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풍파 속에서 민중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그러나 영감 할미는 거기에 무슨 말이 씌어 있는지 알 까닭이 없다. 그저 흰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잔가 싶을 따름이었다. 하나 영감 할미는 그것을 얼마나 신기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지 몰랐다. 영감은 그 종이 한 장을 어제 산마루에서 주은 쇠붙이와 함께 품 안에 고이 간직했다.
“참 이상한 일도 많제? 어제는 보자…… 뭐라 캤지?”
“또 잊어먹었구나. 놋쇠 아니가 놋쇠. 멍텅구리야.”
“그래 맞았어, 놋쇠, 놋쇠를 주웠고, 오늘은 또 종이가 하늘에서 날라오고…….”
_「산중우화」 중에서
깊디깊은 산골에 사는 ‘영감’과 ‘할미’는 어느 날 산마루에서 탄환을 발견한다. 탄환이 무엇인지 모르는 두 사람은 그저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볼 뿐이다. 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우르릉우르릉 하는 전쟁의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들은 알 수가 없다. ‘폭격 예정 안내문’도 발견하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두 사람은 그 종이를 벽에 붙인다.
결국 폭격에 의해 ‘할미’는 참혹하게 죽고, ‘영감’은 그 어떠한 애도나 추모 없이 할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에 분노한다.
하근찬은 전쟁에 직접 참여한 인물들을 다룰 뿐만 아니라, 이처럼 전쟁의 바깥에서,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당시 인물들의 삶에 주목하기도 한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전쟁의 영향이 그들의 삶 속에 어느 순간 훅 하고 들어와 그 삶이 통째로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잔혹함 속에 있지 않았던 ‘할미’가 참혹한 시체가 되어 ‘영감’ 앞에 나타나 두 인물의 삶이 부서진 것처럼.
민중의 삶에 주목한 소설가 하근찬, 전쟁의 주변을 세세히 살피다
2021년에 ‘하근찬 전집’ 발간의 첫 시작을 알리는 『수난이대』 외 4종이 발간된 후, 2022년 11월에 하근찬의 소설, 중단편집 제5권 『낙도』, 제6권 『기울어지는 강』, 제7권 『삽미의 비』과 장편 제11권 『월례소전』이 2차분으로 발간된다.
2차분으로 발간되는 작품 속에서 하근찬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주변인들의 모습 그리고 삶과 시대의 풍랑 속에서 고통받는 여성의 이야기, 전쟁의 주변, 바깥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세세하게 증언하듯 그려내고 있다.
제5권 『낙도』에서는 1년 5개월 만에 어렵게 일자리를 얻었지만 병역 기피자 대상 예비역 훈련 소집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명구’, 특정 학생에게 특혜를 주고자 하는 학교의 처사에 저항하는 교사 ‘혜영’ 등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자본 권력이 만들어놓은 기형적 사회 구조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으며, 제6권 『기울어지는 강』에서는 시골을 등지고 무조건 도시로 향했다가 녹록지 않은 서울 생활로 인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는 ‘병태’ 등의 인물들을 통해 전쟁을 다루지 않으면서 70년대의 소시민의 삶을 그린다.
또 제7권 『삽미의 비』에서는 시인 ‘남궁’ 씨가 경험한 소소한 일화를 통해 1970년대 산업화 사회의 그늘을 가시화하는 청년의 사연을 드러내기도 하며, 제11권 장편 『월례소전』에서는 ‘월례’라는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며 일제강점기 등 혼란했던 사회 속에서 고통받았던 여성들의 삶을 통찰한다.
잊혀지고 배제된 존재들을 기록하는 하근찬의 시선
하근찬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망각된 존재들의 복원된 목소리와 본인의 경험을 중첩시켜 더 큰 파동을 만들며, 그 파동은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계속해서 공명할 것이다.
하근찬은 당대 민중들의 삶 속에서 국가가 어떻게 ‘잉여적인 존재’들의 삶을 배제해왔는지 그려내고 있으며, 역사에서 지워지는 주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식민지 말기를 다루면서 식민지배로 인해 고통받았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하근찬 문학전집 간행위원회가 “한 작가의 문학적 평가는 전집이 간행되었을 때 비로소 그 발판이 마련된다”고 언급한 것처럼, 향토성 짙은 하근찬의 작품을 그의 고향인 영천의 사투리를 살려 발간한 〈하근찬 문학전집〉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의의를 더욱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제5권 『낙도』는 최슬기 문학연구자가, 제6권 『기울어지는 강』은 신현아 문학연구자가, 제7권 『삽미의 비』는 전소영 문학평론가가, 제11권 『월례소전』은 서승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각 작품의 해설 작업에 참여하여 하근찬 문학의 현재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