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을 위한 컨설턴트
저자는 우리에게 있어 성공을 보는 척도는 너무나 다양하다고 말합니다.
“가치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성공의 척도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즉, 삶의 가치관과 종교적 신앙, 그리고 사회적 인식과 철학적 사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게 성공한 것 같아 보여도 속의 양심은 썩어 냄새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보기에는 실패자 같아 보여도 내심 양심에는 주옥같이 빛난 진주를 간직한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부ㆍ귀ㆍ공ㆍ명ㆍ장수”를 일구어 내는 성공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즉, “성공의 원리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저자는 한 사람의 성공자를 만들어 내는 데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소의 작용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하늘의 축복도 있어야 하고, 부모의 복도 있어야 하고, 시적 즉 때도 잘 만나야 되고, 지혜와 지식도 있어야 하고, 노력도 해야 하고, 환경의 요인도 있어야 하고, 사람도 잘 만나야 하고, 성공의 방법도 터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뜻을 잘 아는 자가 성공하고, 인간의 뜻을 잘 아는 자가 성공하며, 자연의 뜻을 잘 아는 자가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뜻과 원리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뜻과 원리란 ‘법칙’입니다.
즉, 성공을 위한 하나님의 법칙이 있고, 인간의 법칙이 있으며, 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21C를 접어들면서 교회 성장학자들은 말하기를 “교회가 무너져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뿌리 교회인 구라파 교회가 무너졌고, 그렇게 아름답고 웅장하던 교회당은 고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구라파 교회의 가지 교회라 할 수 있는 미국의 교회도 무너지고 있으며, 수많은 교회당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뿌리 교회인 구라파 교회가 무너지고, 가지 교회인 미국의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잎새 교회인 한국 교회도 시들어져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가 한결같이 부흥의 불길이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성장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서 교회성장 세미나가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성장 저해요인을 진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성장 저해요인을 분석해 보면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산업화’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산업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일성수를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쁜 사회에서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휴식은 가정이나 동네에서가 아니라 산과 물로 가야 휴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공해와 가스가 너무 많이 핏속에 있기에 ‘산소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산소 따라 물과 숲 속으로 가서 쉬어야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이 되면 모두 도심을 떠나버립니다.
그런데 모든 교회가 도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휴일과 주일이 겹쳐있어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산업化’를 깨뜨리자고 제의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산업화의 반대는 ‘원시化’입니다.
온 세계 인류가 산업을 발전시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원시화를 부르짖는다면 교회는 설 곳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산업화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처하지 못한 것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에 대처방안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도 구원하고 무너져 가는 공동교회도 다시 수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방안이 무엇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마다 “심령(개인)교회”을 튼튼히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둘째는 교회성장 학자들이 발표한 저해 요인은 ‘경제화’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학자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심이 강열해 지는 때는 “어려울 때”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질의 풍요는 영혼의 궁핍을 낳습니다.
이에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자기를 찔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모든 국가는 ‘경제화’에 최대 노력을 경주합니다.
온 인류가 ‘경제化’에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정신(영혼)문명을 초토화시키고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도 돈의 위력 앞에 꼼짝 못하는 지경입니다.
교회도 돈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고 한탄합니다.
돈의 촉매제는 인간의 세속화입니다.
세속화는 종교의 무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너져 가고 있다”고 진단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경제화를 무너뜨리자고 제의할 수 없습니다.
‘경제화’의 반대는 ‘가난화’입니다.
가난은 하나님의 3대 저주에 속합니다.
즉, 죽음이 저주와 질병이 저주, 그리고 가난이 저주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 3가지 저주와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장수의 비법을 연구하고 있으며, 질병의 퇴치를 연구하고 있으며, 가난의 추방을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3가지를 다 정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가난의 종교가 아니라 축복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가난의 저주를 추구한다면 사람들은 당장 “교회는 지구를 떠나라”고 할 것입니다.
교회 무용론이 당장 대두될 것입니다.
경제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등을 돌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는 이같은 ‘경제화’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경제화’에 대한 교회의 대처방안은 무엇일까요?
많은 방법이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교회마다 ‘심령교회’를 수축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셋째로 교회성장 학자들이 발표한 교회성장의 저해 요인으로 ‘과학化’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21C는 과학 만능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것도 과학적 증거가 있어야 믿습니다.
하나님도, 신앙도, 과학적 규명이 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과학 만능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자연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자연주의란 창조주의의 반대쪽입니다.
모든 우주의 존재가 저절로(자연)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 신앙은 미신처럼 취급을 받게 됩니다.
과학이 증명하지 못한 것은 모두 미신적인 것으로 몰아 부칩니다.
그래서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종교를 우습게 여깁니다.
