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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책

질문의 책

  • 에드몽 자베스
  • |
  • 한길사
  • |
  • 2022-12-05 출간
  • |
  • 2147483647페이지
  • |
  • 2022년12월05일
  • |
  • ISBN 9788935666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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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 ‘질문’의 ‘책’
자베스를 자신의 문학적 모범으로 삼은 폴 오스터는 「질문의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이는 소설도 시도 아니요, 에세이나 희곡도 아니다. 「질문의 책」은 이 모든 양식들의 조합이며, 단편과 아포리즘, 대화와 노래와 주석이 어우러진 하나의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책’의 중심 질문을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바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유켈과 사라라는 두 인물과 가상의 랍비들이 등장하는 이 책은 괄호와 이탤릭체로 분열된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진 독특한 글쓰기 형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형식상의 독창성은 ‘책’ 이전에 존재하는 ‘책’을 드러내고, ‘책’ 이후에 아직 씌어지지 않은 다음 ‘책’을 예비한다. ‘질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대답이 아니고 또 다른 ‘질문’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이름은 ‘질문’의 ‘책’이다. “살아남을 가능성을 가진 책이란 그 자체를 파괴시켜버리는 책”이고, “그것을 연장하는 또 다른 책을 위하여 자신을 파괴해버리는 책”이라고 말하는 에드몽 자베스의 ‘책 해체’는 「질문의 책」에서 빛을 발한다.

두 번째 제자가 말했다. “이 모든 질문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질문이란 것은 언제나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은 답에서 태어납니다. 우릴 다만 또 다른 질문들로 이끄는, 이 모든 질문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렙 망델은 이렇게 답했다. “새로운 질문에 대한 약속을 얻을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제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의 질문에 대해 어떠한 답변도 불가능할 때가 와서든, 더는 우리가 어떠한 질문도 던지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와서든, 분명, 언젠가는 우리가 질문을 멈춰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질문을 시작하는 것에 어떤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렙 망델은 이렇게 답했다. “그대는 모르겠는가, 모든 추론의 끝에는 언제나 하나의 결정적인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200-201쪽)

왜 ‘대답’이 아니라 ‘질문’인가. 자베스는 ‘책’을 통해 혐오가 만연한 우리 시대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 만인을 지칭하는 단어, 유대인
에드몽 자베스는 독일 제3제국의 패망과 제2차 중동전쟁이라는 두 사건을 통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다. 나치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은 자베스를 심한 충격에 빠뜨렸다. 아우슈비츠로 대변되는 유대인 절멸 수용소는 자베스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는, 다시는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절대적인 폭력, 곧 정체성의 차이를 유일의 구실로 벌어진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극한 폭력을 의미한다. 아우슈비츠는 ‘질문의 책’이라는 제목의 이 책이 도달하려고 하는 최종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윤리적인 질문이고, 그 제기 방식은, 자기 자신의 동일하다고 간주된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자문에 있다. 그러한 자문을 통해 우린 자기 안에 깃든 타자성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하며, 그리하여 결코 집단적 동일성에 의해 타자를 박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정화열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해제에서 “폭력은 차이를 지우려 할 때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라고 말한다. 자베스가 「질문의 책」에서 천착하는 ‘질문’은 차이를 지우려는 절대 권력의 폭력에 맞선 불복이자 저항이다.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자베스에게 유대인은 종교적이거나 혈통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베스가 말하는 유대인은 유대 민족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국가 이스라엘이 아니며, 예루살렘은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다. 자베스의 유대인은 좁게는 ‘작가’ 넓게는 만인을 지칭하며,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책’을, 곧 모든 박해와 추궁을 피해 피신할 수 있는 (그리고 끊임없이 돌아가야 하는) ‘장소 아닌 장소’를 지칭한다. 자베스는 유대교적 전통에 기댄 사유를 전개하면서도, 그 폐쇄성과는 결별하고 있는 것이다. 자베스는 특정한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유대인’이 아닌, 만인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유대인의 보편화를 꿈꾼다. 그는 모든 이를 유대인으로, 혹은 그와 구분되지 않는 존재인 ‘작가’로 인도하는 데 적극적이다.

