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공화국 피렌체
마키아벨리(1469~1527)가 활동한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지배자가 난립하여 교황령, 밀라노공국, 베네치아공화국, 나폴리왕국, 피렌체공화국 등 여러 정치 공동체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피렌체는 공화국이라는 정체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1434년부터 1494년까지 약 60년간 메디치라는 한 가문에 의해 군주적 권력으로 다스려진 도시국가였다. 1494년 프랑스에 점령당하고 메디치가가 축출되면서 피렌체에는 ‘저변이 넓은 정체’가 들어선다. 마키아벨리가 1498년 피렌체 정부의 사무관이자 외교와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제2서기국 서기장으로 선출된 것이 이런 피렌체 역사의 전환기와 맞물려 있음을 이 책은 주목한다. 그리고 그가 공화국에 살면서 고대 로마와 공화주의에 극심한 목마름을 느끼게 된 경위를 밝힌다. 책의 저자는 피렌체라는 거짓 공화국에서 능력과 성과보다 메디치가와의 관계나 가문의 위치가 더 중요했던 사회상을 그 목마름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외교관’ 마키아벨리에 방점
피렌체공화국의 대리공사로서 14년간 여러 나라, 특히 교황과 프랑스 왕 사이, 용병대장과 공화국 사이 등을 오갔던 마키아벨리는 외줄 타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베일 뒤에 감춰진 권력자들의 진정한 의도를 간파하고자 했다. 마키아벨리의 이 같은 노력을 밝히기 위해 저자는 당시 마키아벨리가 시 정부에 보낸 보고서와 주요 인물들과 주고받았던 서신들을 들여다보는 데 공을 들인다. 마키아벨리의 보고서에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조망과 지금 당장 필요한 조치를 도출할 수 있는 날카로운 분석, 그리고 속 좁은 피렌체 귀족들을 설득하기 위한 방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간 국내에 소개되거나 저술된 마키아벨리 전기들이 《군주론》 등 일부 저작과 작품에 집중해 ‘정치사상가’로서의 측면만 부각해왔다면 이 책은 그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중점을 둔다. 마키아벨리가 고국의 상관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저작의 근간을 이루는 실제 경험과 그에 따른 교훈뿐만 아니라 발렌티노 공작 체사레 보르자, 프랑스 왕 루이 12세, 독일 황제 막시밀리안, 교황 율리오 2세 등 당시 많은 군주들에 대한 통찰의 원형을 고스란히 살펴볼 수 있다.
기만의 시대, 가면을 쓴 이상주의자
1512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돌아오면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내에서 망명자 아닌 망명자 신세가 된다. 명민한 충고자이자 경고자였던 마키아벨리는 조롱꾼이 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시와 희곡이었다. 그런 글들 곳곳에는 신랄한 조롱과 신성한 엄숙함, 격정과 풍자가 뒤섞여 있다. 저자는 〈안드리아〉와 〈만드라골라〉, 〈클리치아〉 등의 희극 작품들을 꼼꼼히 검토하면서 희극으로 ‘기만’의 언어를 드러나게 하려 한 ‘마키아벨리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의견을 굽힘 없이 표현할 수 있기를 원했다. 세상에 조롱과 냉소를 보내는 희극작가 뒤에는 이상주의자가 숨어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
공직에서 파면당한 마키아벨리는 저술 활동에 집중한다.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전술론》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저술 대부분이 이 시기에 쓰였다. 저자 폴커 라인하르트는 르네상스 전문가답게 그 시기 마키아벨리의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더해 마키아벨리를 좀 더 가까이에서 헤아려 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맥락 속에서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마키아벨리를 당대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에만, 당대의 위기이자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화근에 구제책을 고안해낸 탁월한 지적 아웃사이더로 이해할 때에만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과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