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봉기』는 어떤 책인가?
『대중의 봉기』는 1929년부터 일간지 『태양』(El Sol)에 기고한 글을 모아 다음해인 1930년에 단행본으로 출간한 책이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당연히 유럽이다. 이 책은 잡지에 기고한 글이라 내용이 비교적 어렵지 않은 편이지만 유럽 역사에 대한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특히 당시 스페인 역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다소 요구된다.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대중은 역사 무대에 등장해 귀족의 전유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혁명사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한 것에 주목한다. 늘어난 인구는 그간 소수[귀족]가 가진 공간, 즉 주택, 극장, 거리 등으로 밀려들어오며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일이고, 이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실로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은유적인 표현이 많아서 옮긴이가 예단할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이다.
다만 이 넘쳐나는 대중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인 듯하다. 이는 저자의 고국인 스페인의 당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스페인 왕정이 무너진 것은 1873년으로 프랑스혁명(1789년)보다 약 100년이 지나서다. 하지만 스페인 공화국은 1년 사이에 무너지고 왕정시대로 되돌아간다. 오르테가는 이 왕정복고 시대에 태어나 1931년 왕정이 무너진 1931년까지 25년 동안 교수직을 지냈다.
그 사이에 스페인은 뒤늦게 왕정이 무너진 만큼 유럽에서 존재한 모든 사상의 집합소였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유토피아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정통마르크스주의, 수정마르크스주의, 개량주의 등등 대중을 등에 없고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사상이 총출동한 것이다.
1931년 총선에서 공화파가 승리하면서 드디어 스페인도 공화국의 탄생을 눈앞에 두었다. 그러자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주도한 파시즘에서 영감을 얻고,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 승리에 힘을 얻은 군부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스페인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교회, 군부, 기업가 등의 지지를 받은 국가주의자와 중산층, 노동자 등의 지지를 받은 공화파 간의 내전이 펼쳐지고 결국 국가주의자의 승리로 끝나 스페인이 군부독재 시대로 접어들자, 오르테가는 망명길을 떠난다.
오늘날 시대는 대중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전혀 기이하지 않고 공적 자리가 소수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은 평범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기이한 사실이 어떻게 해서 평범한 사실이 되었고, 대중이 봉기하는 그날이 정말 올 것인가? 등등 수많은 이념과 사상 속에 동원된 대중, 이 혼란한 광경을 분석한 메시지를 오르테가는 던지고 있는 것이다.
대중은 어떤 존재인가?
19세기 이래 유럽 사회는 대중이 사회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역사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한 데 그 원인이 있는데, 평범한 사람의 생활수준이 예전에 소수집단이 누리던 수준에 버금가게 되었고, 재산이 평준화되며, 다양한 사회계급들이 평준화되고, 남녀 간 문화 차이도 평준화되고 있다. 세상은 갑자기 넓어졌고, 그와 더불어 그 속에서 삶 자체도 확장되었다. 삶은 사실상 범세계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시간적으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역사 시대가 선사학(先史學)과 고고학에 의해 발견되었다. 신대륙처럼 최근까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문명과 제국 전체가 우리의 지식 속으로 들어왔으며, 평범한 사람들도 신문과 영상을 통해 아주 먼 우주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또 우리 삶도 과거 어느 때보다 다양성이 커졌고, 지식과 관련해서는 더욱 많은 ‘관념화 경로’, 더욱 많은 문제의식, 더욱 많은 자료, 더욱 많은 과학, 더욱 많은 관점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처럼 ‘시대의 절정’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도취되다보니 사람들은 일종의 착시 현상에 빠지게 되었다.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는 물론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자도 모두 자신들이 원하는 미래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실제 지난 세기 유럽인에게 학교는 자긍심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중에게 일상생활의 기술 곧 현대적 도구의 자부심과 위력을 주입시켜 가르칠 뿐 그 근본정신은 심어주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면 최선의 잠재력과 최악의 잠재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 사회생활을 지배하고 대중은 어떤 존재일까?
