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의 토대를 해부한다, K-철학의 가능성을 연다
인류세 시대의 복음으로, 한국철학의 본질을 주목한다
1.
‘한국철학’은 누구나 아는 주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통상 한국철학은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나 불교학, 그리고 근대 이후에 수입된 서양철학에 대한 한국인들의 연구, 그리고 동아시아 전통사상이나 철학에 대한 한국인의 연구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단군신화 이래 한국에서의 사상적 맥락 고찰을 한국철학사로 공부하는 것이나 ‘존재’, ‘인식’, ‘실체’, ‘속성’ 같은 개념, 또는 ‘리(理)’, ‘기(氣)’, ‘심(心)’ 같은 개념을 도구 삼아 철학논쟁을 계속해 가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또는 원효나 퇴계, 율곡 같은 한국인 사상가를 연구하는 것을 한국철학으로 규정하기도 하지만, 이들 작업이 중국철학의 개념으로 진행되거나 서양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국철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국철학’의 가장 기본 요건은 동방(東方=한반도, 조선)이라는 지역에서 동인(東人=한국인)이 생각하는 방식으로서의 ‘한국적 세계관’이나 ‘사고체계’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철학체계라도 ‘순수-고유’한 것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외부 세계와의 교섭과 상호 영향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므로, 중국철학이나 서양철학을 배제한 ‘한국철학만’을 추출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혹은 서양과 영향을 주고받은 한국의 사고체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그렇게 해서 형성된 새로운 사고체계가 원래의 중국 혹은 서양철학과는 어떻게 다른 한국적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고, 그것을 일러 ‘한국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철학은 ‘한국학’과 ‘철학’의 결합일 때 비로소 그 본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그러면 한국철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한국철학의 핵심적 개념을 천착함으로써 풀어나간다. 우선 〈하늘〉이라는 개념은 한국철학의 가장 원형적 배경이 된다. “한국의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하늘’이라는 이름의 상점이나 교회 또는 학교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하늘 관념이 한국인의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 그 근원을 밝혀야 한국의 ‘天(천)’을 중국의 天(티엔)을 이해하는 바탕 관념, 서양의 God(갓)을 수용하는 마중물이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종교〉 개념도 마찬가지다. 오늘 한국사회의 ‘종교’는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실은 한국인은 종교를 religion으로 착각하면서도 그 깊은 내면에서는 동아시아적, 그리고 한국적 교(敎, 儒敎/佛敎/道敎)의 관념을 떨쳐 내지 못하고/않고 있다. 한국인은 고유한 ‘교(敎)’ 체제 속에서 religion 개념을 수용하고 변용시켜서 오늘, ‘종교 천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의 ‘종교’의 관념 역시 한국철학적 접근을 시도할 때 비로소 그 실상을 온전히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또 그동안 한국 자생의 철학적, 사상적 성취로 여겨져 온 실학에서 그 허구적 껍질을 걷어내고 ‘실심실학론’으로서, ‘실천 실학’으로서의 접근을 시도하는 것도 ‘한국철학’의 내포를 새롭게 구성하는 근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가장 한국적인 철학적 관념이면서, 여전히 선입견 속에 곡해되어 차별되거나 기피 대상으로 여겨지는 ‘개벽’을 ‘한국철학’의 고갱이로서 재발견한다. 또한 개벽사상의 원천인 ‘동학’은 오랫동안 ‘혁명’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한국철학’적 관점에서 그것은 ‘생명’의 철학이요 사상으로서 그 이후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3.1운동을 거쳐 윤노빈, 장일순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생명평화사상이라는 한국철학의 뚜렷한 줄기를 형성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국학적 특징을 내포한 핵심적 개념들이야말로 오늘의 한국철학의 DNA가 되고 있다.
3.
지금, 온 세계가 빛과 같은 속도로 연결된 ‘세계화, 지구화’ 시대에 ‘한국철학’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류세(anthopocene)’라는 데에 있다. 인류세란 인간 행위가 지질학적인 차원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는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흔적 남김’의 결과는 기후 재난은 물론이고 지구생물 대멸종 같은 전대미문의 위기를 현실화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 과학으로 자연을 개조함으로써 근대산업문명을 일구어 온 결과가 대재앙을 몰고서 인간에게 돌아오는 시대가 바로 인류세이다.
이 문제를 다시 과학의 힘으로, 4차 산업 혁명과 같은 문명의 힘으로 해결하겠다는/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과 움직임이 있다. 반면에 그와는 다른 경로를 찾아서 나아가야 한다는 근본적인 반성과 모색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현대의 인류문명을 일구어 온 대로 문제의 원인이 된 철학에 기반한, 즉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자연을 개척과 개발의 대상으로 삼아온 근대 산업문명의 경로를 따라 질주하면서 인간이 자연을 압도하면, 전적으로 인공의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인데, 과연 그것이 얼마나 지속가능할지, 의문과 회의가 팽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인류 전체의 역사와 현실을 통틀어 최우선, 최대의 과제가 된 ‘인류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학의 최시형이 말한 ‘천인상여(天人相與)’와 같은 유형의 지혜와 능력이 요구된다고 보는 생각이 새롭게 힘을 얻어 가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힘의 균형이 요청되는 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천인상여’의 사고야말로 ‘한국학’과 ‘철학’의 결합의 전형적인 사례임을 주목하는 철학적 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양자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앞으로 지구에서의 거주 가능성을 판가름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 한국철학의 출발점이고 자리매김의 원점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 〈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은 거대한 전환, 근본적 전환의 시대에 한국이 세계를 향해 내놓는 ‘새 시대 선언서’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