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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
스물여덟 번의 거절, 단단하고도 예술적인 첫 시집
루이즈 글릭의 첫 시집 《맏이》는 1968년에 출간됐다. 거절만 스물여덟 번. 그 끝에 나온 시집이다. 시인으로 첫 시집을 내는 과정의 지난함과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엿보이는 작품집라고 볼 수 있다. 동시대 여성 시인들은 첫 시집을 내기까지 루이즈 글릭만큼 엄청난 기다림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미국 여성시사의 중요한 획을 그은 에이드리언 리치, 첫 시집만으로 문단에서 주목받은 실비아 플라스, 산후 우울증을 적나라하게 담은 앤 섹스턴을 꼽아본다면 루이즈 글릭의 첫 시집은 굉장한 기다림이다.
첫 시집이 출간됐을 때 글릭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우울, 불안을 기반으로 한 여러 병증을 짙게 깔아둔 첫 시집은 문단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 시단의 거장 로버트 하스는 “고통으로 가득 찬 단단하고도 예술적인 시집”이라고 이 시집의 장점을 짚었다. 태어나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었던 시집이 나온 52년 후, 시인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글릭 시 세계의 밑그림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상처를 만나려면 그 첫 시집을 읽어도 되지만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시인의 조심스러운 겸손과 달리 이 첫 시집은 글릭이 이후에 보여 주는 방대한 시 세계의 밑그림이 된다. “이십 대에 가장 큰 재능을 선물 받은 시인”이라는 평단의 찬사가 부끄럽지 않은 이 시집은, 삶의 비참과 절망, 상실과 어둠을 응시하는 시선을 유지한다. 시인은 다양한 화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 시대의 풍경을, 인간사의 지난함을, 사랑의 허망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생을 응시한다. 가정이라는 공간 안팎에서 가장자리로 내몰리며 고립감에 시달리는 인물들을 통해 시대의 우울한 풍경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끝내 견디면서 삶을 살아 내는 자세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서투름이 아니라 용기와 굳건함으로 삶의 모든 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인의 첫 시집. 글릭의 두려움 없는 삶의 태도를 가장 처음으로 깨닫게 해 주는, 글릭 시 세계의 맏이다운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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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 위의 집》
우울과 황폐 후 7년, ‘새로운 종의 시인’으로 호평받은 시집
《습지 위의 집》은 첫 시집이 발표된 지 7년만인 1975년에 출간됐다. 글릭은 이번 시집에 집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 담았다. 한결 사랑스럽고 다정한 시집이다. 첫 시집 《맏이》에서 지독한 우울과 황폐를 보여 준 후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시집 속에서 글릭이 그리는 목소리는 사랑스럽다. 자연 속에서 부드럽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힘 때문에 “새로운 종의 시인”이 나왔다는 문단의 호평을 받게 된다.
자신의 삶과 화해하는 법
글릭은 젊은 날을 남들과 비슷하게 보내지 못했다. 지독한 우울, 섭식장애 등으로 시절을 보낸 시인이 어떤 언어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화해에 이르렀는지를 독자들은 이 시집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불안과 우울을 그린 첫 시집 이후, 꽃이 피어나는 공간과 시간을 담은 두 번째 시집 《습지 위의 집》이 출간된 것은 그녀의 시 세계가 절묘하게 확정되었다는 증거다.
첫 시집과 맥락을 같이하는 점은 자신의 불행을 수용하는 모습에 있지만, 글릭은 이 시집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다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누군가와 하는 화해는 삶을 뒤바꿀 수 없다고. 화해 이전에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의 풍경, 삶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굳건하고 덤덤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마음가짐이 진정한 화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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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생 붓꽃》
★퓰리처상★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시집
1992년 출판된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야생 붓꽃》은 시인에게 퓰리처상과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시 협회상을 안겨준 대표작이다. 미국시사에서 식물에게 이렇게나 다양하고 생생한 그들만의 목소리를 부여한 시인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다.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던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86)이 자연에 대한 시, 특히 꽃을 매우 섬세하게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를 많이 썼지만, 글릭처럼 이토록 온전히 꽃의 목소리를 직접 구사하지는 않았다. 동시대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2019)도 자연을 가까이 하며 다른 존재들에 대한 시를 많이 썼지만 인간의 시선으로 대상을 면밀히 보는 시들이 많았다. 글릭에게 이르러 꽃은 비로소 꽃 자체가 된다.