아, 유대인이 아닌 그대여-나는 거의 유대인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유대인이다-나는 그대를 나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작가가 아닌 그대여-나는 거의 작가가 아니었다. 지금 나는 작가다-나는 그대에게 내 책들을 선사한다. 그대, 유대인이며, 어쩌면 작가이기도 한 사람이여.(127-128쪽)

끊임없이 윤리적인 성찰을 이어나가지만 거처가 없고, 돌아갈 땅이 없으며, 국가가 없는, 핍박받는 민족인 유대인, 어느 곳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유대인, 방랑자이자 이방인인 유대인은 모든 인간 실존의 근원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한 사람의 학자: 처음에 나치는, 쓸모없는 유대인들만을 화장터의 가마로 보냈다. 나중에는, 이 ‘쓸모없음’이란 개념조차 파기되었다. 모든 유대인들이 몰살되어야만 했다.
어쩌면 언젠가는, 단어들이 영영 단어들을 잃게 될 날이 오리라. 시가 죽는 날이 오게 되리라.
그것은 로봇의 시대, 그리고 옥에 갇힌 말의 시대이리라.
유대인들의 불행은 보편적인 것이 되리라.(349쪽)

렙 사피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죽은 사람들이다, 그것을 그대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죽는다는 것은, 마침내 제 이방인으로서의 존재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보다도 더 이방인인 것이 누구겠는가?
아, 모든 망자는 유대인이다. 타인들에 대하여 유대인이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유대인이다.
죽음의 순간에, 사람들은 다만 스스로 유대인임을 깨닫게 될 뿐이다.
(중략)
그리고 렙 아렙은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의 연대라는 것은 이방인이 또 다른 이방인에게 느끼는 불가능한 정념이다.”(310쪽)

마지막 인용문에서 유대인은 죽음의 이미지와 결부되는데, 자베스에게 죽음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죽음은 ‘침묵’ ‘그림자’ ‘어둠’ ‘간격’ ‘부재’ 등과 마찬가지로 모종의 ‘비어 있음’을 나타내고, 이는 서로가 서로를 해하거나 동화시키지 못하게 하는,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한다. 자베스에게는 이 차이가 곧 ‘별’을 빛나게 해주는 근원이요, ‘유대인’을 생존케 하는 ‘장소 아닌 장소’이므로,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마련인 ‘죽음’은 긍정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광대한 침묵이 인간을 그의 동포들로부터 갈라놓는다. 우린 나지막이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절규하고 있다.
이따금 나는 불시에 모든 간격이 사라지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자문해본다. 그럼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린 청각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푸른 하늘과 그림자가 사라지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럼 서로서로에게 용접된 별들이 하늘의 불타는 천정을 이루게 되리라. 태양은 홀로 날을 이루게 될 것이고, 우린 불길 속에서 스러지리라.”
ㆍ 렙 베앙(548쪽)

렙 자셰르는 이렇게 썼다.

“별들이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 속으로 도피하듯, 우린 거절 속으로 피난을 간다. 그렇게, 우린 우리의 반짝임 속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중략)
그들 안의 죽음이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550-551쪽)

‘우리’라는 집단 속에서 낱낱의 존재인 개별자를 살게 하는 것은 침묵과 어둠, 간격이다. 침묵, 간격, 그리고 죽음이 유대인을 동화 및 제거로부터 보호한다. 끝없는 질문의 요람으로서의 침묵, 배제와 동화 모두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간격, 그리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글쓰기, 유대인을, 작가를 살리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글쓰기
앞에서 자베스는 유대교적 전통에 기댄 사유를 전개하면서도, 그 폐쇄성과는 결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자베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자크 데리다는 작가로서의 자베스가 유대교적 전통과 갈라서는 지점이 “거룩한 텍스트”의 해석에 관한 작가와 랍비의 태도 차이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렙 리마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는 본래, 율법의 석판들 위에 열 차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유를 얻을 자격이 너무도 부족했기에, 예언자께서는 분노 속에서 그것들을 깨트렸다.(198쪽)

끊임없는 질문과 해석의 대상이 되는 “거룩한 텍스트”는 랍비들에게 있어서는 ‘토라’요, 자베스에게 있어서는 ‘울부짖음’이다. 그리고 끝없는 ‘해석’이 필요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모습을 목격한 예언자 모세가 주님의 손으로 직접 쓴 십계명 판을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주님’께 받은 십계명 석판을 부숴버린 모세는 다시 시나이산으로 올라가, 이번에는 신의 목소리에 따라, 인간인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십계명 석판을 파낸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명백하다. 신이 직접 쓴 글이라면 그 글은 무결하고 완전하여, 그 자체로 어떠한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또는 최초의 작가) 모세가 쓴 글이라면, 그 글은 끝없는 해석의 여지를 안고 있는 불완전한 글, 좋게 말해 ‘풍부한’ 글이 될 것이다.
글쓰기가 가진 원초적인 결핍 탓에, “텍스트의 모험”이 시작된다. 랍비와 작가가 가진 결정적인 차이는, 첫 번째 석판의 파괴로 인한 이 모험을 ‘자유를 얻을 자격이 부족했기에’ 받게 된 저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진정한 ‘글쓰기의 자유’로 받아들이는지에 있다. 바로 이러한 태도 차이로부터, 랍비의 폐쇄성과 작가의 개방성이 갈리게 된다. 유켈 세라피는 다른 유대인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나에게, 내 민족의 형제들은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형제애는 자기 이웃의 입장이 되어 그를 이해하는 데 있지 않으며, 그 이웃이 현재의 존재 방식에서 벗어나 마땅한 존재가 되기를, 즉 성스러운 글들이 요구하는 모습대로 되기를 바라는 데 있다. 설령 그 과정에서 그가 상처 입게 되더라도 말이다.”(125쪽)

