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만 시인은 기존에 있던 것을 지금 생겨난 것같이 새롭게 현현하는 사유의 전달 방식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홀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시적 향기를 축출하여 언어적 파장을 주기 위함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존재의 고유한 향기를 언어로 덧붙이는 데 있으며 우리가 아는 기왕의 인식을 넘어서 존재 본연을 겨냥한다. 이로써 사물을 통해 세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성의 세계를 보편적인 언어로, 추상적인 세계를 명료한 언어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한다.
무엇보다 그에게 집중되어 있는 세계관은 다름을 인식하는 것도,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일원론적인 것에 기인하는데 처음과 끝이 구별되지 않는 동양적인 사유 체제에서 비롯된다. “동양사상은 다른 것, 곧 실재하면서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혐오를 저지르지 않았다. 서양은 이것 아니면 저것인 세계이지만, 동양은 이것과 저것 심지어는 이것이 저것인 세계이다.”(옥타비오 빠스, 김현창 역, 『옥타비오 빠스-시와 산문』, 민음사, 1990, 225쪽.) 이를테면 처음과 마지막의 구분이 없고 그것이 연장선에서 있을 때 마지막이 처음이고 처음이 마지막이 된다. 처음에서 마지막이 나온다는 해석은 그의 시에서 마지막에서 처음이 연원하는 것처럼 편철되어 있거나, 처음과 마지막은 처음부터 우열이 없는 하나의 의미일 뿐이다.
아래 시편「만남」과 「마침내 피워낸 꽃처럼」은 이 시집의 ‘마지막 시’와 ‘첫 시’다. 이처럼 내용으로 보아 ‘만남’이 있고, ‘결실’이 있어야 하는 데 반대로 결실을 먼저 만남을 나중에 배치하는 것이다. 이 두 편의 시의 배열처럼 그의 시는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으로서 이것과 저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과 저것이 구별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실재하는 모든 것이 처음이자 끝이기 때문에 그의 시작에서 만나는 존재적 사유는「나무를 우러르며」에서 명확해진다. 처음과 끝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닌 깊이와 연결되어 심연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나무의 저 높은 우듬지를 우러르며/뿌리의 깊이를 생각한다./하늘을 향해 치솟는 저 결기는/ 결국 땅속을 얼마나 깊이/파고드는가와 직결되어 있을 터”와 같다. 마찬가지로 그의 시편에서 마주하는 사물들은 길고 짧고, 크고 작고, 많고 적고 등 ‘단층적 표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 심연’에 가 닿고 있다.
숲길을 거닐 때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참나무
나를 위해 기도하는 멧새
나를 위해 기도하는 풀잎
나를 위해 기도하는 그를 만났다.
오늘은 평생을 나와 함께 걸었던
그의 연약한 뒷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그를 살포시 껴안아 주고는
십자가 앞에 꿇어앉은 그를 일으켜 세워
나의 식탁으로 모시고
보림사 큰스님이 손수 덖어 보낸
우전차를 그에게 대접했다.
그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낯설지 않은 듯 나에게 미소를 보냈다.
너무도 멀고 너무도 가까웠던
나와 그는
참으로 오랜 시간의 숲길에서
서로를 향해 걷고 있음을 알았다.
- 「만났다」전문
그의 많은 시편들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로 시작되고 있지만 우선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여기서 자신은 자기(Self)와 자아(ego)를 대상으로 하는데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나와 그’를 통해 만나게 한다. “너무도 멀고 너무도 가까웠던” 나로부터 세계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나와 함께 걸었던” 세계로부터 내가 열려 있다는 것, 그러므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숲길을 거닐 때마다/나를 위해 기도하는 참나무/나를 위해 기도하는 멧새/나를 위해 기도하는 풀잎/나를 위해 기도하는 그를 만났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에 모든 존재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감사함을 깨닫게 하는, 상황적 역설을 보인다. 또한 ‘십자가 앞에 꿇어앉은 그를 일으켜 세워 보림사 큰스님이 손수 덖어 보낸 우전차를 대접’하는 등 다원적이고 초월적인 종교관을 함의하고 있다.
허형만 삶의 태도를 관통하는 이 시는 이번 시집의 마지막에서 앞에 놓인 시편들의 전체 하중을 견디면서 시인의 세계관을 페이소스하고 있다. 그에게 시는 한결같이 마지막이면서 처음이라는 사실을 “아침밥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며, 이게 마지막일 걸, 생각한다. 허긴, 아침밥을 먹으며 이게 마지막 밥이지 아마, 생각했었다. 커피를 마시고 책상에 앉아 원고를 손질하며, 이게 마지막 작품일 걸, 하며 끙끙”(「한 생은 또 그렇게 견디고」)거리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