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으로 만들어지는 무언가가 늘 있다.”
한 명의 예술가를 알리기 위한
시공사의 루이즈 글릭 전집 프로젝트
2020년 노벨문학상 작가 루이즈 글릭의 대표 시집 《야생 붓꽃》, 《아베르노》, 《신실하고 고결한 밤》이 언론과 문학 독자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은 지 1개월이 지났다. “개인의 존재를 보편적인 것으로 끌어올리는 시적 목소리”라는 한림원의 찬사를 받은 루이즈 글릭은 퓰리처상 · 전미도서상 · 미국 계관 시인 · 국가인문학메달 · 전미비평가상 · 볼링겐상 · 로스앤젤레스타임스도서상 · 월리스스티븐스상. 그리고 노벨문학상까지, 50년 동안 미국 시 문단 중심에 선 인물이다.
노벨문학상 소식 후 2년 가까이 그녀의 작품이 온라인에서 번역되어 왔지만, 그녀가 인정한 유일한 한국어본은 시공사의 책이 유일하다. 꼼꼼하고 치밀한 시인과 루이즈 글릭의 시 세계를 연구하는 학자 정은귀 교수가 치열하게 소통한 결과다. 앤 섹스턴과 어맨다 고먼의 시를 우리말로 옮긴 정은귀 교수는 대학 강당과 논문을 비롯해 대중 강연에서도 글릭의 시를 강독하고 알리는 열정적인 연구자다. 한국연구재단 내 루이즈 글릭 연구 프로젝트를 설립해 루이즈 글릭의 시 세계를 활발히 연구하며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시공사는 2023년까지 루이즈 글릭의 전 작품을 출간하겠다는 목표로, 그녀의 데뷔작 《맏이》와 두 번째 시집 《습지 위의 집》을 출간한다. 대표 시집 3종을 출간하고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을 연달아 출간하는 이유는, 그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기반이 되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 두 시집을 통해 루이즈 글릭이라는 한 인간과 그녀의 시 세계를 동시에 이해하게 된다. 앞서 출간된 시집 3종의 시 세계에 대한 낯섦은 사라지고 더욱 몰입될 것이다.
ㆍ ㆍ ㆍ
이 모든 시절 뒤,
생생한 색으로 돌아오는, 사랑.
_〈동트기 전 내 인생〉 중에서
《맏이》
스물여덟 번의 거절, 단단하고도 예술적인 첫 시집
루이즈 글릭의 첫 시집 《맏이》는 1968년에 출간됐다. 거절만 스물여덟 번. 그 끝에 나온 시집이다. 시인으로 첫 시집을 내는 과정의 지난함과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엿보이는 작품집라고 볼 수 있다. 동시대 여성 시인들은 첫 시집을 내기까지 루이즈 글릭만큼 엄청난 기다림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미국 여성시사의 중요한 획을 그은 에이드리언 리치, 첫 시집만으로 문단에서 주목받은 실비아 플라스, 산후 우울증을 적나라하게 담은 앤 섹스턴을 꼽아본다면 루이즈 글릭의 첫 시집은 굉장한 기다림이다.
첫 시집이 출간됐을 때 글릭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우울, 불안을 기반으로 한 여러 병증을 짙게 깔아둔 첫 시집은 문단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 시단의 거장 로버트 하스는 “고통으로 가득 찬 단단하고도 예술적인 시집”이라고 이 시집의 장점을 짚었다. 태어나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었던 시집이 나온 52년 후, 시인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청춘 속 그늘, 생명 속 죽음, 환희 속 고통
《맏이》는 총 세 부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는 ‘알egg’이다. 계란, 달걀로도 옮길 수 있는 단어를 역자는 고민 끝에 ‘알’로 옮겼다. 마비된 도시 풍경을 이야기하는 시로 시작하는 1부는 죽음을 껴안은 생명의 문제를 다룬다. 생명의 모태가 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난자만은 아니기에 역자는 고민 끝에 좀 더 폭 넓은 단어를 선택했다. 2부는 임신과 낙태 등 젊은 날의 어지러운 사랑과 실패, 관계의 아픔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3부는 결혼 생활에서 느끼는 고립과 단절을 1인칭으로 전한다. 독자는 이 첫 시집을 통해 후기 시집에서 드러나는 이야기꾼의 면모, 진솔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주체적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다.
글릭 시 세계의 밑그림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상처를 만나려면 그 첫 시집을 읽어도 되지만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시인의 조심스러운 겸손과 달리 이 첫 시집은 글릭이 이후에 보여 주는 방대한 시 세계의 밑그림이 된다. “이십 대에 가장 큰 재능을 선물 받은 시인”이라는 평단의 찬사가 부끄럽지 않은 이 시집은, 삶의 비참과 절망, 상실과 어둠을 응시하는 시선을 유지한다. 시인은 다양한 화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 시대의 풍경을, 인간사의 지난함을, 사랑의 허망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생을 응시한다. 가정이라는 공간 안팎에서 가장자리로 내몰리며 고립감에 시달리는 인물들을 통해 시대의 우울한 풍경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끝내 견디면서 삶을 살아 내는 자세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서투름이 아니라 용기와 굳건함으로 삶의 모든 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인의 첫 시집. 글릭의 두려움 없는 삶의 태도를 가장 처음으로 깨닫게 해 주는, 글릭 시 세계의 맏이다운 시집이다.
ㆍ ㆍ ㆍ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 그게
뭐 어때서? 여름이 다가오고, 또 길고 긴
가을의 썩어 가는 날들이 온다. 그때 나는
내 중년의 위대한 시를 시작할 거다.
_〈가을에게〉 중에서
ㆍ ㆍ ㆍ
21세기 노벨문학상 첫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
2020년 루이즈 글릭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시문단에서는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2000년 이후 여성 시인으로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909년에 〈닐스의 모험〉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최초 여성 작가 셀마 라겔뢰프 이후 16번째이고, 1996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이후 두 번째 여성 시인이다. 한림원 위원인 작가 안데르스 올손은 “《야생 붓꽃》(1993)에서 《신실하고 고결한 밤》(2014)에 이르기까지 글릭의 시집 열두 권은 명료함을 위한 노력이라고 특징지어진다”고 했다. 덧붙여 글릭의 작품 세계를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하며 “단순한 신앙 교리(tenets of faith)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엄정함과 저항”이라고도 표현했다. 루이즈 글릭은 50년 동안 미국 시 문단 중심에 선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그래요, 기쁨에 모험을 걸어보자고요 / 새로운 세상의 맵찬 바람 속에서”라는 구절이 있는 시 〈눈풀꽃〉만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현대 문단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퓰리처상 · 전미도서상 · 미국 계관 시인 · 국가인문학메달 · 전미비평가상 · 볼링겐상 · 로스앤젤레스타임스도서상 · 월리스스티븐스상. 그리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그녀의 작품은 우아함, 냉철함, 인간에게 공통적인 감정에 대한 민감성, 서정성, 그리고 그녀의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난 거의 환상에 가까운 통찰력으로 지속적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