위의 인용문은 유켈 세라피가 “민족의 형제들”로부터 유대인답지 않다는 비난을 받는 대목의 절정을 장식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유대인답게’ 굴어야 한다는 것은, 유대인 스스로가 스스로를 유대인이라는 단일 정체성으로 환원하는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의 중요성을 과신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말들을-어느 정도까지는-짊어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가끔은, 그것들과 동일시하는 데 성공하는 듯하다. 우리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라도 진리를 드러낸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때는, 우리가 우리를 지울 때이며, 우리가 말의 과거와 미래가 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단절할 때이며, 우리가 우리 오감의 침묵이 될 때, (중략) 매끄러운 금속판이 될 때이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더는 얼굴을 갖지 않을 때이다.(130쪽)

자베스는 모든 종류의 결정적 동일시와 환원을 거절한다. 우리가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고정된 정체성의 규정을 넘어설 때뿐이다. 말과의 동일시는 오만함이자 오류일 뿐이다. 그것이 ‘아리아인’이 되었든, ‘유대인’이 되었든 말이다.
자베스의 문학 세계는 유대인이라는 태생적 조건과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유대인 출신 작가’라는 꼬리표는 그의 작품을 이중으로 조건 지운다.

“나는 우선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난 내가 유대인임을 깨달았고, 그러고 나니, 더는 내 안에서 작가와 유대인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둘은 모두, 하나의 오래된 말이 겪는 고통에 지나지 않기에.” (유켈의 수첩) (511쪽)


─나는 그대들에게 나의 말들을 전해주었다. 나는 유대인으로 존재하는 어려움에 관해 말했으며, 그것은 글쓰기의 어려움과 구분되지 않는 어려움이다. 유대교와 글쓰기는 다만 동일한 기다림이요, 희망이요, 쇠락이기 때문이다.(206쪽)

이는 마리나 츠베타에바가 “세상들 중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이 세상에서/모든 시인은 유대인들이다”라고 표현했던 생각과 유사하다. 이러한 등식이 자베스 작품의 중심점에 위치해 있고, 바로 그 핵(核)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이 솟아난다. 이처럼 유대인과 작가는 동일한 조건하에 있기에, 유대인이 끊임없이 자문하는 ‘질문’과 작가의 글쓰기 자체에 대한 사유가 함께 이루어진다.

세상은 이름 속으로 망명한다. 이름 안에는, 세상의 책이 있다.
쓴다는 것은, 기원에 대한 정열을 갖는 일이다. 글쓰기는 바닥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바닥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다. 죽음 안에서는, 분명, 여러 바닥들이 모여 가장 깊은 밑바닥을 구성한다. 따라서 쓴다는 것은, 목적지에 가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목적지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467쪽)

자베스에게 글쓰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작가의 글쓰기는 마치 유대인들이 거처의 부재를 체험하듯, 매순간 소통의 실패를 체험하는 일이다. 쓰는 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가능하리라는 믿음 속에 희망이 있다. 작가는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글을 쓴다.

책에게서 쫓겨나고 책에게서 요구되는 책이여. 내가 그것의 성찰이자 고통이었던 말은 깨닫는다, 진정한 장소는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면소(免訴)임을. 장소 아닌 장소인 그곳에서,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결코 존재한 적도 없다는 사실에 의해, 주님께서는 반짝이신다. 따라서 엘로힘에 대한 모든 해석과, 아도나이에 대한 모든 접근은 다만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모든 법은 개인적인 법일 수밖에 없으며, 모든 진리는, 그 진리가 우리에게서 끌어내는, 절규 속 외로운 진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공인된 진리의 전달 가능성 안에, 공통되고 완결된 법의 전달 가능성 안에 있다.(556-557쪽)

모든 해석은 개인적인 해석이고, 모든 진리는 우리가 자신에게서 이끌어내는 외로운 진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믿음의 영역이다. 작가는 진리의 전달 가능성에 대한 굳센 믿음 속에서 희망을 이어간다.

■ 이방인에 대한 환대의 글쓰기
에드몽 자베스는 레비나스,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집 없는 경험을 공유한다. 환대는 집 없는 이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태도, 약자의 요청에 대한 응답과 그에 대한 책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환대는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타자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베스가 「질문의 책」을 통해 줄곧 강조해온 것은,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 모든 이방인에 대한 환대의 자세다.

