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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과 만변 거젠슝, 중국사를 말하다

불변과 만변 거젠슝, 중국사를 말하다

  • 거젠슝
  • |
  • 역사산책
  • |
  • 2022-10-15 출간
  • |
  • 452페이지
  • |
  • 152 X 225 mm
  • |
  • ISBN 9791190429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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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맺음말]

우리는 중국의 역사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세계 몇 대 문명 중에서 중국 문명은 가장 일찍 발생했다고 말할 수 없다. 중국의 갑골문은 지금부터 3,700년 전에 출현했으므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의 고문자 중에서 최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중국인이 갑골문을 사용한 이후 계속 전해진 한자로 역사를 기록한 전통은 거의 중단된 적이 없다. 이런 점에서 중국 문명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임이 확실하다. 다른 문명을 살펴보면 어떤 곳은 역사 기록이 아주 일찍 중단되었고 어떤 곳은 문자가 일찍이 죽은 문자가 되었지만, 중국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역사서를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십사사(二十四史)’의 분량은 3,300권 2,400만 자에 달하고 『자치통감』은 294권 300여만 자에 달한다. 이외에도 분량이 아주 큰 역사서가 매우 많은데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왜 고대 화하(華夏) 사람들은 역사를 중시했을까? 한 가지 학설이 있다. “그 나라를 멸망시키려면 먼저 그 역사를 없애라.” 나는 일찍이 우리 대학원생들과 이 문제를 토론한 적이 있다. 어떤 학생은 역사서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 역사서를 훼손하거나 전승을 끊어버린다고 설마 국가가 멸망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명확한 인식을 갖지 못했다. 역사서가 없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조사하고 연구한 뒤 다시 역사를 쓸 수 있다.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보자. 역사 기록이 없으면 물론 큰 손실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어찌 국가가 멸망할 수 있겠는가?
그 학생은 중국의 최초 역사서 및 그로부터 형성된 전통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기실 최초의 역사 기록은 후세 사람이 보라고 쓴 것이 결코 아니며 또 오늘날 우리 역사 연구자나 역사 이해자를 위해 제공된 자료가 아니었다. 그렇게 막대한 정력을 써서 전문적인 사관이 역사를 기록한 목적은 하늘, 신, 조상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갑골문 중에서 많은 내용은 무당이 기록한 것이고 오직 무당만이 하늘, 신, 조상과 소통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기록한 일은 하늘만이 알 수 있었고 하늘의 뜻도 오직 그들의 기록을 통하거나 점술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었다. 후대로 오면서 기록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무당은 그 모든 일을 기록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비로소 기록을 전담하는 ‘사(史)’가 분화되어 나왔다.
‘사(史)’는 상형문자로 사람이 서서 손에 기록을 위한 목판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이것이 바로 ‘사(史)’, 즉 ‘사관(史官)’이다. 소위 역사(歷史)의 ‘역(歷, 력曆과 통용)’은 바로 역법으로 시간에 따라 사건을 기록한다는 뜻이다.
일찍이 춘추시대에 통치자 신변에는 사관이 하나에 그치지 않고 기본적으로 업무를 나눠서 “좌사(左史)는 말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일을 기록했다”라는 설이 있었다. 기록한 내용은 군주 자신이 볼 수 없고 밀봉한 상자에 넣어뒀다가 군주가 죽거나 퇴위하면 비로소 대중에게 공개했다. 그 뒤에는 축적한 원시 기록에 근거해 역사서 1부를 완성했다. 예를 들어 공자가 편찬한 『춘추』는 바로 춘추시대 노나라 역사다. 각국의 역사서는 서로 상이한 명칭이 있었는데 노나라에서는 『춘추』로 불렀다.
이러한 기록은 공문서 기록관에 보존하거나 후인에게 남기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관의 기록을 통해 하늘에 보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흔히 융숭한 의식을 거행하고 기록물을 불태우며 하늘에 보고하기도 했다. 때로는 높은 산에서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산 위가 하늘에 가까워서 하늘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으로 여겼다. 지금의 쑹산(嵩山) 정상에서 일찍이 무측천이 그곳에 묻은 금책(金冊)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한 유물이다. 따라서 사관은 하늘, 신, 조상에 게 보고할 책임을 졌다. 군주나 통치자의 언론과 행위를 기록해 그들의 언행이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지, 그리하여 하늘, 신, 조상의 보우를 얻을 수 있는지 비춰보았다.