그 결과 교회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교회성장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과학을 배척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우주 창조는 너무나 정밀한 과학적 창조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도 하나님의 창조원리의 발견일 뿐입니다.
다윈의 진화론도 하나님의 생성의 법칙의 일부일 뿐입니다.
갈릴레오의 지동설, 천동설도 하나님의 창조법칙의 일부분일 뿐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벌써 3000년 전에 성경 욥기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구와 달이 1만m만 더 가까이 있어도 매일 한번씩 조수에 의해 수장되었다가 나와야 합니다.
자구와 태양의 거리가 1만 마일만 더 가까이 있다거나, 멀리 있다면 불에 타고 있을 것이며, 얼음에 덮여있을 것입니다.
지구의 지름이 10m만 더 두텁다면 지구는 산소부족으로 모든 생물이 존재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종교가 과학을 배제하면 반드시 샤마니즘화 됩니다.
샤마니즘화된 종교는 백성을 우매하게 만듭니다.
우상(헛것)을 만들어 놓고 절하게 하고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 창조는 과학입니다.
만일 기독교의 창조론에서 과학을 제거하면 기독교는 무너집니다.
기독교는 진실로 과학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샤머니즘화 되면 인류에겐 다시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학자들과 신학자들 간에 격차지간이 너무 큽니다.
이것도 서로의 이해부족이나 오만함 때문일 것입니다.
과학자는 보이는 하나님의 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입니다.
신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입니다.
따라서 서로 정죄하거나 비난하면 무지함과 오만한 행위일 뿐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인간이 우주를 잰다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꼬막껍질로 태평양 물을 되어보려는 것과 같다”고 한 말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는 이같은 ‘과학화’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과학화’에 대한 교회의 대처방안은 무엇일까요?
많은 방법이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21C 기독교는 ‘과학 신학’이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신학의 갱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교회성장 학자들이 발표한 교회성장의 저해 요인으로 ‘퇴페 문화’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천지가 하나님의 문화에서 발생되었다면 문화는 인간의 삶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21C 문화는 퇴폐 문화를 급속히 조장해가고 있습니다.
21C 퇴폐 문화의 근본 뿌리는 ‘행복주의’(Happy Cultur)에서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에게 행복의 제일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인간 행복의 제일 요소는 ‘자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유가 없는 행복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추구는 곧 자유의 추구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행복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가 ‘개인주의’를 극대화 시켰습니다.
이 행복이 ‘이기주의’를 극대화 시켰습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서 ‘퇴폐 문화’가 싹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21세기 많은 젊은이들은 이것을 ‘퇴폐 문화’라고 말하지 않고, ‘행복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성장학자들은 말하기를 “오늘 우리 교회는 이 행복주의가 만들어 낸 퇴폐문화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1C 모든 인류의 삶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왜 돈을 법니까?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결혼합니까?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이혼합니까?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노력합니까?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몸을 비틀고, 난리를 합니까? 행복해 보려고 그럽니다.
인간의 몸부림 자체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인간의 행복을 배제해서야 되겠습니까?
행복의 정반대는 ‘불행’입니다.
행복주의의 정반대는 ‘고행주의’입니다.
기독교는 수도승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가 은혜를 모두 고행으로 바꾼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경은 낙원에의 복귀, 곧 행복에의 초대입니다.
영생도 천국도 모두 인간의 행복의 극치입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나, 天上에서나 이 행복주의자들을 교회에서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 우리 교회는 이같은 ‘퇴폐문화=행복주의’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퇴폐문화=행복주의’에 대한 교회의 대처방안은 무엇일까요?
많은 방법이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21C 기독교회는 ‘사상의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교회 성장학자들이 진단한 교회성장의 저해요인은 크게 4가지입니다.
첫째는 “산업화”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둘째는 “경제화”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셋째로 “과학化”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넷째로 “퇴페 문화”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산업化’를 깨뜨리자고 제의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교회가 ‘경제화’를 무너뜨리자고 제의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교회가 과학을 배제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교회가 인간의 행복을 배제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산업화 때문에, 경제화 때문에, 과학화 때문에, 퇴폐문화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처하지 못한 것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에 대처방안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도 구원하고 무너져 가는 공동교회도 다시 수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방안이 무엇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마다 ‘심령(개인)교회’을 튼튼히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부분은 자유롭게 자기 주장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많은 방법이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교회마다 ‘심령교회’를 수축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21C 기독교는 ‘과학 신학’, 즉, ‘신학의 갱신’과 ‘사상의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 보존’을 위해 변화되어야 합니다.
21C는 더욱이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21C는 사람들의 요구가 다양해지는 시대입니다.
21C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혁명이 요구되어지는 시대입니다.
21C는 정보혁명, 교육혁명, 서비스혁명, 질적 혁명의 시대가 오고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변화’입니다.
