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다. 기록이 아닌 평가라는 의미가 더 중요한 역사는 깨진 거울로 기능한다. 깨진 거울에 비추어진 현재의 본질을 파악해야 또 다른 성찰이 시작된다”는 의식으로 역사를 소재로 해서 쓴 극작가 위기훈의 희곡 모음집으로 총 5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갑신의 거〉는 조선 최초의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목표를 둔 정변, 그러나 배척한 청나라 대신 일본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시선 또한 없지 않은 사건, 결국 실패로 끝나 혁명이 아닌 정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갑신정변. 신분제, 연좌제를 타파하고 자주조선이라는 목표를 지향했으나,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야욕에 기대어, 백성 계몽을 등한시 한 정변이라는 역사학자들의 분석.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창작의 동력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주동인 ‘김옥균’의 드라마틱한 인생유전에 기대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역사의 제단〉은 윤봉길이라는 인물로 창작한 것은 저자가 윤봉길에 대해 전혀 다른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름 윤봉길과 매헌이라는 호는 그가 사용한 바 없는 이름이고 호였다. 그의 이름은 봉길이 아닌 ‘윤우의’였고, 그의 호도 매헌이 아닌 ‘남산’이었다. 전 국민이 이름과 호마저 잘못 부르고 있었다. 확인할 수 없었으나 이 역시 또 다른 역사 왜곡의 방편이었는지 모른다. 남산 윤우의의 역사적 거사,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고는 더욱 놀랐다. 이제까지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배경도, 뜻이 세워진 과정도 달랐다. 남산 윤우의라는 청년이 최종까지 경험한 일에 대해 최소한의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아나키스트 단재〉는 신채호의 사상과 삶을 소재로 민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다한 단재의 정신을 기려 희미해진 역사관, 국민의 정체성,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힘을 키우자는 것, 그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 현실은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사실 그대로조차 교과서에서 만날 수 없는 지경이다.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지배정치권력의 입장에 따라 재단되어 왔던 것조차 모르고 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는 무능력하게 차디찬 감옥에서의 죽음을 자처한 슬픈 생의 주인공 신채호. 이 분의 삶을 연극화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단재 신채호 열사의 순국 80주년을 기념하며 “아나키스트 단재”를 가슴 아프게 창작했다.
〈몽양, 1919〉는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다 암살당한 몽양. 여전히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 암살 배후. 그리고 지금 또 다시 반쪽 나라 남한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국론 양극화. 세대 간의 프레임 전쟁. 역사를 돌이켜보면, 국론양극화는 6.25전쟁으로, 6.25는 식민통치에서 주체만 바뀐 독재로 이어졌다. 더구나 지금 일본 역시도 큰 변화의 기점에 있다. 전쟁이 불가능한 나라에서 가능한 나라로서의 법 개정을 추진하며, 일왕이 살아있는 최초로 연호를 바꾸어 시대적 정체성 쇄신을 도모하고 있다. 세계정세 역시 자국이익 우선주의로 급변하는 이 시기에 몽양 여운형을 무대화 하려는 의지는 시대를 직관한 통찰로 읽혀지며 그만큼 성찰을 요구한다. 일반적인 1인 주인공 서사, 영웅스토리가 아닌 대본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무대화를 시도하는 연출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노량격전〉은 조선과 명나라, 왜구들의 상황과, 선조와 명나라 장군 그리고 이순신과 이영남에 대한 희곡이다. 임진왜란에 대해 우리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일본의 왜구들이 쳐들어와 7년 동안 싸운 전쟁으로만 알고 있는가.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외친 이순신 장군만 알고 있지 않은지. 진천의 영웅! 이영남 장군! 그분이 노량해전에 돌아가신 건 알고 있는가?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는 일본과 중국과 한국은? 임진왜란을 통해 한국, 중국, 일본의 속내를 우리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
_ 작가의 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