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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를 위하여 새벽을 열다

만세를 위하여 새벽을 열다

  • 노병구
  • |
  • 자유로운상상
  • |
  • 2007-03-01 출간
  • |
  • 700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90805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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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저자인 노병구는 어린 시절을 일제치하의 시절을 보냈고 6.25당시에는 군에 입대하여 군인의 한사람으로 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또한 휴전과 함께 전쟁고아들을 위한 공민학교의 설립과동시에 신앙인을 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이후 자유당의 몰락과 험난한 야당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4.19의거와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박정희 정부의 강압과 회유가 있었으나 노병구는 본격적인 군사쿠데타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때 못 이기는 척 따라 갔더라면 제법 출세도 하고 풍요한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본문 중에서
군사정부의 반대로 공민학교는 폐쇄가 되었고 이후 민주당의 한통숙 전상공부장관의 요청으로 찬조 연설을 하면서 정당 활동에 한발 한발 앞서게 되었다.
이후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통합으로 선출된 윤보선 대통령의 낙선으로 영원한 스승인 유진산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온갖 금권선거로 인하여 두 번째 대통령이 되어서 중앙청 뜰에서 취임식을 하던 날 장준하 의원은 안국동 신민당당사 옥상에서 피를 토하듯 박정희를 규탄하는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필자는 말하고 있다.
삼선개헌으로 세 번째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유신이라는 말을 빌려 헌정을 중단 하였고 이후 1974년 필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커다란 희망 과 용기를 주셨던 유진산 총재가 서거 하시게 된다.
자신의 모든 행위는 훗날 역사가의 평가에 맡기고, 자신이 생각 하는 나라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다가 떠나간 유진산총재를 언론이, 정치권이, 국민이 생전에 좀 더 일찍이 알았더라면 우리나라의 역사발전에 크게 기여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가없다고 필자는 토로하고 있다.
“나에겐 미워할 시간이 없다 내가 태어나 살아 온 나라 내 후손과 동지들이 사는 나라 이 나라에서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한다 ........진산선생의 어록 중에
영구집권을 꿈꾸던 박정희는 아끼던 김재규의 총에 세상을 떠났지만 훗날 김영삼 대통령의 회한에는 마누라도 총에 막아죽고 그 넓은 청와대 안에서 혼자 사는 고독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진지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 모습에 인간적인 동정심에 민주화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렸지만 허사였고 그 일로 인하여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신민당 비주류나 국민들에게 많은 질책을 당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은 박정희를 경제 대통령이요, 또한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상을 탄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하는 데는, 저자인 노병구는 과감하게 반박 한다
“박정희의 독재정치가 없었다면 이 나라의 민주발전은 지금과도 같은 힘든 민주화의 길은 가지 않아도 되며 군부독재가 저지른 많은 애국동지의 희생은 지금도 이 나라의 역사에 낱낱이 밝혀지고 있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역시도 김영삼 정부의 밑거름으로 완수 된것”이라 말하고 있다.
1980년 상도동의 김영삼 대통령의 자택으로 방문하여 그간의 안부와 앞으로의 정국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매주목요일 산행을 하는데 건강에도 좋고 지인들과도 담소를 하기도 산만큼 좋은 것이 없지 않느냐!” 하는 질문에 그 당시의 서슬 같던 군부독재의 감시와 압박에서 피해서 민주화를 논의 할 곳은 산만큼 좋은 것이 없지 않겠냐하는 김영삼 대통령의 복선이 깔린 제의에 필자도 몹시 놀랐다고 전하고 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민주산악회의 개입과 나아가서는 민주산악회의 중책을 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필자는 말한다.
이후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등 국민들의 봇물과도 같은 민주화의 요구로 인하여 6,29선언으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항복하게 만들었으며, 이두대통령의 평가는 김영삼 대통령의 재임시절 각각 형무소 로 보내기까지의 김영삼 대통령의 인간적인 고뇌와 결단을 잔잔히 적어 내려가고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민주 동지회로 그 계보가 이어져가고 있는 민주산악회의 태동은 이 나라 민주발전을 위해 분명한 자리 메김을 하였고 또한 후세대 역사가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 본인의 회고록이 민주산악회역사를 밝히는 자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도 있다.
또한 모든 민주화의 평가는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적어지고 기록되겠지만 지금의 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이 나라 민주화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어서 이어져 왔는지는 분명하게 알아야한다고 전한다. 또한 70평생을 정치에 쏟아 부은 열정을 잔잔히 정리하면서 비망록이 아닌 회고록으로서 한평생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있다 .
이제 우리는 노정치가의 끊임없는 열정과 민주화의 열망에 한평생을 바친 뜨거운 가슴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민주 산악회의 역사