(생략)

이들은 청나라가 이미 이민족 정권이 아니라 화하의 전통적 가치관을 계승하고 천명을 얻은 정통 왕조라고 인식했다. 즉 청나라가 이전의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역사서가 사라지면 국가도 멸망하는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역사서는 정권과 국가의 정치적 합법성을 증명하고 천명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서가 단절되면 정권과 국가의 정치적 합법성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요점이다.
이러한 역사서가 오늘날에는 필요 없을까? 우리 생각과는 달리 매우 쓸모 있다. 어떤 역사서든 후인들이 이미 발생한 사건을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기록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원리를 알면 사료 가운데서 표면을 뚫고 내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역사에 대한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옛 역사를 해석하고 인식할 수 있다. 하물며 이러한 역사서에 진귀한 원시자료가 다량 보존되어 있어서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음에랴!
이밖에도 역사서는 오늘날 역사를 연구하고 복원하고 재구성하려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조건과 풍부한 도전성을 제공해준다. 이러한 과정도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고 선택하고 인식하고 학습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중국의 역사서는 선인이 후대에 남긴 매우 귀중하면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산이므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국의 정사(正史) ‘이십오사(二十五史)’는 전체 분량이 모두 2,730만 자를 넘는다. 이를 완독하려면 하루에 8만 자를 읽는다고 해도 1년이 넘게 걸린다. 따라서 중국 역사의 특징을 명확하게 인식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복잡다기한 중국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 이미 다양한 도서가 출간되어 있다. 왕조 교체의 시간 순서에 따라 하(夏), 상(商), 주(周)에서 원(元), 명(明), 청(淸)에 이르는 역사를 기전체(紀傳體)식으로 정리한 책이 있는가 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문학, 예술, 제도 등의 영역을 분야별로 정리한 미시사(微視史) 저작도 출간되어 있다.
그런데 거젠슝(葛劍雄)의 이 저서는 위와 같은 기존의 역사 서술 방법과는 달리 땅과 인간과 정신의 어울림이야말로 역사의 주요 얼개라는 독특한 관점에 근거해 이와 연관된 키워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 서술 방법을 선보이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특히 중국 고대 지리와 인구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만큼 이러한 얼개는 전문성과 대중성을 융합하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땅을 다루면서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출현한 ‘중국(中國)’이라는 어휘의 의미가 확대되어온 과정을 서술한 뒤 각 왕조의 강역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밝히고 이에 수반해 중국의 역대 행정 구역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변모해왔는지 드러냈다. 또한 중국 각 왕조 도성과 식량 수급 문제의 밀접한 연관성을 밝혔으며, 이어서 만리장성, 운하, 치도, 역참에 얽힌 난관, 사회적 장단점, 부패 상황, 유관 일화 등을 흥미롭게 서술했다.
아울러 저자는 중국 땅에서 역사를 일궈온 중국인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며 이민, 인구, 인물, 외교 등을 주제로 그들의 활동 양상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의 이주 과정을 서술하면서 현재 쓰촨, 윈난, 구이저우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의 선조가 후베이 마청 샤오간향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점, 또 지금의 화베이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조가 산시(山西) 훙동 다화이수 아래에서 왔다고 하는 점 등 중국 고대인의 이주와 관련된 서사를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이는 정사의 이면에 묻혀 있던 중국인의 이주사를 생생하게 복원한 내용이라고 할 만하다. 또 당나라 때는 과부의 개가를 자유롭게 허용하다가 송나라 이후로 과부의 수절을 강조한 것은 유가의 이념보다 인구의 포화 상태 때문이라고 주장한 부분도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중국 정사에서 “수렵을 나갔다[狩]”로 기록한 역사의 이면에는 기실 천자가 외부 세력에 의해 치욕을 당한 역사의 실상이 숨어 있음을 밝힌 부분, 또 명나라 청백리 해서(海瑞)를 통해 관리 사회의 부패상을 드러낸 단락, 비정규 관리인 막료 왕이(王二)를 통해 중국 명·청 시대의 기형적인 관리 제도를 폭로한 대목도 매우 신선하다.
