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응시, 연결. 이 평범한 단어들이 한 사람의 생애를 관통하며 기묘한 힘을 발휘하는 장면들이 잔뜩 담겨 있다.” -오혜진(문학평론가)
1세대 여성 장애연극인과 비장애인 연구자가 만나
감응과 응답의 힘으로 다시 쓴 예술과 삶의 질문들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나는 좀 더 근원적인 앎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수 씨가 불러낸 그 무수한 순간들과 수많은 등장인물 사이에서 나는 배웠다. 서로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모두는 모두에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슬프게도, 그리고 기쁘게도, 그 흔적들은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포개어지며, 견고하게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간다.” (‘프롤로그’ 중)
저자는 극단 애인의 단원들이 출연한 공연의 드라마트루그 작업을 맡으며 처음으로 김지수 대표를 만났다. 그의 1인극 무대에 대한 질문들은 생의 이야기로 돌아왔고, 저자는 그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해보고 싶었다.
3년간 진행한 10여 차례의 구술생애 인터뷰와 참여관찰 등을 토대로 쓰인 이 책에서는 지수 씨의 생의 시간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시간의 축이 만나고 가로지른다. 1972년생인 그는 소아마비 마지막 세대로 척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집에서 자립한 후 장애운동의 흐름 속에서 연극을 하게 된 그에게 정체성과 삶, 예술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장애인이 무대에 선다는 것, 관객과 사회의 응시를 받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극단 애인의 단원들은 오디션이 아닌 ‘장애인 국토 종단 여행’을 통해 만났다. 그저 무대를 좋아하거나 연기를 잘하는 이가 아니라 지난한 시간을 함께 견딜 동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지수 씨의 이야기는 저자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오랫동안 연극을 공부하고 현장에 있었음에도 자신이 여전히 장애연극을 읽어낼 수 있는 관점을 가지지 못했음을 새삼, 구체적으로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연극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책이 쓰인 기간 동안 한국에서 장애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지만, 그것이 곧 논의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연극에 대한 반응은 장애를 가진 몸을 무대에서 보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장애인에도 불구하고” 같은 평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여전히 장애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낯설어하는 한국 사회의 한계를 방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쉽게 많이 말해지는 장애예술이란 무엇인가. 그저 장애 당사자가 참여하고, 장애와 관련한 이야기를 다루고, 장애인 관객과 감응하면 되는 것일까?
“비장애인 저자는 장애 당사자계(?) 농담에 진땀 흘리다가 점점 같이 웃는 사람이 되어왔다.” -홍혜은(페미니스트 기획자·저술가)
장애 당사자의 생을 가로지르는 예술과 사회의 시간
다름과 실패를 마주하며 삶을 두텁게 포용한 대화들
“함께 시도하고, 낭패를 맛보고, 그러면서도 다시 시도해보기 위해 서로를 의지하는 일, 그 지난한 사건들을 견디고 다른 질문들을 주고받으며 그로부터 새로운 동력을 발견하는 일, 바로 그 모든 과정에 장애연극의 미학이 있었다.” (‘곁’ 중)
저자는 장애학을 공부하면서 질문을 파고든다. 반스와 머서, 셰익스피어는 ‘장애예술’을 “장애 및 투쟁의 경험에 대한 공유된 문화적 의미와 집합적 표현”으로 정의한다. 장애연극인에게 장애 정체성을 갖고, 사회적 제약과 경계들이 가득한 일상을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내는 과정은, 장애예술의 미학을 찾아가는 과정과 뗄 수 없다.
저자는 지수 씨와 애인 단원들이 해온 몸의 표현과 자기결정의 과정으로 연극을 경험하고, 그 삶의 관점에서 예술성을 이해하게 된다. 장애연극인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훈련하기 위해 직접 고안한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상호배움과 호혜라는 사회적 과정 속에서 미학적 개념을 다시 정의하게 된다.
“과연 지수 씨의 이야기를 쓸 자격이 있을까” 라는 머뭇거림은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나는 얼마나 자격이 있을까”라는 윤리적 고민으로 확장되었다. 응답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함께 살아가기를 연습했다. 이 책에서 김지수 대표를 ‘지수 씨’로 지칭하는 것도 그런 의미다. ‘지수 씨’는 김지수라는 개인이기보다 한동네에 살고,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동료 시민이다.
“대화는 이 책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오래도록 함께 나이를 먹으며, 함께 연극할 수 있기를.” -이연주(연극 연출가)
장애연극의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다시 본다는 것
다양성과 포용, 사회적 돌봄에 대한 성찰과 과제들
시간이 흐르며, 둘은 한국 사회에서 나란히 나이 들어가는 여성이라는 관계로 둘은 새롭게 만난다. 계속 함께 연극하기 위한 고민은 나이 듦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결국 장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장애란 지수 씨의 말대로 “무엇을 시도하는데 내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 어떤 조건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사회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노화의 과정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다.
저자는 자신보다 조금 앞서 장애를 갖고 살아간 여성으로서의 지수 씨에게 묻는다. 각자도생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나이 듦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돌보고 공존하는 노후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 정답은 없지만, 약한 존재들간 다정하고 강인한 연결을 꿈꿔온 장애연극을 통해 얻은 힘과 상상으로 다음을 기약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이제 막 다양성과 포용, 사회적 돌봄에 대해 막 고민을 시작한 한국 사회에서, 20년 장애연극사 속 장애 당사자들의 경험과 성찰은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개선해나가는 과제가 남는다. 저자는 대중문화에서부터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가 재현되도록 주연 캐릭터의 장애와 젠더 등의 요건을 규정하고 직원 고용 및 교육 제도를 설계한 영국 BBC의 ‘360° 다양성 헌장’ 사례를 들며, 구체적인 논의의 필요성을 제안하기도 한다.
장애연극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질문들이 무대 밖을 향할 때, 그것은 세상을 바꿀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