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구체적인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입체적으로 쌓아 올려진 신과 인간의 서사
동화작가로 데뷔한 이후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선보여온 저자 필리프 르셰르메이에르는 장르를 재해석하는 독창적인 시각으로 주목받는 작가이다. 이 책에서도 그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선별하고, 각각의 이야기에 새로운 언어와 형식을 부여해 다시 쓰는 작업을 진행했다. 흔히 알려진 이야기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도 하고, 눈에 띄지 않던 장면을 확대해 보여주기도 한다. 에덴동산에서의 하루하루가 따분해 금지된 열매를 따 먹게 되는 아담과 이브의 선택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고, 세상이 멸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속에 거대한 방주를 짓는 노아는 오히려 어수룩해 보이기도 한다.
짧은 글의 개별적인 형식과 시점의 전환은 이러한 이야기의 독창성을 극대화한다. 신에게 닿을 듯 솟아오르다 무너져내린 바벨탑 이야기는 서로를 사기꾼과 바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만담 형식을 빌려 진실을 전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형들에게 미움받아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이 뜻밖의 순간 형제들과 재회하는 이야기는 3막의 희곡으로 각색되어 여러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해 온갖 시련을 겪지만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눈을 감는 모세의 생애는 우화 형식으로 초파리의 시점에서 묘사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치려다 폭풍우를 만나는 요나의 이야기는 같은 배를 탄 초보 선원의 시점에서 서술되어 환상적인 요소가 한층 강화된다.
다양한 인물의 시점에서
모자이크처럼 완성된 예수의 생애
예수의 탄생에서 죽음과 부활까지를 다룬 신약성서의 내용도 다양한 인물의 시점에서 진술되는데, 각각의 이야기가 완결성을 가지면서도 이어붙여져 하나의 모자이크처럼 완성된다. 어느 날 갑자기 신의 아이를 낳으리라는 이야기를 듣는 소녀, 사막에서 홀로 사십 일을 보내고 악마를 만나는 남자, 운 없는 하루의 끝에서 만선의 기적을 경험하는 어부, 즐거운 혼인잔치에서 곤경에 빠진 사람들, 나병환자가 치유되는 기적을 보는 군중, 죽은 오빠가 살아난 것을 본 여동생… 다양한 시점에서 전개되던 이야기는 다가오는 죽음을 알면서 운명을 향해 가는 예수의 고뇌가 묘사되면서 절정으로 향한다.
각각의 글에 어울리는 다채로운 문체가 사용된 덕분에 신비로운 기적이 유려하게 묘사되어 깊은 여운을 남기기도 하고, 마지막 식사를 위해 모인 자리에 드리운 무거운 분위기가 현실감 있게 와닿기도 하며, 유다가 예수를 밀고하고 베드로가 그를 부인하기까지의 상황이 긴박하게 펼쳐져 몰입도를 높이기도 한다. 한편 예수와 함께하는 일행이 제자가 아니라 친구나 동료로 표현되고, 서로 존대하는 말투로 번역된 것도 이 책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동화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서정적이며 초현실적인,
에스닉하면서도 유머에서 그로테스크까지
장르를 드나드는 환상적인 그림
흰색 베일을 쓰고 푸른색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와 커다란 날개를 단 흰 옷의 천사들… 고전적인 성화의 이미지를 상상했다면 이 책의 일러스트를 보고 적잖이 놀랄 것이다. 성서의 내용에 현대적인 재해석과 환상적인 상상력을 더한 과감한 이미지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린다. 1996년 데뷔 이후 꾸준히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창작하며 독보적인 스타일과 존재감을 구축해온 도트르메르는 다수의 수상 경력을 지닌 프랑스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인데, 《바이블》에서도 특유의 서정적이면서도 압도적인 표현력을 선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텍스트의 실험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변화무쌍한 스타일을 자랑한다는 사실이다. 원시적이고 민속적인 모티프부터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느낌, 잔혹동화 같은 그로테스크한 요소까지 이 한 권의 책에서 모두 만나볼 수 있다. 가벼운 크로키나 흑백의 소묘에서 의상과 소품 문양까지 정교하게 묘사된 세밀화, 화려한 색채감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일러스트까지 다양한 기법과 화풍를 자랑하는 그림들은 저마다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강렬한 핏빛을 부각한 이집트에 내린 재앙들, 극단적인 대비와 동세動勢가 재미있게 연출된 다윗과 골리앗, 동화적으로 표현된 예수가 사막에서 시험을 받는 장면이나 멀리서 지켜보듯 불분명하게 그려진 십자가 장면 등은 이야기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한층 깊이 있고 풍성하게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