앞서 이야기했듯 온갖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된 대중은, 내일은 더 부유하고 더 풍부해질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또 이러한 혜택이야말로 자신이 숨 쉬는 공기처럼 저절로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중은 주위세계나 외부 권력에 종속되는 일 없이 맘껏 개성을 발휘하며 스스로 주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반대로 과거의 선택된 사람이나 우수한 사람들은 무언가의 혜택(권리)에 부과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의무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대중은 문명 기구의 사용법을 배웠긴 하지만 문명의 원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기본 지식이 부족한 처지로 뒤처진 것이다.
이처럼 대중은 세상과 삶이 열리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자기 정신을 자기 안에 가두어버린 꼴이 되었다. (이는 지적 폐쇄성의 특수한 경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은 내면에 이미 많은 지식이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만족하며 자신이 지적으로 완벽하다고 착각한다.
물론 오늘날 대중은 과거 어느 시대의 대중보다 영리하고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능력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대중은 우연하게 얻은 진부한 상식, 편견, 엉터리 관념 또는 공허한 말을 순진할 정도로 대담하게 아무데나 들이댄다. 사회생활에서도 앞뒤 가리지 않고 자기 ‘의견’을 주입한다. 곧 대중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문명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마치 자연의 힘인 것처럼 사용한다. 그는 문명이 가진 엄청난 인위적인 특성을 내면 깊숙이 인식하지 못하고, (자동차 등) 문명이 만들어낸 도구에 대해서는 열렬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도구를 만드는 원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론 대중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중의 심리구조는 전형적인 ‘자기 만족형 인간’
사회생활 측면에서 대중의 심리 구조를 살펴보자.
(1) 자신들의 삶은 선천적으로 편안하고 풍부하며 능력을 발휘하면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2) 스스로 자립할 수 있으며, 탁월하고 완전한 도덕적, 지적 자질을 갖고 있으며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고 (3) 그 결과 모든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거나 고려하지 않고 ‘직접 행동’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강요한다. 마치 버릇없는 아이나 반항하는 원시인, 야만인 등 결함 있는 인간 유형을 연상하게 된다. 기형적인 자기 만족형 인간이다.
앞서 말했듯이, 19세기 문명은 자유민주주의와 기술 두 가지로 집약된다. 여기서 오늘날 사회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분명 중간계급일 것이다. 그 중간계급 중에서 상층 집단, 즉 엔지니어, 의사, 금융업자, 교사 같은 전문가들이다. 전문가 집단 내에서 누가 가장 훌륭한 사회 권력을 대표하는가? 당연히 과학자다.
전문화의 야만성
그러나 과학자는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유식한 자가 아니며 ‘과학자’로서 자신이 다루는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식한 자도 아니다. 우리는 그를 ‘박식한 무식한 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전문가의 행동을 보면 그러하다. 그는 정치와 예술, 사회 관습 그리고 자신과 무관한 분야에 대해서는 원시인 또는 무식한 자의 태도를 취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자기 분야 전문가의 의견은 인정하지 않는다. 문명은 그를 전문가로 길러냈지만 자신의 한계 속에 가두어 놓아 자기만족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내면 속의 우월감과 자신감이 그를 자기 전문 분야 이외의 분야에서도 우월하게 행사하고 싶은 충동을 부추긴다. 그리하여 그는 전문화라는 인간 최대의 자격을 가지고 대중과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하지만 그는 삶의 거의 모든 방면에서 결국, 아무런 자격 없는 대중처럼 행동한다.
앞서 과학의 풍부한 원리는 엄청난 진보를 가져왔지만, 그런 진보는 필연적으로 전문화를 수반하고, 그 전문화가 과학을 질식시키는 위협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국가에도 똑같은 일이 나타나고 있다.
