〈대사헌을 인피하는 계사[都憲引避啓]〉이다. 이 사건은 저자를 조정에서 오랫동안 떠나게 하는 처분이 되었고 동시에 세상과 구차히 영합하지 않는 저자의 명분이 되었는데, 이러한 소신이 그 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과 1610년에 올린 〈호조 참판을 사직하는 상소[辭戶曹參判疏]〉와 〈억울하게 죄에 걸린 돌아가신 스승을 변론하는 상소[卞論亡師誣枉疏]〉에 차례대로 담겼다. 〈사간원에서 의견을 아뢰는 차자(諫院進言箚)〉에서는 1601년 간관으로 재직할 당시, 국가 부흥을 위해 국정에 반영해야 할 ‘다섯 가지 큰 요체’와 ‘일곱 가지 급히 처리할 일’을 자세하게 진술하였고, 〈대마도 정벌을 요청하는 상소[請討對馬島疏]〉에서는 과거 일본으로 사신 가면서 자세히 탐문한 대마도를 현재 남해(南海)에 주둔해 있는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토벌해야 하는 당위성을 피력하였으며, 〈전라 감사 재임 시 모친 봉양을 청하는 상소[爲全羅監司時乞養大夫人疏]〉와 〈전라 감사의 면직을 청하는 상소[乞免全羅監司疏]〉에서는 정유재란 때 전라 감사에 제수되자 최전선으로 자식을 보내지 않으려는 모친의 절규를 뒤로하고 말도 없이 집을 나섰던 일과 병든 모친을 봉양하기 위한 자식의 간절한 바람이 실려 있다.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자 당시 선조로부터 총애 받는 재상이었던 이산해(李山海)의 잘못을 논박한 글은 〈사간원에서 정관을 논한 계사[諫院論政官啓]〉와 〈정언을 인피하는 계사[正言引避疏]〉이며, 관리의 비위 및 작상(爵賞)의 남발에 대한 왕명의 환수를 요청한 글은 〈황해 감사를 파직하고 옥당에 상으로 자급을 올려준 것을 환수하도록 청하는 사간원 계사[諫院請罷黃海監司還收玉堂賞加啓]〉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궁핍한 국가 재정을 보고 비용 절감을 고심하였는데 대사헌으로 재직할 때의 소회는 〈중국 사신의 음식 접대와 진상할 방물에 대해 다시 참작하여 정하기를 청하는 계사[請詔使支待進獻方物更爲酌定啓]〉ㆍ〈또 같은 달[又 同月]〉ㆍ〈음식 접대와 잡물을 참작하여 정하고 김태허 등을 논죄하도록 청하는 계사[請酌定支待雜物論罪金太虛等啓]〉에 담았고, 호조 판서로 재직할 때의 소회는 〈진휼 종사관을 차출하기를 청하는 계사[請出賑恤從事官啓]〉ㆍ〈진휼사가 되었을 때 올린 계사[賑恤使時啓]〉ㆍ〈각 해당 관사에서 축이 나게 한 관원의 죄를 청하는 계사[請罪各該司無面官員啓]〉ㆍ〈호조 판서의 처벌을 기다리며 올리는 계사 7월[戶判待罪疏 七月]〉ㆍ〈호조 판서의 처벌을 기다리며 올리는 계사 12월 16일[戶判待罪啓 十二月十六日]〉에 담았다. 권2에 수록된 계(啓) 7편 가운데 〈통신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올린 서계[通信回還後書啟]〉를 제외하면 모두 호조 판서로 재직할 때 올린 글로, 특히 〈조도사 변통을 청하는 계사[請變通調度司啓]〉와 〈호조에서 의견을 올리는 계사[地部獻言啓]〉, 〈6조 별단(六條別單)〉, 〈균전사를 속히 파견하도록 청하는 계사[請速遣均田使啓]〉는 정무적 판단과 실무적 감각을 들여다보기 좋은 작품이다.
의(議)는 1편으로, 〈왜적과의 강화에 대한 의견[倭奴講和議]〉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1601년(선조34)에 강화를 요구하는 왜서(倭書)가 조정에 이르자 대마도를 회유하는 차원에서 신중한 입장을 진달하였다.
서독(書牘)은 13편이다. 〈목사 우복룡에게 답하는 편지[答禹牧使伏龍書]〉는 저자가 1596년 8월에 일본으로 사신 가게 되었을 때 노잣돈을 후하게 준 우복룡에게 전한 감사의 편지이고, 〈송인수 영구 에게 답하는 편지[答宋仁叟 英耈 書]〉는 십년 동안 만나지 못한 벗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 이종사촌 동생 안욱(安旭, 1564〜?)에게 보낸 편지는 5통이나 된다. 세상길에서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과 부여에서 같이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 골자다. 〈우계 선생에게 올리는 편지[上牛溪先生書]〉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에 안부를 물은 것이어서 절박함이 물씬한 가운데 문신(文臣)으로서 국난에 달려가려는 충심과 우국의 정을 느낄 수 있고, 〈자식과 손자들에게 주는 편지[付兒及諸孫書] 만력 41년 계축년(1613, 광해군5) 12월 12일〉는 1613년 일어난 계축옥사로 저자가 찬축되자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사후 처리를 자손들에게 지시한 유서라 할 수 있다.
교서(敎書) 2편 중 〈왕세자가 성천에서 친히 임하여 군사들에게 음식을 내리고 위유하는 글[王世子在成川親臨犒軍慰諭書]〉은 1592년 8월 성천에 머물던 왕세자가 군대를 위로하며 일전을 다지는 내용이고,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온 뒤 내린 교서[大駕還都後敎書]〉는 1593년 10월에 몽진했다 환도한 선조(宣祖)가 전란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민심을 수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재건의 의지를 피력하였다.
격문(檄文) 1편, 상량문(上樑文) 1편, 제문(祭文) 5편, 등대설화(登對說話) 4편, 과제사륙(科製四六) 10편이 문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등대설화와 몇 편을 제외하면 변려문에 능했던 작자의 문학적 성과를 엿볼 수 있는 작품군이다. 〈호소사 황정욱을 대신해서 삼도에 내린 제문[代號召使黃廷彧檄三道文]〉은 임진왜란 초기 민관군의 궐기를 촉구하였고, 〈추풍정 상량문[秋風亭上樑文]〉은 자신의 고향인 강화도에 노년을 한가로이 살고픈 진심이 묻어난다. 특히 〈서해문(誓海文)〉은 황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치고 이 글을 언급하지 않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회자되었는데 저자의 의열정신(義烈精神)이 드러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등대설화는 1596년, 1601년, 1610년에 4차례 임금과 면대했을 때 주고받은 문답을 기록한 것이다. 이 중 1596년 12월 21일에 있었던 〈병신년, 어전에서 오간 이야기[丙申奏對]〉는 저자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관백(關伯)에게 국서(國書)를 전하지 못한 저간의 사정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적정(賊情) 등을 기술하였다. 과제(科製) 10편은 對偶를 맞추는 기교뿐 아니라 해박한 전고를 인용하고 있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