이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나, 기업이나, 국가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처방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21세기에 들어서서 세계 석학들의 3대 처방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처방은『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의 변화 속도는 30년(한세대)이었습니다.
따라서 10년 동안 기반 조성하고, 10년 동안 기반 구축한 뒤, 10년 만에 정상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20세기 말에는 변화의 속도가 10년으로 단축되었습니다.
즉, 3년 동안 기반 조성하고, 3년 동안 기반 구축한 뒤, 3년 동안 성공을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1C는 변화의 속도가 3년으로 더 단축되었습니다.
즉, 1년 동안 기반 조성하고, 1년 동안 기반 구축한 뒤, 1년 동안에 성공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빨라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무엇이든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공하려면, 오늘 우리 교회가 성장하려면 이 변화에 대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변화의 대처능력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변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변하고, 나의 의식이 변하고, 나의 습관이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처방은『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의 요구는 곧 사람들의 요구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의 요구가 곧 시대의 변화를 조장합니다.
이 요구가 발전을 이루어 가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모든 것들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요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민소득이 80불 일 때에는 여자들이 ‘빨래판’을 요구했습니다.
국민소득이 1000불 일 때에는 ‘빨순이 세탁기’를 요구했습니다.
국민소득이 3000불 시대는 ‘짤순이 세탁기’를 요구했습니다.
국민소득이 6000불 시대는 세탁물을 말리는 ‘말순이 세탁기’를 요구했습니다.
국민소득이 9000불 시대는 세탁물을 대려 주는 ‘대순이 세탁기’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경제성장에 따라 ‘사람의 요구’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람의 요구에 따라 경제가 성장”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공적인 사람들은 누구나『사람들의 요구에 민감』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요구가 무엇인가?”에 눈을 떠야 합니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듯이 사람의 요구에 부웅하는 자가 반드시 성공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론조사도 사람들의 요구에 대한 분석입니다.
정치도 사람들의 요구분석에 대한 만족도를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람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면 자성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에 본질에는 3대 요구가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인 요구(신앙)입니다.
둘째는 육체적 요구(건강)입니다.
셋째는 정신적 요구(학문)입니다.
사람들은 영적 욕구를 위해 ‘종교’를 신앙하게 됩니다.
육적 욕구를 위해 ‘의학과 건강’에 정진하게 됩니다.
정신적 욕구를 위해 ‘학교와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가 해야 할 3대 과제가 있다면 교회당, 병원, 학교로써 목회의 3대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외의 직업은 삶의 과정과 진행일 뿐입니다.
이것들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해야 하는 직무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대안은 무엇입니까?
바로『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처방은『New Project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편적으로 성공했던 지금까지의 방법은, 막고ㆍ품는(고기잡는 방법)시대였습니다.
20세기까지는『IDEA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1C는『Project시대』입니다.
IDEA는 Project와 그 원리를 달리합니다.
IDEA는『생각』을 담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Project는 ‘Set up’된 실제를 완벽하게 연구실험해서 임상된 ‘실체’를 담아주는 것입니다.
IDEA가 혼자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면, Project는 이 IDEA를 ‘12방향’에서 연구하고, 분석하여 그 타당성을 검토하여 ‘Processing’하도록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IDEA에서 Project로 넘어가게 된 이유는 실패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21C에는 막연한 IDEA시대는 去하고, Project 시대가 來하게 될 것입니다.
Project는 언제나 성공을 동반하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미국의 1970년대 100대 기업 중에 2000년도에 와서 100대 기업 군 속에 남은 기업이 10개 미만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한국의 1970년대 100대 기업 중에 2000년대 와서 100대 기업군 속에 남은 기업이 3개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세계의 1970년대 100대 교회 가운데 2000년대에 와서 100대 교회 안에 남아있는 교회가 7개 교회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상은 미국 하바드의 대 학자들이 연구 발표한 내용입니다.
이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기업의 수명을 3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과목(果木)도 30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자연 원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계승을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New Project』가 있어야 합니다.
타이프라이터는 가고 - Computer가 뉴-프로젝트로 등장했습니다.
아나로그 시대는 가고 - Digital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개인 IDEA 시대는 가고 - 집단 연구 분석 실험의 project 시대가 왔습니다.
다이얼 시대는 가고 - Tech phone 시대에서 화상 전화 시대가 왔습니다.
구 시대의 사고는 가고 - 새로운 시대의 Moral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구 시대의 목회에서 - 새로운 시대의 목회 Project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21C 새로운 시대의 목회 방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New Project』입니다.
프로젝트를 연구 분석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의 IDEA나 문제가 제기되면 이 문제를 12 방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을 12房이라고 합니다.
12방은 완벽을 추구하는 공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