18세기 말 산업혁명의 결과로 새로운 사회계급 이른바 부르주아계급이 출현했다. 이 영악한 부르주아계급은 특히 실용적인 재능 곧 자신의 노력을 일관되게 지속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곧 그들은 국가를 만들어냈다.
최대의 위험-국가
중세 시대 용기와 리더십, 책임감으로 존경받는 귀족은 두뇌를 활용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한마디로 ‘비합리적’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대리자인 중세 기사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대혁명 이후 부르주아는 공적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우수한 능력을 국가에 주입함으로써 불과 한 세대 만에 혁명을 종식시킬 만큼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냈다. 이제 우리 시대의 국가는 아주 뛰어난 효율성을 가지고 훌륭하게 작동하는 무시무시한 기계가 되었다.
대중은 국가를 둘러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국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을 보호해 줄 것으로 알고 있다. 더군다나 대중은 국가가 익명의 힘을 가진 것을 보고, 자신도 익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며 국가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착각이다.
오늘날 문명을 위협하는 최대의 위험은 국가 개입이다. 국가는 사회의 모든 자발적인 노력을 억제하고, 결국 역사의 자발적인 행위를 말살한다. 결국 사회의 자발적인 행동은 국가 개입에 의해 계속 방해를 받으며, 사회는 국가를 위해 존속하고, 사람은 정부라는 기계를 위해 존속하게 된다.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지금까지 세계는 유럽의 통일된 지휘 아래 단일한 양식으로 살아가거나 점차 통일된 ‘근대적 생활양식’ 곧 ‘유럽의 헤게모니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유럽의 몰락이 큰 화제로 떠오르고 인류는 혼돈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 자리를 누가 대신할지 아무도 모른다. 유럽하면 기본적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 세 나라를 떠올린다. 이 세 나라가 점령한 지역에서는 인간의 생활양식이 성숙해졌고 그 생활양식에 따라 세계가 조직되었다.
유럽을 대신할 수 있는 곳으로 뉴욕과 모스크바를 꼽지만 오르테가는 러시아가 지배권을 가지려면 수세기가 필요하며, 러시아는 아직도 계명이 없기 때문에 유럽의 마르크스 원리를 고수하는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뉴욕의 강점은 결국 딱 한 가지 즉 기술로 귀착되는데 그 기술은 미국의 발명품이 아니라 17세기와 19세기에 유럽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의 몰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진단하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오늘날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난관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유럽은 정말로 지배권을 상실한 것인가?
국가는 인간의 노력과 협력 없이 자연에 의해 형성된 혈통에 기초한 유목민 무리나 부족의 사회 형태와는 다르다. 그와 반대로 국가는 혈통으로 구성된 자연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때 시작된다. 국가는 그 기원에서 보면 여러 인종과 언어들이 혼합되어 구성되며 모든 자연 사회를 초월한다.
국가는 혈연으로 결합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공동체가 아니다. 국가는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던 집단이 공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고 느낄 때 시작된다. 이러한 의무는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목적, 즉 흩어진 집단 앞에 놓인 공동의 과제이다. 국가는 무엇보다도 행동 계획이자 협력 프로그램이다. 사람들은 뭔가를 같이 하기 위해 모인다. 국가는 혈연집단도 언어 통일체도 아니고 영토 통일체도 인접한 거주지도 아니다.
국가는 공동 사업을 계획하는 등 순전히 역동적이며, 뭔가를 수행하는 행동하는 공동체다.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이 국가의 구성원이며, 공동 사업에 참여하는 정치적 주체이다. 인종, 혈통, 지리적 위치, 사회계급-이 모든 것은 부차적이다. 국가는 과거의 공동체가 아니라 명확한 행동 계획을 가진 미래의 공동체이다.