《야생 붓꽃》은 글릭의 시적 실험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시집이다. 시집은 꽃과 정원사-시인의 기도와 신이 함께 거주하는 정원의 세계다. 아침저녁으로 나가서 꽃을 살피고 꽃과 대화하고 날씨를 보고 햇살과 바람을 느끼는 곳이지만 그 정원은 이상하게도 꿀벌이 없는 정원이다. 글릭이 좋아하는 시인 디킨슨의 정원은 꿀벌로 가득한데, 글릭의 정원은 꿀벌이 없다. 그래서 실제의 정원이라기보다 상상 속의 정원으로 읽히기도 한다.
삶과 희망을 깨닫게 하는 메시지
《야생 붓꽃》은 삶과 희망, 존재의 영원한 순환에 대한 감각을 깨운다. 정원에 꽃이 피어나기까지의 1년, 일시적이면서도 순환적이고, 그래서 영원한 생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대표작이다. 작가와 독자가 서로를 연대하게 만드는 이 시집은 살아갈 용기, 깊은 희망, 존재로서의 정당함을 일깨운다. 생명의 영원한 본질인 ‘존재함을 누군가가 알아차려주는’ 행위가 이 시집에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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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르노》
★PEN 뉴잉글랜드 어워즈★
고대 로마인들의 지하 세계 입구에서
영감을 받은 시집
루이즈 글릭에게 노벨 문학상을 부여한 한림원에서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집으로도 꼽히는 《아베르노》. 이 시집은 하데스에 붙잡힌 페르세포네의 신화를 몽환적이면서도 마치 존재했던 이야기를 다루듯이 능수능란하게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아베르노는 라틴어로 지옥을 뜻한다. 고대 로마인들이 지하 세계의 입구로 여겼던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작은 분화구 호수의 이름이다. 이 장소가 루이스 글릭의 열 번째 시집 이름이 되었다.
그리스 신화를 차용한 방식에선 이전 시집들 가령 《목초지》(Medowlands, 1996)와 《새로운 생》(Vita Nova, 1999) 《일곱 시절들》(The Seven Ages, 2001)에 연결되는 이 시집은 인간 본성에 깃든 욕망과 상실, 트라우마의 문제를 현재적 목소리로 바꾸어 전달한다. 절제된 형식미를 내세워 이 지상의 목숨과 신의 존재, 몸을 지니고 태어나는 생명들의 존재 조건에 대한 영성적인 질문을 하는 점에서는 《야생 붓꽃》(The Wild Iris, 1992)과도 연결된다.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언어
《아베르노》는 미국에서는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는 걸작 시집이기도 하다.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와 고전 신화 사이에서 시적인 페르소나에 초점을 맞춘 이 시집은 삶이 고통과 맞닿아 있는 이들에게, 재가 되어버릴 것 같은 생의 고통에 갇힌 현대인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육체 안에 존재했던 삶의 기쁨을 떠올리게 하고, 결국 지금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위안을 찾을 것인지 자문하고 그 해답을 찾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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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고 고결한 밤》
★전미도서상★
루이즈 글릭이 가장 애정을 둔 시집
〈뉴욕타임스〉는 그녀와 그녀의 시집을 두고 “이 나라 문학의 주요 사건”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신실하고 고결한 밤》은 루이즈 글릭이 가장 애정을 가진 시집이라고 밝힌 작품집이다. 가장 최근의 시 세계를 알 수 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상실과 절망, 죽음을 통과한 언어, 생의 파고를 넘으며 저류(低流)로 간신히 살아낸 삶을 응시하는 언어는 단순하고 신실한 글릭시학의 묘미를 잘 보여준다.
글릭에게 시의 언어는 어떤 화려한 미학적 방법론에 기대고 있지 않다. 그에게 시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 사라진 것들, 입이 없어 말을 하지 못하는 작은 기억의 파편들을 어떻게든 다시 불러 모아 기워내는 생존 작업이다. 시인은 시간의 파편에 기대어 이 시집을 완성했다.
자신을 긍정하는 힘을 전달하려는 시인의 정신
생의 유한함, 시작과 끝에 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어떤 독자적인 시작도 어떤 단일한 끝도 없음을 반복하여 이야기하는 시집은 시작도 끝도 아닌 삶의 여정 위에 우리가 어떤 호흡을 가져야 하는지를 재차 묻는다. 루이즈 글릭이 이 시집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우리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다소 우발적인 인생, 결함이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긍정해야만 삶이 살아진다는 메시지가 시집 전체에 담겨 있다.
이 시집은 편안한 어조로 쓰였지만 독자를 미지의 세계와 만나게 한다. 죽음의 왕국을 통과하기도 하며, 기사가 되었다가 한 영혼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게 만든다. 명확한 어조로 꿈을 거닐게 만드는 루이스 글릭만의 마법 같은 경이로운 문장은, 그동안 예술성 높은 시작품을 갈구해온 독자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