목요일 만 되면 등산복을 입고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 산에 올랐다.
일본의 무단정치 같은 박정희의 군사통치가 18년이나 계속되는 동안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끈질기게 전개 했지만 전두환 노태우등 신군부의 등장으로 또 다시민주화의 길은 멀어져만 같다.
탄압도 더욱 극심하여 대한민국 어디에도 민주화에 대한 말은 물론, 단 몇 사람 이 라도 그들의 허가 없이는 모일수가 있는 곳 이 없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오로지 산으로 갈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여, 오직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몸 받친 유진산, 김영삼, 두 분 지도자를 따라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나는 정치권에 몸담았다.
그중에도 민주 산악회에서 조직 위원장 감사 연수원장을 지내면서 전국의 시, 군, 구의 지부장과 간부들의 애국적 희생이 얼마나 고귀 했던가를 생생하게 보아왔다.
민주 산악회는 군사독재를 종식 시킨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중심 세력 이였음을 나는 확신한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은 제 2의 독립 운동 이였다.
온갖 탄압을 받으며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가진 모든 것 을 희생 해가며 뛰어든 수많은 중앙 간부 및 각 지부의 지부장과 간부들 그리고 회원들의 희생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그들의 희생으로 문민 민주정부가 수립되고 그 후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이 두 분이나 더 나왔다. 그러나 민주 산악회를 통하여 희생적인 민주화 운동을 한 수 많은 애국자들의 활동상을 자세히는 기록하지는 못하지만 빛나는 그들의 이름 만 이라도 여기 옮겨 놓는다.
만약 민주산악회 역사를 만든다면 이 기록이 조그만 한 기초라도 되기를 간절히 기도 하면서 말이다.
축간사

나는 산을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산을 좋아해 즐겨 찾았던 것은 아닙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민주산악회를 만들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면서 산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군사정권의 허가 없이는 단 몇 사람도 모일 수 없었던 숨 막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민주산악회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선봉장이었습니다. 만약 민주산악회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은 지금도 군사정권 아래에서 고통 받고 있을 것입니다. 민주산악회가 없었더라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져온 32년간의 군정을 종식하지도 못했고, 이 땅에 자랑스런 문민정부를 세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민주산악회는 한국의 민주화 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노병구 회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민주동지들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수많은 동지들이 숨져갔고, 수많은 동지들이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 가족들이 겪은 험한 세월은 차마 글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마저도 기꺼이 버리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싸우고 또 싸웠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조국의 민주화를 향한 우리 동지들의 순수한 열정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고귀한 희생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이 기회를 통해 우리 민주동지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큰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노병구 회장이 민주산악회의 역사를 비롯하여 자신이 걸어온 길을 책으로 엮어내니 나는 참으로 기쁩니다. 누군가는 역사에 남겨야 할 일을 맡아주었기에 고마운 마음도 앞섭니다. 누구보다 진실하고 누구보다 바르게 살아왔기에 이 책 또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리라 믿습니다.
노병구 회장의 회고록 발간을 민주동지 여러분과 더불어 진심으로 축하하며, 조국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2007년 1월
김영삼



목차


하늘에 먼저 간 아내와의 약속

나의 출생과 가계(家系) | 상경(上京)의 혁명(革命) | 어렸을 때 나는 친일파였다 | 일본의 패전과 해방 | 우리 집의 종교혁명 | 피난생활과 참전 | 제대와 진학 | 서울고등공민학교의 설립 | 5대 민의원선거와 김석원(金錫源) 의원 | 존경하던 이원옥(李原玉) 선생의 낙선 | 맹경옥과의 결혼 | 우리들의 신혼생활 | 김성추 목사님과 이름만 아는 미국인 Reprogel | 나를 너무나 아끼며 도와준 김생수(金生水) 전도사님 | 5.16 군사쿠데타와 서울고등공민학교의 마지막

홍대실 권사님의 도움으로 백운약국을 열다 | 어머니의 떡장사 폐업 | 약국을 차린 그해 말에 홍 권사님에게 원금만 갚다 | 지상에서 부르는 오직 하나뿐인 나의 누나 장오룡(張五龍) | 서광섬유의 부도처리 | 약국의 이전과 백운독서실, 그리고 우리 집 | 가보시면 압니다 | 초가집 터에 처음으로 집을 짓다 |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 한통숙 전 상공부장관 찬조연설 | 유원종 그리고 안영국과 김인상 | 별것도 아닌 감투싸움으로 장길효 선생에게 본의 아니게 죄를 짓다 | 이재형(李載灐) 선생과 김두한(金斗漢) 씨와의 만남

영원한 나의 스승 유진산(柳珍山) 선생과의 만남 | 예상을 깬 유진산의 승리 | 신민당 중앙 상무위원이 되며 진산계 일원이 되다 | 중구 태평로로 이전해 ‘명성약국’ 개업 | 신민당 선전국 문화부장으로 | 맞으면서 갈비를 먹느니 웃으면서 죽을 먹겠다던 김광주(金光洲) 선생 | 장준하(張俊河) 의원과 “박정희야! 박정희야! 박정희야!” | 유진산 선생의 신민당총재 취임과 김영삼 의원의 40대 기수론 | 제7대 대통령후보 지명 신민당 전당대회 | 제8대 국회의원 선거와 5.6 파동 | 너도 내가 돈을 먹었다고 생각하느냐?

