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순, 한국 최초 마취과 전문의
신정순은 마취과(痲醉科)라는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한 전문과를 담당하였고, 여성으로서 국립의료원 최초의 한국인 마취과장을 역임했다. 그는 구제 일본식 이론 중심의 의학교육을 받았지만, 졸업 후 의사생활을 미군 야전병원에서 시작해 미국식 의학 시스템을 경험했고, 이후 스웨덴 적십자병원에 근무하면서 의사 초년기를 보내 북유럽식 병원시스템에 익숙했던 인물이었다.
그 당시 세계적으로 부족했던 마취 의사 양성을 위해 WHO에서 주관한 덴마크 코펜하겐 마취의사 연수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서구의 선진 의학기술을 습득하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해당 연수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매년 1명씩 참여할 수 있었는데(해당 프로그램을 이수한 국내 의사는 10여 명 정도이다), 신정순은 최초로 WHO 장학금을 지원받아 코펜하겐으로 유학을 떠났던 의사였고, 1961년 1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한국 마취학 분야를 선도했다.
국립의료원 개원 당시, 스칸디나비아 측 의료인과 한국 측 의료인 간 가교역할
국립의료원이 문을 열자, 신정순은 본격적인 마취과 전문의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부터 1957년까지 파견되었던 스칸디나비아 측 의료진들 중 일부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가 국립의료원이 개원하자 다시 돌아와 일했기 때문에 스칸디나비안 측 의료진과의 진료경험과 병원운영에 경험이 많았던 신정순이 한국인 의료진과 스칸디나비아 측 의료진 사이의 가교역할을 도맡아 했으며, 국립의료원 초기 병원운영 안정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신정순은 국립의료원 개원 초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만 했던 국립의료원 설립 초창기에, 한국 측 인력과 스칸디나비아 측 인력의 접점을 찾아 공통의 목표를 제시하고 함께 수행하는 데 있어서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정순처럼 서구의 의료진 특히 스칸디나비아(스웨덴) 의료진들과 함께 근무했던 경험은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신정순은 양측이 원활한 관계 속에서 의료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국립의료원 구성원 중 그 누구보다 많은 경험과 이해, 의사소통의 노하우가 있었고, 영어로 대화가 가능했다. 부산 스웨덴 적십자병원으로부터 이어진 인맥과 인연으로 국립의료원의 성공적 안착을 도왔고, 그녀 스스로도 마취과 전문의로서 한층 더 큰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한국 의학이 발전하도록 노력한 숨은 공로자 중 한 명이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새 출발 그리고 헌신
모교인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새 출발을 한다. 혜화동 병원 신관이 건립될 당시, 신관으로 옮겨갈 수술실, 구로와 안산, 여주병원 개원 당시 3개 병원의 수술실, 중환자실, 또 안암병원 수술실 등을 세팅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3개 병원(1983년 구로병원, 1984년 여주병원, 1985년 안산병원)이 하드웨어적인 골격을 갖추어가는 동안에도 환자 안전을 위해 수술실을 지키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두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고려대학교 마취통증의학 교실이 후진 양성의 요람이 되는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구심점이 된 것이 바로 신정순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