“나는 이방인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볼 때, 같은 방식으로 바라봐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405쪽)

우리 모두는 유대인이 될 수 있다. 곧 모두가 작가의 소명을 짊어질 수 있다. 그때 작가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들은 다음과 같다. 진리로서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기, 언어화할 수 없는 울부짖음을 글로 옮기기, 그렇게 울부짖음의 흔적을 거처삼아, 새로운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기, 그러는 와중에 글 속에서, 책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박해자들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감춰 버리기. 이를 우리는 문학적 저항운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 혹은 자베스 본인의 표현을 따라 “신의 몸짓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물소가 회전식 양수기를 돌리는 일과 마찬가지로, 글쓰기 역시 매번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듯하지만, 실은 갈증에 시달리는 타인에게 마실 것을 내어주는 일이다. 글쓰기는 동일성으로의 환원에 대한 저항이자, 질문 던지기이자, 타인의 갈증에 대한 답, 곧 새로운 질문이다. 그렇게 세상은 절대적인 창조자도 피조물도 존재하지 않고, 영원히 순환과 확장을 거듭하며, 새로운 시련에 대한 새로운 생존을 거듭하는 ‘책’이다.
그래서 결국 『질문의 책』이 천착한 ‘하나의 질문’이란 어떤 질문인가? 500페이지가 넘는 질문 덩어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감히 이 질문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누군가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나치의 태도’, 누군가가 자신과 닮았다는 이유로, 그가 상처를 입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동화를 시도하는 ‘랍비의 태도’, 과연 다른 누군가를 향해 그러한 태도들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의 동일성은 공고한 것입니까?”

목차

『질문의 책』 또는 끊임없이 떠도는 한 가지 질문에 관하여│이주환 ㆍ 23

질문의 책
헌사 ㆍ 61
책의 문간에서 ㆍ 65
그리고 그대는 책 속에 있게 되리라 ㆍ 77

부재자(不在者)의 책
1부 ㆍ 105
2부 ㆍ 183
3부 ㆍ 203

살아 있는 자의 책
1부 ㆍ 235
2부 ㆍ 245


유켈의 책
헌사 ㆍ 281
이야기에 앞서 ㆍ 283

1부
흰 공간 ㆍ 293
선(善)의 몫 ㆍ 302
씨앗과 기호 안에서의 사라와 유켈에 대한 묘사 ㆍ 312
거울과 목도리 ㆍ 315
울부짖고 있는 사라와 유켈에 대한 묘사 ㆍ 318
감긴 눈의 목소리 ㆍ 320
돌과 모래의 대화 ㆍ 323

2부
책과의 관계 ㆍ 329
글을 쓰는 습관 ㆍ 332
어떤 때에도 그대들의 얼굴을 묘사하지 않았네 ㆍ 337
차게 식은 등잔 ㆍ 339
유켈 세라피가 참여한, 학자들과 우연한 손님들 간의 대담 ㆍ 341

3부
유켈의 일지 ㆍ 355
사라의 일지 1 ㆍ 358
사라의 일지 2 ㆍ 364
시간의 바깥에서 연인들이 나눈 대화 ㆍ 367
사라의 일지 3 ㆍ 371

4부
여지-없음(non-lieu)의 화신 1 ㆍ 377
여지-없음의 화신 2 ㆍ 389
베일과 처녀 ㆍ 394
주님의 내려간 눈꺼풀 ㆍ 398
죽음의 반항 ㆍ 406
속된 말 ㆍ 408
과거와 과거의 대화 ㆍ 415
뱃사공과 강변 주민의 대화 ㆍ 417
질서와 흔들림 ㆍ 420

5부
아침 ㆍ 427
가브리엘에게 보내는 편지 ㆍ 435
바다의 손들 ㆍ 441
남쪽 ㆍ 443


책으로의 귀환
헌사 ㆍ 451
이야기에 앞서 ㆍ 453

1부
가장자리와 경계 ㆍ 459
번개와 빛 ㆍ 464
시련과 책 ㆍ 467
몰락과 망명 ㆍ 473
대지 ㆍ 477
진주와 검 ㆍ 483
바늘과 시계판 ㆍ 486
닫힌 커튼 ㆍ 490
공간과 시간 ㆍ 492
유켈 세라피가 참여한, 학자들과 우연한 손님들 간의 새로운 대담 ㆍ 495
고리 ㆍ 499

2부
왕-세기 ㆍ 503
계약 ㆍ 511
구멍 ㆍ 517
세 가지 질문 ㆍ 526

3부
간격과 강세 ㆍ 535
온벽 ㆍ 541
예리코의 장미 ㆍ 545
거절과 피난처 ㆍ 550
땀 구슬들 ㆍ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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