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들
1672년에 초연한 〈바자제〉는 5막으로 구성된 운문 비극으로, 한 궁정에서 벌어진 사랑과 질투, 배신이 낳은 파국을 그리고 있다. 바자제에게 연정을 품은 황후 록산이 그의 사촌동생인 아탈리드와 바자제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이들 모두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중심 줄거리다. 17세기 배경이지만 이들의 모습은 현대 연인들의 모습 맞닿아 있다.
〈페드르〉는 숙명적 사랑으로 인해 파멸에 이르는 인간의 모습을 아름다운 시로 노래한 작품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와 세네카의 〈히폴리토스〉에서 소재를 가져온 운문 비극으로, 역시 5막으로 구성되었다. 아테네의 왕비인 페드르가 전처의 자식인 이폴리트에게 이룰 수 없는 연정을 품게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 신화와 역사를 토대로 한 비극
같은 시대의 작가 ‘라 브뤼예르’는 라신 작품들을 “한결같다”고 평가하였다. 미학적 완성도를 두고 한 말이지만, 상황과 인물 구조, 주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신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은 다양성이 아니라 동일성이다. 그러나 변화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바자제〉 이후 나타나는 죄의식이 그 변화의 지표다. 이전 작품들은 행복이 불가능한 상황과 무죄한 희생자들을 그렸다면, 〈바자제〉 이후에는 아버지 또는 권력자의 부재 상황이 야기한 혼란과, 생존과 행복을 위해 저지른 기만과 술책, 그리고 그에 따른 죄의식과 실낙원 의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최고의 걸작 〈페드르〉를 상연 후, 라신은 왕의 편사관 자리에 올랐고 카트린 드 로마네와 결혼한다. 이후 희곡은 왕과 비밀 결혼을 했던 맹트농 부인의 청으로 〈에스테르〉와 〈아탈리〉만 집필한다. 구약의 소재를 다루고 있는 이 극들은 맹트농 부인이 가난한 귀족 처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학교에서 그곳 학생들에 의해 상연되었다. 1699년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유언에 따라 어린 시절을 보냈던 포르루아얄에 매장되었다. 그의 삶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실부모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고, 반사회적 집단에서 사회적 성공을 위한 자질을 키웠으며, 왕의 후원을 받으면서 왕의 미움을 받는 집단의 세계관을 형상화하고, 절대 왕정의 화사한 표면 아래 널리 번져 있던 비관주의에 호소하여 얻은 성공으로 아카데미 회원과 궁정인이 되고, 불타 없어질 사료를 쓰기 위해 자신을 불멸케 할 극작을 떠나야 했던 생애였다. 즉 역설로 가득 찬 생애, 조화로울 수 없었던 두 세계 사이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전부를 드러낼 수 없었던 긴장된 생애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은 파란만장했지만, 어쨌든 그는 프랑스 17세기 후반 연극 성황기를 주도했던 인물로, 여전히 17세기를 대표하는 희곡작가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