이어서 저자는 고대 중국의 정신적 중추라는 제목 아래 ‘천하’와 ‘제왕’이란 주제를 잡고 중국의 통일을 추구하고 유지해온 관념과 제도의 특징을 논술했다. 그중에서도 장평대전(長平大戰) 이후 수십만 명을 생매장해서 죽인 대학살의 주요 원인이 군량미 부족 때문이었다고 주장한 점, 초한 쟁패시기에 유방이 함양을 점령하고 포고 했다는 ‘약법삼장(約法三章)’이 기실 허구적인 선언에 불과했음을 논단한 점 등도 일반 독자의 역사 상식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견해라 할 만하다. 그리고 황제의 사생활을 다루는 마지막 장에서는 태자, 황후, 태상황, 종실, 능묘를 키워드로 화려한 황실 이면에 묻힌 인간 군상의 비극적 실상을 핍진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중국 관방에서 정사로 인정하는 역사서의 가식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이미 앞에서 저자는 역대 사관(史官)들이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준거로 정사를 편찬할 때 객관적 역사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보다 집권 세력의 가치관을 선양하기 위해 일차 사료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분식했음을 논술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이런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중국 역대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의 사례를 인용해 지금의 『구당서』와 『신당서』에 실린 ‘현무문의 변’의 진실이 당 태종의 정치적 욕망과 의도에 의해 왜곡되고 분식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증명하고 있다. 그는 맺음말에서도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역사서든 후인들이 이미 발생한 사건을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기록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원리를 알면 사료 가운데서 표면을 뚫고 내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역사에 대한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옛 역사를 해석하고 인식할 수 있다.
저자 거젠슝은 이러한 입장에 서 있으므로 중국 역사의 견고한 껍질을 뚫고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밝혀내는 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이러한 관점은 그의 이 저서를 읽는 우리의 입장에서도 똑같이 견지해야 할 관점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다루는 중국 역사는 중국 사관(史官)의 관점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기록일 뿐만 아니라 저자 거젠슝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렇게 형성된 중국 역사관에 의해 영향 받은 중국 역사학자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저자는 중국 고대의 강역을 설명하면서 “한(漢)나라의 강역이 동쪽으로 오늘날 한반도 북부와 중부까지 포괄했고, 여기에는 한국의 수도 서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중국 측의 일방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한나라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일은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지만 한사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둘러싸고 현재 한반도 이남과 이북의 역사학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을 이 짧은 「후기(後記)」에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논쟁의 대상이 되고 주제를 확정적이고 일반적인 견해로 진술하는 것은 진정한 역사학자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또 저자는 북위 효문제의 한화(漢化) 정책을 거론하는 가운데 효 문제가 “자각적으로 한족과 융화하기 위한 중대 개혁을 단행했고 마침내 찬란한 성과를 거뒀다”라고 찬양했지만, 중국 소수민족 입장에서는 자기 문화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스스로 폐기한 굴욕적인 조치로 인식할 수도 있다. 이는 소수민족의 다양성과 고유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중국 정부의 정책이 사실은 매우 은밀하고 패권적인 동화 정책임을 드러내는 언설인 셈이다. 이는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 유지에도 반하는 논리다.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면 해외 화교도 중국 언어와 중국 문화를 유지하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현지인으로 동화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저자는 한 고조 유방, 후한 광무제 유수, 송 태조 조광윤 등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와의 신의조차 내팽개친 일을 천하 통일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리화하고 있다. 정의와 진리를 숭상해야 할 학계에까지 패권주의적 논리가 깊이 스며 있으니 우려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5천 년 역사 동안 중국과 이웃해서 살았고 앞으로도 이웃으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 거젠슝이 보여주고 있는 사관을 우리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소화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가 기존 사료의 표면을 뚫고 역사의 내면을 생생하게 분석해내는 것처럼 우리도 그가 지은 이 책의 표면을 뚫고 그 내면에 잠복해 있는 인식과 의도를 간파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위에서 분석한 이 책의 장단점은 모두 우리에게 유용한 타산지석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목차