근대 국가는 ‘일상적인 국민투표’에 있다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의지를 공유하며 거대한 사업을 함께 하고 더 거대한 사업을 추구하는 것이 국민국가 구성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과거는 영광과 회한의 유산을 남기고 미래에는 거대한 사업 계획을 추진한다. 국가의 존재는 일상적인 국민투표에 있다.”
이는 르낭의 말이다.
인간의 삶은 좋든 싫든 끊임없이 미래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국가가 과거와 현재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국가가 공격을 받더라도 아무도 국가를 방어하는 데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는 과거의 매력을 미래에 투영한다. 미래에도 국가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를 방어할 때 적극 동참한다. 이는 혈연이나 언어 또는 공동의 과거 때문이 아니다. 국가를 지키는 것은 어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지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의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은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항하기 위해 연맹을 결성했으며, 또 새로운 연맹의 결성과 해체를 거듭했다. 오늘날 프랑스인과 영국인과 스페인인의 정신은 심리 구조는 동일하고 무엇보다도 내용 면에서도 점진적으로 유사해지고 있다. 또한 그들은 살아가는 데 의지하는 정신적 요소인 종교, 과학, 법, 예술, 사회적ㆍ정서적 가치도 공유한다.
오늘날 우리의 정신 구조(의견, 기준, 욕망, 가정)의 대부분은 프랑스의 것은 프랑스에서 나오고, 스페인의 것은 스페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럽 공동의 구조에서 나왔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정신적 자산의 5분의 4가 유럽의 공동 재산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대륙의 여러 민족 집단이 하나의 거대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결의할 때만 유럽의 맥박이 다시 뛰게 된다. 유럽은 다시 자신을 신뢰하고, 많은 것을 요구하며 자진해서 단련하기 시작할 것이다.
유럽을 거대한 국민국가로 만들자!
오늘날 세계는 심각한 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데,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대중의 봉기다. 그 기원은 유럽의 혼란에서 비롯되었다. 유럽 대륙이 나머지 세계와 자신에 대해 행사하던 권력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유럽은 더 이상 자신이 지배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머지 세계도 지배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인 통치권이 분산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가 세계를 지배할지, 권력이 세계를 어떻게 조직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미지의 방향으로 지평이 다시 펼쳐지고 있다.
이제 유럽인은 거대한 통일 사업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퇴화하고, 느슨해져 정신이 마비된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를 맘껏 누리고 있으면서도 국가 안에 밀폐된 공기 속에서 호흡곤란을 느끼고 있다. 이전에는 국가(nation)가 하늘에서 부는 바람에 모든 것이 열려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의 지방 즉 밀폐된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제 사람들은 삶의 새로운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고 있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 처하자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각국에 ‘민족주의’가 분출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모두 막다른 골목이다. 민족주의는 배타적인 경향을 띠지만 국가 건설 원리는 포용적인 경향을 띤다. 다만 국가가 공고화되는 시기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모든 것이 공고화가 완료된 상태이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일종의 강박관념일 뿐이다.
유럽은 이제 대륙의 여러 민족 집단이 하나의 거대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결의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국가-형성 과정에서 늘 그랬듯이 보수적인 계급은 유럽의 통합에 반대한다. 보수적인 계급은 유럽의 통합이 파국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유럽은 확실히 쇠퇴하여 모든 역사적 동력을 잃을 것이며 또 보다 구체적인 임박한 위험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많은 사람들은 서구 전체가 붉은 물결에 휩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러시아 공산주의는, 전 역사에 걸쳐 개인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유럽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썼다. 이런 두려움은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평정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거듭 말하지만 앞으로 유럽은 볼셰비즘에 크게 열광할 수도 있다. 소비에트 정부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추진하는 ‘5개년 계획’이 기대를 충족하여 러시아 경제상황이 회복되고 나아가 훨씬 번영할 것이라고 상상해보라.
그러나 나는 유럽을 거대한 국민국가로 건설하는 일이야말로 [러시아 공산주의의] ‘5개년 계획’의 성공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업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