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물도감 편찬을 시작한 까닭
보리출판사는 1994년 〈달팽이 과학동화〉(모두 50권)에 세밀화를 실은 것을 필두로 1997년 국내 처음으로 오롯이 세밀화로 그린 도감을 펴냈다.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식물 도감》이다. 보리출판사가 우리나라 동식물 세밀화를 개발하고 도감 편찬을 시작한 까닭은 아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교육의 기초 정보이고, 아이들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 수 있도록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으로 나아가는 길에 징검다리를 놓자는 뜻에서였다.
도감은 동식물을 글, 사진, 세밀화, 표본 따위로 기록해 이를 여러 방면에서 두루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세밀화로 도감을 엮는 일은 기초 과학을 다지고 우리 생명 자원을 기록하고 보전하는 일로써 나라에서 뒷받침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다. 훗날 이 땅에 어떤 동식물이 살았는지 어떻게 동식물을 이용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연구 자원이기도 하다.
요즘은 사진 도감뿐 아니라 세밀화 도감들도 나오면서 도감의 지평이 넓어졌다. 하지만 보리처럼 작은 출판사가 이렇게 30년 가까이 세밀화로 도감을 펴내는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다. 영국, 미국, 호주, 남아공, 체코와 같은 유럽 여러 나라와 가까이 일본 같은 나라가 국가적 차원에서 어류, 조류, 약초를 비롯해 세밀화로 동식물 도감을 만들어 온 전통에 견주어보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세밀화로 도감을 만드는 까닭
오랜 시간과 많은 개발비와 품이 드는 세밀화를 굳이 고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리 정밀한 사진기라도 사람 눈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세밀화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눈’, 곧 ‘사람의 눈’으로 자세히 보고 ‘사람의 손끝으로 정확한 정보를 섬세하게 그려낸 그림이기 때문이다. 세밀화는 기교보다 정성이다. 사람 눈으로 오랫동안 관찰하고 정성을 다해 자세히 그리기 때문에 생명체가 지닌 생기를 그대로 그려내면서 따뜻한 감성까지 담아낼 수 있다.
또한 세밀화 한 장에는 생명체에 대한 무수한 정보를 담을 수 있다. 세밀화는 생물분류학이나 동식물을 이용한 의학과 같은 응용학문에서 동식물을 좀 더 쉽고 분명하게 구분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세밀화는 생명체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할뿐더러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살아 있는 예술 작품이기도 하다.
|여느 도감과 다른 까닭
처음 세밀화 작업을 시작할 때 참고할 수 있는 국내 자료가 거의 없었다. 책에 담을 동식물은 우리나라에 사는 종인데도 참고할 자료는 유럽, 미국, 일본 자료가 다수였다. 우리 것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온 나라 산과 들로 바다로 돌아다니며 직접 사진을 찍고 취재하는 길밖에 없었다. 보리 세밀화는 발로 뛰면서 하나하나 취재한 결과다. 그래서 세밀화마다 언제 어디서 채집했는지 밝혀 두어 사는 곳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분류학, 생태학 같은 광범위한 연구 성과와 생물 표본 같은 밑 자료도 필요했다. 전국 각지에 있는 다양한 연구소, 박물관, 수목원, 동물원뿐만 아니라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을 오랫동안 해온 어른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분들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하고 풍성한 생태 정보와 더불어 우리 겨레의 삶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살림’ 관점에서 엮을 수 있었다. ‘살림’은 함께 살기, 자연도 살고 사람도 더불어 같이 사는 것을 뜻한다. 은행나무는사람이 곁에 심어서 가꾸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벼, 곡식, 나물로 먹는 것들도 사람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다른 풀들과 섞여 자라다 보면 경쟁에서 밀려서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보리 세밀화 도감은 기본 정보인 생김새와 생태 특징뿐 아니라 취재하면서 구술 받은 다양한 개체 정보, 살림살이, 역사도 두루 담아 백과사전처럼 볼 수 있다. 이것이 여느 도감과 다른 점이다.
|세밀화 도감 한 권을 만들기까지
동식물 세밀화 한 점을 완성하는 데 드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기획에서부터 자료를 수집하는 사전 작업은 제쳐두고, 오직 강아지풀 하나를 그린다고 했을 때 화가가 하루 8시간을 꼬박 그려도 3주 넘게 걸린다. 여기에 글을 써서 다듬고 그림과 글을 전문 학자에게 감수를 받아 고치고 편집하는 과정을 거치면 도감 한 권을 만드는 데 적게는 5년에서 많게는 7년까지 걸린다. 이렇게 오랜 시간 끈질지게 한 출판사나 한 작가가 세밀화 도감을 낸 경우는 온 세계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들다. 한두 권이 아니라 보리 세밀화 도감처럼 종합하여 또는 분야별로 연속적으로 내는 경우도 없다. 보리출판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일이라 믿고 뚝심 있게 외길을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