셋째 광우의 탄생 | 구로동의 집 마련과 광우의 발병 | 광우의 치료를 위해 창천동에 전셋집을 마련하다 | 제8대 국회의원 총선과 고흥문(高興門) 후보의 찬조연설 | 유신정치의 시작 | 제9대 유신선거법과 나의 신민당 공천 | 제9대 국회의원 출마 | 500만원짜리 떡 | 대림동에 집을 짓다 | 유진산 총재의 서거 | 고흥문 씨와의 새로운 출발 | 집을 팔고 다시 집을 짓다 | 내 돈 없이 땅을 사고 15만원으로 집을 지어 150만원을 벌다

전당대회와 고흥문 의원의 변신 | 아무도 예상치 못한 고흥문 최고위원의 깜짝 인사 | 고흥문계의 군산지역 출신 김현기 의원의 위로 | 야당성회복투쟁위원회와 당기위원으로서 나의 역할 | 고흥문 최고위원의 후회와 탄식 | 신민당 5.30 전당대회의 역전 드라마 | 김영삼 총재의 직무정지 가처분 |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 박탈 |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죽었다 | 10.26 없이 그냥 물러날 수도 없었거니와 만약 그냥 물러났다면? | 신길교회의 구국기도회 | 정치와 경제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 전두환의 제2의 쿠데타(12.12 사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등포 을구에서 출마 | 민권당으로 영등포 을구에서 출마 | 정 할 일이 없거든 복권이라도 사라 | 유치송 총재와 신상우 사무총장 | 선거보다 더 어려웠던 가등기 문제의 해결 | 부민농장(富民農場)을 열다 | 김정두(金正斗) 씨와 민권당 간부들 | 김영삼 총재 댁 방문과 새로운 인연의 시작 |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어음사기사건 | 김영삼·이민우·김의택 세 분의 회동을 주선하다 | 전두환의 하야를 요구한 김의택 총재의 기자회견 | 또 다른 민주화투쟁의 시작-대구경북 민주산악회의 결성 | 작년 6월 9일 도봉산에 올라가서 무엇을 했느냐?

민권당의 쇄신과 황명수(黃明秀) 의원 영입작업 | 이민우 회장의 고민 “여름산행을 쉴 것인가, 말 것인가?” | 경찰의 연금과 양도소득세의 감면 | 김영삼 총재의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 | 김영삼 총재 스스로 이뤄낸 연금해제 | 단식중단 | 명우, 성인, 광우의 교육문제 | 민주산악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이 되다 | 전국 140여 개의 시군구 지부장을 선정, 인준하다 | 민주산악회 본부 산행시 조별 명단 |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상임운영위원이 되다 | 하늘의 뜻 국민의 뜻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 | 민주산악회의 지부결성과 조직활성화 | 강원도 춘천시 지부의 발족 연혁

김영삼 고문의 부민농장 방문으로 이천, 여주 경찰이 떠들썩 | 민주산악회의 전국조직과 광명시 지부 결성 | 민주쟁취의 개척자 김영삼을 추대한다-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 창립결의대회 | 통일민주당 창당과 전당대회 부의장 피선 |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와 6.10 국민대회 | 아내 맹경옥의 단독데모와 굉명시 여약사 10명의 지식인 시국선언 | 6.10 국민대회와 전두환, 노태우의 6.29 항복 | 국민의 여망을 저버린 정치지도자의 변명 | 김대중 씨의 4자출마론(四者出馬論)과 평민당 창당 | 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광명시에서 출마 | 총선결과는 역시 금권의 승리 | 광명시의 모든 행사는 민정당 윤항열에게 맞춰졌다 | 빚으로 집 명의를 이전해주고 월세로 전환하다 | 구국적 결단의 3당 통합과 통일민주당 지구당의 소멸 | 큰아들 명우의 결혼 | 민주산악회의 조직확대와 문경새재의 기적 | 민주자유당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와 김영삼 후보의 지명 | 민주산악회의 조직개편과 연수원장 피임 | 992년 민주산악회 중앙간부 연수 | 민주산악회 회직자 명단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윤항열 씨의 당선과 죽음 | 광명시 국회의원 선거 유감(有感)

제14대 대통령선거와 김영삼 후보의 당선 | 청천벽력 같은 민주산악회의 해체 | 광명시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손학규 씨의 공천 | 한국마사회 업무이사 취임 | 나와 아내에게 행복과 평화를 안겨준 한국마사회의 5년 1개월 | 나의 급여통장 관리와 심신의 여유 | 마사회 직원들에 대한 감사 | 모처럼의 해외여행으로 아내 경옥을 즐겁게 하다 | 중국 대련경마장 건설과 중국인 수양딸 왕윈과 사위 서연원 | 간판을 내린 뒤의 광명 민주산악회 | 딸 성인의 결혼 | 김영삼 문민정부의 공과 | 김영삼 대통령은 유일한 민주화의 초석 | 민주동지회의 시작과 역할 | 민주화를 위한 김영삼 대통령의 업적 |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 유감 | 대통령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당당히 걸어간 김영삼 대통령 | 2006년도 신년회 | 재혼 | 아버님의 소천(召天)

글을 끝내면서
민주산악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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