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장소로 남는다.
기억은 언제나 물리적인 장소와 함께한다. 물리적인 건축물은 사람이 살고 있어야 의미를 갖지만, 사람은 태생적으로 공간을 영원히 점유할 수 없고 잠시 머물다 떠나게 마련이다. 그렇게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과정에서 기억은 장소로 남는다. 저자는 버스를 타면 종종 목적지보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거리와 건물을 보며 걷는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사진을 찍고, 결국 공간을 떠나야만 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해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재현한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걷는다 - 화가 윤지원의 기억과 장소』는 여러 장소에 담긴 저자의 삶과 기억 그리고 그림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서양화가 윤지원은 마흔이 다 되어 어린 아들 딸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떠나 밀라노국립미술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화가가 되었다. 남들보다 뒤늦게 꿈을 이루었음에도 벌써 스무 번이 넘는 개인전을 연 중견 화가로 자리 잡았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걷는다』에서 저자 윤지원은 자녀들과 함께 시작한 타지 생활의 불안함, 저자의 화풍을 만들어준 유년 시절의 쓸쓸한 추억, 그리고 그의 모든 그리움이 시작된 바다를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다. 독자들은 저자가 눈으로 보고 기억에 담은 장소를 이야기와 함께 그의 그림으로 만난다. 저자의 기억을 품은 장소들은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와 우리의 기억과 향수를, 그리고 고독을 자극한다.
“이 책은 윤지원의 글로 쓴 그림이다.
당신의 유년과 고독한 작가의 생을 만나게 될 것이다.” _김홍희(사진가)
저자는 바다와 고향, 거리와 낯선 도시, 그리고 카페처럼 일상적인 장소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포착해 글로 옮기고 색채로 표현한다. 그 시선을 좇다 보면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던 부산 바닷가에 도착한다. 저자는 홀로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스르르 잠들었다 깨어 노을을 맞이하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외로움은 타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수동적인 것, 고독은 스스로 결정하는 적극적인 것이라며 자신은 고독 예찬론자라고 말한다. 예술이 내면의 풍경에 대한 서술이라면 저자의 내면에는 늘 고독이 있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글과 그림은 저자 개인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면서도 우리 내면의 풍경에 있는 쓸쓸함까지 자극한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군중 속의 고독’이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만남과 인연이 더더욱 반갑게 느껴지고 오래도록 마음에 남기도 한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걷는다』는 고향과 타향을 아우르며 여러 장소에 남은 저자의 기억과 인연, 개인적인 감상을 엮은 책이지만 우리 모두의 향수와 고독, 만남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사람들과 함께하면서도 고독을 느꼈던 순간, 유년 시절 겪었던 상실이나 외로움, 뜻밖의 만남 같은 기억을 상기시킨다.
“윤지원의 작품은 일종의 시간 여행이다.” _윤진섭(미술평론가)
저자에게 로마는 아이들과 함께 유학을 시작한 곳이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이다. 밀라노에는 한여름 밤 베르디의 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오케스트라 연주의 추억이 남았다. 그리스 이타카의 작은 서점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소설 『노인과 바다』의 초판본을 우연히 만나기도 했고, 경남 창녕에서는 여행 계획이 어긋나 주변을 헤매다가 마주한 탑이 국보 제34호의 유적임을 알게 되어 뜻밖의 탑돌이를 하기도 했다. 독자들은 저자의 추억을 매개로 낯선 곳에 처음 자리 잡았을 때로 돌아가 두려움과 설렘, 여름날의 추억, 그리고 기대하지 않은 순간 맞닥뜨린 우연한 만남을 떠올린다. 저자에게 부산 바닷가는 그림에 드러나는 쓸쓸함의 근원이자 유년 시절의 향수를 가져오는 고향이지만, 변해버린 풍경이 타향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 물리적 땅은 고향이면서 타향이 될 수 있다. 고향은 물리적 장소가 아닌 기억의 장소다.
저자는 장소에 남은 기억을, 기억에 남은 장소를 탐구한다. 누구나,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낮은 채도와 낯선 구도가 기시감을 준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걷는다』에 담긴 저자의 기억을 보며 독자는 비슷한 장소에 남은 우리의 기억을 떠올리고, 기시감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돌아보게 된다. 기시감의 시선이 안내하는 목적지는 ‘현재’다. 이 책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고향과 타향을 오가는 저자의 기억을 통해 독자는 자신의 고향과 타향을 떠올리고, 지금을 만들어 준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현재로 도달할 수 있다.
화가 윤지원이 담백하게 풀어내는 짤막한 이야기가 그림과 함께 어우러지는 이 책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걷는다』는 마치 전시회에서 직접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새로운 경험을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