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삶은 손끝에 막대 세우기라고 말하면서 생물이 가지는 고통의 뿌리를 서술한다.
‘생물은 바위와 같이 그저 견디면 되는 것이 아닌, 생명 현상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손끝에 서 있는 막대를 쓰러뜨리지 않게 하려면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야 하듯 생물도 살아 있기 위해 무엇인가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의식이 어떻게 고통을 심화시켰는지 말한다.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다른 생물들은 소멸될 때까지 주어진 조건으로 살아갈 뿐이죠. 그들은 조건이 환경에 부합된다면 생존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의식을 갖고 스스로 성찰하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챕니다.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더 높은 단계에 시선을 옮기며 변화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의지를 유발하는 최초 감정은 괴로움이며, 더 나은 여건을 얻는 과정도 역시 고통을 요구합니다.’
저자는 고통과 즐거움을 ‘인간을 살아가게 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 기제’로 해석하고,
‘생사를 오가는 전투에서 쓸모없는 장비는 병사의 목숨을 위협하듯, 생명체에 달려있는 모든 것과 행동들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멋진 겉눈썹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는 기능으로 남아있고, 인간에게 쓸모없는 꼬리는 퇴화하여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통과 즐거움도 생존에 필수적인 하나의 반응입니다.’
그 명제 아래 고통과 즐거움을 분류하고, 행복감과 불행감이 어떤 것인지 정의한다.
‘만약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퇴근하고 당신만 혼자 남아 일을 해야 한다면 불만일 것입니다. 불만의 이유는 그 일 자체보다 나만 일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만 더 자주 많은 고통을 겪는다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겪는 고통의 양이 아니라 ‘왜 나만 겪는가?’입니다. 따라서 불행감은 강화된 불만인 셈이죠.
‘행복은 기쁨이 한 단계 더 승화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이 기쁨이 계속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기인합니다. 맘에 드는 옷을 사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 행복한 이유는 좋은 옷이 눈에 띈 우연에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나중에 그 옷을 입을 기쁨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감정은 현재의 기쁨에 의해 촉발되지만, 그 무게중심은 미래에 있습니다.’
저자는 집단이 개인의 행불행에 끼치는 영향을 나열하고, 고통이 적은 집단의 조건을 말한다.
‘집단은 개인을 서열 지우고 차별합니다. 생산에 더 많이 기여한 사람이 더 많은 물질을 얻습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적은 양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물질은 차이를 만듭니다. 그 차이는 부러움을 낳고, 부러움은 불만의 원인이 되며, 불만은 불행한 삶을 만듭니다. 집단은 삶에 더 나은 것들을 공급하지만, 그의 장점을 상쇄시킬 만큼의 스트레스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상사회의 요건을 제시하고,
‘그렇다면 모든 불행을 차단해 버린다고 해서 삶에 기쁨만이 남을까요? 아닙니다. 획득의 감정인 기쁨은 순간적입니다. 불만 상태에서 만족 상태로 변하는 순간 오는 감정이죠. 따라서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못 가진 상태 즉, 불만족 상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부자라고 하더라도 할 수 없거나 해 보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이며, 그것은 의도적 소망, 혹은 자각하지 못한 소망이 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기쁨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불행과 불만이 없이 완벽하게 소유한 상태는 기쁨의 생산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사회에서도 불만과 괴로움과 아쉬움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 그 불만과 괴로움의 정도가 개인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축소되어야 할 것입니다. 즐거움을 잉태할 수 있는 크기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들은 이제 경쟁지향의 동물적 단계에서 벗어나 이성지향의 인간본연의 단계로 올라갈 것이며,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