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단상의 향연
『300개의 단상』은 짧고 강렬한 단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위인이 남긴 지혜로운 경구 같기도 하고, SNS 피드를 떠도는 짓궂은 농담 같기도 하다. 언뜻 보면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단상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몇 가지의 선명한 화두가 떠오른다. 읽기와 쓰기, 자아와 타인들, 욕망과 좌절, 삶과 죽음에 관한 세라 망구소의 말은 정교하고 의미심장하며 도발적이다. 읽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머릿속에 맴도는 촌철살인의 문장들은 “읽거나 쓰거나 욕망할 때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관한 질문들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동그란 파장을 만들어낸다”. 삶을 예술로 바라보는 아포리즘 문학의 정신을 계승하는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절묘하게 투영한다. 현시대에 유효한 잠언이란 이런 형태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작은 쓰기의 시작
짧은 글과 빈 공간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작가는 책의 어느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언제든 쓸 시간이 있는 형식의 글을 쓰고 있다. 당연하게도 시간만 필요한 건 아니지만.” 단상이라는 형식은 쓰는 사람에게 어떤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써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것은 읽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이 책을 중간부터 펼쳐 읽을 수도, 마음에 드는 구절을 건져 올려 자신만의 맥락에 끼워 넣을 수도 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든 읽을 시간이 있는 형식의 글‘인 셈이다. 읽는 행위뿐 아니라 쓰는 행위에 대한 영감도 얻을 수 있다. 세라 망구소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의 시작이 ‘딴짓으로서의 쓰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책의 집필을 미루는 과정에서 쓰기 시작한 글 덩어리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여 하나의 작품이 된 것이다. 흩어지기 쉬운 사유를 붙잡고 삶의 파편을 보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은 쓰기’를 시작해 볼 수 있다.
#시작하기
“나는 내가 쓸 문장이 가져올 결과가 희미하게 어른거리자마자 방아쇠를 당긴다.” (14쪽)
#덜어내기
“나는 요약이 불가능한 글을 좋아한다. 핵심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압축할 수 없는, 쓰인 그대로 옮길 수밖에 없는 글을.” (66쪽)
#고쳐쓰기
“한 편의 작품을 가장 빠르게 퇴고하는 방법은 의견을 듣기 두려운 사람에게 밤늦은 시간에 그 작품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 다음 고쳐 쓰는 것이다. 늦어도 다음 날 아침에는 고쳐 쓴 원고를 다시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14쪽)
#완성하기
“짧은 텍스트에서는 느긋할 시간이 없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면서 쉴 시간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109쪽)
태도가 예술이 될 때
『300개의 단상』의 추천사를 쓴 미국의 작가 존 제레미아 설리번은 “이 책의 곳곳에는 상처받아본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유머가 포진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작가가 가진 삐딱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서도 드러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렇게 행복해지기 위해 그 모든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었느냐고.” “우리는 너무 뻔해서 오히려 발각되기 어려운 곳에 숨는다. 바로 우리의 몸속에.” “우리는 인간의 괴상한 버릇을 볼 때마다 그것을 병리화할 게 아니라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삶의 아이러니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 자체로 매혹적인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세상을 300개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이 책의 곳곳에는 우리가 쉽게 꺼내 놓지 않는 크고 작은 욕망들이 배치되어 있다. 모두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감정일지언정, 우리의 내면에 분명히 존재하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예술이 있다. 세라 망구소는 “나는 가장 변호하기 어려워 보이는 믿음들을 변호하기 위해 글을 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읽고, 쓰고, 욕망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투쟁하는 사람의 삶을 변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