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은 항상 올바른가?
왜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은 위험한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이나 철학을 가리킨다. 이 사회적 약자에는 여성, 장애인, 빈곤층, 흑인 등이 포함되며, 이들에 대한 언어적 차별과 모욕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자신이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무대로 만들어 “누가 더 도덕과 정의에 충실한 사람인가?”를 겨루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도덕과 정의의 화신인 양 여길 수 있게끔 그런 담론을 끊임없이 구사한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의 동력이 된다. 정치적 쟁점이 도덕과 정의의 문제가 될수록 사람들이 그 쟁점에서 타협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도덕과 정의는 얼른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질 정도로 과장되면 끝없는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만다.
그러니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이 위험하듯이 자기과시를 위한 PC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념적 순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음이 잘 맞는 진보주의자들과 수다를 떠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들이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군가 도덕적으로 시간당 최저임금이 15달러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20달러로 제도화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신경을 쓰는 것 아니냐고 할 것이고, 이런 식의 논의가 진행되다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누가 더 경쟁 집단의 견해를 공격하고 경멸하는 데에 유능한가?”를 겨루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강준만의 『정치적 올바름』에서는 PC를 둘러싼 찬반 논쟁과 논란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양쪽의 소통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소통과 화해는 인기가 없는 주제지만, 그렇다고 모두 양극화 선동가들에게 놀아날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저자는 PC의 3대 쟁점을 탐구함으로써 이 논쟁의 원활한 소통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 3대 쟁점은 자유, 위선, 계급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PC 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인가?
1980년대에 미국 각지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PC는 ‘소수자의 인권 보호 프로그램’으로 성 차별적·인종차별적 표현을 시정하는 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PC 운동은 나이에 대한 차별,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차별, 외모에 대한 차별, 신체의 능력에 대한 차별 등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PC 운동은 전통이나 관습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이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수 지식인들은 주로 출판 활동 등을 통해 PC 운동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점을 중심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급기야 PC 반대자들은 이 운동에 반대하거나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라는 딱지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며, ‘새로운 매카시즘’이라고 비난했다. 또 이 운동을 ‘나치돌격대의 사상 통제 운동’, ‘AIDS만큼 치명적인 이데올로기 바이러스’ 등과 같은 비난과 함께 PC 운동가들을 ‘언어 경찰’이나 ‘사상 경찰’로 비난했다.
PC의 3대 쟁점은 자유, 위선,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갈등의 문제다. PC 논쟁은 소극적 자유도 적극적 자유도 아닌 제3의 자유인 ‘비지배 상태’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자유’를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논쟁을 선행할 때에 생산적인 국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둘째, ‘말과 행동의 괴리’로 인한 갈등이다. 엘리트 계급의 언행 불일치로 인해 냉소주의가 확산된 가운데 PC는 단지 말뿐인 위선의 제도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으나, 문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의 위선에 의해 부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셋째,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의 갈등의 문제다. PC 운동이 기반하고 있는 ‘정체성 정치’는 사회 전체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상당한 장애가 될 수 있지만, 문제는 정체성 정치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온 빈부격차 문제에 전혀 대처하지 못한 계급 정치의 실패와 그런 실패에도 이론적 수준에서 여전히 계급 이외의 이슈 제기를 적대시한 계급 정치의 독선과 오만으로 인해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싸이의 ‘흠뻑쇼’ 논쟁이 뜨거웠는가?
PC 논쟁은 ‘도덕적 우월감’의 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이는 “진보가 보여주는 꼴불견 중에 하나가 도덕적 우월의식이다”는 상식과 상통한다. 도덕적 우월감이 없는, 상대편이 그런 의심조차 할 수 없게끔 도덕적 우월감이 완전히 배제된 문제 제기는 가능한가? 타인에 대한 훈계는 아닐망정 계몽의 재미조차 박탈된 PC 언어가 가능할 것인지 그것이 쟁점이 될 수도 있다. 싸이의 ‘흠뻑쇼’ 논쟁은 이른바 ‘슬랙티비즘’을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했다. ‘게으른 사람’과 ‘행동주의’의 합성어인 슬랙티비즘은 시민 참여나 집단행동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등장한 말로, 지식인들 사이에 열띤 쟁점이 되고 있다.
슬랙티비즘은 온라인 공간에서 치열한 토론을 벌이면서도 막상 실질적인 정치·사회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네티즌을 비꼬는 말로도 쓰이지만, 중립적으로 보자면 사람들이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분명한 의사를 가지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주저하면서 최소한의 관여만으로 최소한의 영향을 끼치는 참여, 즉 소심하고 게으른 저항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어쩌면 싸이의 ‘흠뻑쇼’ 논쟁은 PC가 우리의 일상적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말해준다. 모든 PC 논쟁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은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흠뻑쇼’ 논쟁에도 그런 요소가 있다. PC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진보는 ‘친(親)PC’, 보수는 ‘반(反)PC’ 성향을 보여왔지만, 최근에는 진보 쪽에서도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반PC’로 돌아서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의 생명은 겸손이다
PC의 생명은 겸손에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지적질’을 받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PC에 관한 의견을 표명할 때에는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상대방의 기분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특정인을 겨냥해 속된 말로 잘난 척하면서 싸가지 없게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PC의 부작용을 증폭시킨 결정적 이유다. 어쩌면 PC가 우리 시대의 테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PC가 정치판으로 들어가면 상대편을 때려눕히려는 몽둥이가 되고 만다.
이 문제는 역지사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는 상대방의 더 나은 태도를 원하면서, 마찬가지로 자신이 문제를 지적할 때에는 왜 자신의 태도는 잊을까? PC를 남을 비난하고 모멸하기 위한 도구로 써먹는 이런 작태는 ‘정치적 올바름’의 좋은 뜻마저 죽이고야 말 것이다. PC를 남들에게 으스대는 완장의 용도로 쓰지 말자. 그것은 PC를 죽이는 일이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PC는 PC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