제1편 고대 중국의 뼈대

이끄는 말 ‘중국’이란 두 글자는 3천 년 전에 출현했다 10

제1장 강역 _ 중국인이 생활하는 땅
제1절 ‘거대한 구주[大九州]’와 ‘한 자 길이 방망이[一尺之?]’ 18
제2절 고대 중국은 도대체 얼마나 컸나? 26
제3절 고대 중국의 강역은 어떻게 변화했나? 33
제4절 고대 중앙정부는 어떻게 주요 행정 구역을 나눴나? 42

제2장 도시 _ 몇 차례 변화를 겪은 도성
제1절 한나라의 장안과 낙양 50
제2절 북위 효문제의 천도와 한족화 58
제3절 수·당 시대의 양도 66
제4절 명나라의 양경 병행 75

제3장 건설 _ 토지의 연결과 분리
제1절 장성은 군사 방어용으로만 세운 것이 아니다 83
제2절 식량 공급의 생명선, 운하 91
제3절 고대의 교통 시스템, 치도 99
제4절 부패에 의해 ‘잠식된’ 역참 106


제2편 고대 중국의 혈육

이끄는 말 본적과 출생지: 당신은 어디 사람이오? 116

제4장 이주 _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에 머무나?
제1절 고향은 어디인가? 이주의 출발지 125
제2절 이주민의 영향을 깊게 받은 도성 문화 구조 133
제3절 강호의 남쪽 이주와 오호의 중원 교란 141
제4절 유목 부족의 북방 이주와 흉노의 남하 약탈 149
제5절 고대인은 왜 이주해야 했나? 157

제5장 인구 _ 정책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인구수
제1절 고대 중국의 인구는 도대체 얼마였나? 166
제2절 정절 관념과 당나라의 과부 개가 174
제3절 송나라 호구 자료에는 왜 호구당 평균 인구가 3명에 미치지 못했을까? 182
제4절 명나라 호적제도와 10년 뒤 호적부를 미리 편집한 일 189

제6장 인물 _ 인간이 ‘주조’한 시대 현상
제1절 공자: 역대 통치자들이 긍정한 ‘춘추필법’ 198
제2절 복생: 문화의 보호자 겸 계승자 206
제3절 해서: 왜 해서 한 사람만 청백리가 되었나? 214
제4절 왕이: 비정규 막료가 정식 관리를 통솔한 특이한 현상 224
제5절 연영: “위에는 정책이 있고,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 234

제7장 외교 _ “외국인 입국은 허용하면서도 중국인 출국은 불허하고, 중국에 온 외국인에게는 중국 문화를 전하면서도 중국인을 외국에 보내 문화를 전파하지 않은” 고대인
제1절 ‘개방’을 했으면서도 눈앞의 좋은 기회를 놓친 한나라 242
제2절 고대 중국의 대외 영향은 어떠했나? 249
제3절 당나라 장안은 세계의 중심이었나? 258


제3편 고대 중국의 정신 중추

이끄는 말 영명한 개국 황제는 왜 폭군이 되기도 하나? 268

제8장 천하 _ 천하를 얻음과 천하를 다스림
제1절 호복 입고 말 위에서 활쏘기 그리고 기병 시대 276
제2절 중국 고대의 대규모 학살, 장평 전투 285
제3절 진시황과 표준화 정책 293
제4절 항우는 초·한 쟁패의 실패자인가? 300
제5절 유방이 백성에게 반포한 ‘약법삼장’은 믿을 만한가? 314
제6절 ‘추은령’ 배후의 정치적 지혜 321
제7절 최초로 ‘중앙에서 파견한 순시 제도’ 328
제8절 유수는 어떻게 한나라를 연장할 수 있었나? 335
제9절 조광윤의 송나라는 어떻게 오대를 끝냈나? 347
제10절 송나라 때는 왜 군사 정변이 드물었나? 356
제11절 애산 이후에는 중국이 없는가? 364

제9장 제왕 _ 황제의 사생활
제1절 태자: 가장 결정하기 어려운 황실 구성원 374
제2절 황후: 황제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 382
제3절 태상황: 황궁 안의 ‘유명무실한 직위’ 390
제4절 종실: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산 황실 친척 399
제5절 사후의 일: ‘죽음을 삶처럼 여기는’ 관념의 전승 407
제6절 기록: 역사서의 ‘공식 판본’ 415

맺음말 우리는 중국의 역사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426

옮긴이의 말 436

찾아보기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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