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섭의 시집 「플라스틱 인간」에 수록된 시들을 읽으며 우리는 그가 집중하는 주제의 넓이와 깊이에 감탄하였다. 특히 「플라스틱 인간」이나 「사랑의 접선방정식」 또는 「몽돌붓다」 등에서 시인이 지향하는 핵심 가치를 확인하였다. 독자들이 ‘인간’과 ‘사랑’ 그리고 ‘원(圓)’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친절을 위한 기회가 있다.(Wherever there is a human being, there is an opportunity for a kindness.)”라고 이야기하였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에 의하면 “사랑은 지배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장한다.(Love does not dominate; it cultivates.)” 또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에 따르면 “원은 영혼과 같아서 끝나지 않고 멈추지 않고 빙글빙글 돈다.(Circles, like the soul, are neverending and turn round and round without a stop.)”
어렴풋이 몇 대째인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유전자
몸속에는 플라스틱 피가 흐르고 있어
플라스틱 자궁에서 플라스틱 탯줄을 달고 태어나
플라스틱 인간으로 살아왔어
눈물도 모르는 플라스틱 여자 차가운 성질의 플라스틱 남자
열 받으면 녹아내리는 플라스틱 사랑으로
세상에 툭 던져놓은 원치 않는 플라스틱 아이는
플라스틱 우유를 먹고 플라스틱 성장호르몬으로 자라나
플라스틱 비행기에 몸을 싣고
플라스틱 찬란한 도시로 유학을 떠나지
버림받을 걸 알면서 껌딱지처럼 달라붙는
플라스틱 여자 플라스틱 남자
감각이 없는 플라스틱 사랑은 구름 속에 모여 검은 파티를 하지
하늘을 날아다니며 플라스틱 비를 뿌리고
플라스틱 초록바다에 꼬리 흔들며 헤엄쳐가는 플라스틱 물고기
파도가 밀려오면 지칠 줄 모르고
뼛가루가 스밀 때까지 갯바위에 살을 부비는
플라스틱 사랑은 죽지도 않아
흔적 없이 떠나는 차가운 이별 얼음 유전자로 바꾸고 싶어
45억 년 전 빙하기 그리운
내일 아침은 또 플라스틱 칵테일
-「플라스틱 인간」 전문
“플라스틱”의, “플라스틱”에 의한, “플라스틱”을 위한 시가 여기에 있다. ‘플라스틱’이 미치는 범위는 “피”, “자궁”, “탯줄”, “인간”, “여자”, “남자”, “사랑”, “아이”, “우유”, “성장호르몬”, “비행기”, “비”, “초록바다”, “물고기”, “칵테일” 등 매우 광활하다. 최순섭은 여기에서 열이나 압력으로 소성 변형을 시켜 성형할 수 있는 고분자 화합물로서의 플라스틱을 광범위하게 도입한다. 그는 ‘현대 사회’ 또는 ‘21세기’의 본질을 탐구한다. 시인은 “45억 년 전”부터 시작된 ‘지구’의 역사에서 “유전자”의 지속을 원하는 ‘인간’의 눈물겨운 ‘사랑’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최순섭의 이 시는 김종삼 시인이 시 「나」에서 “망가져 가는 저질 플라스틱 臨時 人間”이라는 어구를 제시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곧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시가 여기에 있다.
최순섭은 ‘친절’을 실천하는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믿는다. 그가 신뢰하는 인간은 성장하는 가치로서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긴다.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통제하려는 사람은 사랑의 핵심을 모르는 셈이다. 타인에게 친절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에게 허락된 가치가 사랑이다. 시인은 빙글빙글 도는 원과 같이 쉼 없이 자라는 사랑을 지향한다. 그의 바람처럼 친절과 사랑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늘어날 때, 우리는 더욱 건강하고 아름다운 한국 사회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와 역사를 향해 작동할 최순섭의 예민한 시적 촉수를 기대한다.
-권온(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