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지만 거의 이해되지 않는”,
소쉬르 강의의 온전한 이해를 돕는 책
구조주의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유럽 사상사의 한 축을 형성한 인물로 평가받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그러나 그는 생전에 단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않았다. 『일반언어학 강의』는 소쉬르가 만년에 제네바대학에서 3차에 걸쳐 강의한 노트들을 그의 제자인 샤를 바이(Charles Bally)와 알베르 세슈에(Albert Sechehaye)가 1916년에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여 출간한 것이다. 그들은 각 강의의 세부 사항 하나하나에 대해 모든 노트의 이본을 비교하고, 때로는 일관성 없이 막연하게 남아 있는 소쉬르의 궁극적 사상을 포착하여 종합을 시도하였다.
『일반언어학 강의』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 언어학의 주춧돌로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비단 현대 언어학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이해하는 데에도 역시 유효하며 필수적이다. 그린비에서 출간하는 『일반언어학 강의』는 역자 김현권 교수가 2012년에 번역한 판본에 상세한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언어학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들의 이해 또한 돕고자 했다.
소쉬르를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이유,
20세기 인문과학의 시작이자 여전히 열려 있는 텍스트
소쉬르는 언어의 가치를 언어에 내재한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산물로 보았다. 즉 언어의 가치는 어떤 체계 속에서 맺는 관계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체계’라는 용어는 후에 ‘구조’로 불리게 된다.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혁신적인 언어 이론과 인식론, 철학적 성찰을 통해 구조주의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소쉬르의 구조주의는 인문학의 제반 영역, 즉 언어학을 비롯하여, 인류학, 문학, 철학, 정신분석학, 해석학, 기호학, 사회학과 같은 학문들이 경이적으로 발전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이 영향력은 후기구조주의에서 그 절정에 도달하였는데,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롤랑 바르트 등 소쉬르 이후로 등장한 수많은 사상가들이 정신분석학, 사회학, 사회·역사 비평, 해체주의, 문학·문화 비평에 소쉬르의 언어학을 접목하며 구조주의를 재평가 및 비판하였고 이 과정에서 여러 사유가 꽃필 수 있었다. 이는 소쉬르의 언어학이 학문의 한 분야를 뛰어넘어 여러 분야에서 담론의 대상이 될 만큼 커다란 의의를 지녔으며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열린 텍스트임을 보여 준다. 결국 현대의 여러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쉬르의 언어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문학 전반에 미친 소쉬르 언어학의 영향은 기호,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자의성과 유연성, 랑그와 파롤, 담화, 언어와 문자, 음성과 음소 체계, 단위와 실재체, 가치와 의미, 의미 작용, 형식(형태)과 추상, 관계와 대립, 동일성과 차이, 분석과 통합/통합체, 연합과 통합, 연속과 공존, 시간과 공간, 역사와 상태, 계기성과 동시성, 불변성과 가변성, 통시태/공시태, 집단과 개인, 행위와 의식, 고립과 연대의 구별을 명시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드러난다. 구조주의적 정신이 1960년대를 거의 완전히 지배했기 때문에 『일반언어학 강의』는 개별 학문 분야에서 그 주요 사상과 개념들이 명백히 이해되거나 명료하게 구별되지 않은 상태로 수용되었다. 소쉬르의 영향을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에 대해 독립적이면서 별도의 비판적인 역사가 필요하다. 많은 소개와 연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구의 커다란 문이 열려 있다. _「책을 읽기 전에」 중에서
“읽히지 않는 소쉬르”를 읽기 위한 훌륭한 해설서
이처럼 『일반언어학 강의』는 우리 시대의 빼놓을 수 없는 고전이지만, 그 텍스트를 충실히 소화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소쉬르의 언어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유럽의 제 언어에 대한 언어사와 공시적 언어 구조, 광범위한 고대 언어와 근대 언어들의 역사, 방언, 문법 그리고 일반언어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 등이 사전에 요구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책은 소쉬르의 3차에 걸친 강의를 크게 축약한 것이기 때문에 아주 간결한 동시에 세세히 이해하기 다소 어렵다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에 역자인 김현권 교수는 『일반언어학 강의』에 대해 언어학사적 지식과 언어학적 지식, 언어적 지식을 아우르는 비판본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2022년 재출간하는 이 책에서는 기존 텍스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본문의 텍스트에 언어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더라도 의미를 추가 삽입하여 부연 설명했다. 따라서 이 책은 소쉬르의 언어학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목적인 독자, 또는 소쉬르의 선구적인 성찰을 경유하여 현재의 담론과 만나려는 독자 모두에게 믿을 만한 지침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