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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현경

태현경

  • 양웅
  • |
  • 자유문고
  • |
  • 2006-03-03 출간
  • |
  • 444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70300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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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태현경(太玄經)》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주역(周易)》을 모방해, 자신이 평생 동안 닦은 학문(學問)에 심혈을 기울여 지은 저서 이름이다.
본래 이름은 ‘태현(太玄)’이었다고 했으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총 19권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 예문지에서는 12권이라 하는가 하면,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는 10권이라 해서 문헌별로 차이가 적지 않다.

현전하는 판본은 ‘문헌통고’처럼 모두 10권이다. 이런 일은 다른 고전에서도 흔한 일이지만, 《태현경》의 경우 권수가 줄어든 것은 원전 중 일부가 탈락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편집자별로 분장(分章)을 달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양웅이 저술한 원전 《태현경》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장담하기는 힘드나, 현전본이 그 모습을 대략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는 뜻이다.


서문: ‘태현경(太玄經)’이란 어떤 책인가?

1.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추앙했으나…
《태현경(太玄經)》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주역(周易)》을 모방해, 자신이 평생 동안 닦은 학문(學問)에 심혈을 기울여 지은 저서 이름이다.
본래 이름은 ‘태현(太玄)’이었다고 했으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총 19권으로 이루어 졌다고 했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 예문지에서는 12권이라 하는가 하면,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는 10권이라 해서 문헌별로 차이가 적지 않다.

현전하는 판본은 ‘문헌통고’처럼 모두 10권이다. 이런 일은 다른 고전에서도 흔한 일이지만, 《태현경》의 경우 권수가 줄어든 것은 원전 중 일부가 탈락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편집자별로 분장(分章)을 달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양웅이 저술한 원전 《태현경》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장담하기는 힘드나, 현전본이 그 모습을 대략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는 뜻이다.

이 《태현경》은 양웅 사후 어느 무렵에 경(經)으로 격상된 듯하며, 이 때문에 오늘날은 《태현경》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게 되었다. 나아가 여기에 내재된 짙은 도가적 색채에 힘입어 이 《태현경》은 불교의 일체경(一切經)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명나라 정통(正統) 연간(1436~1449)에 완성된 ‘정통도장(正統道藏)’ 중 태청부(太淸部)에 편입되어 도교의 경전으로도 읽혀졌다.

이 《태현경》을 쓴 양웅(揚雄)은 누구인가? 양웅은 기록에 따라 그 성씨가 ‘양(楊)’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두 글자가 음은 물론이요 글자 모양까지 비슷한 데서 초래된 현상일 뿐, 양(揚)이 맞다.
그는 자(字)가 자운(子雲)이요, 촉군(蜀郡) 성도(成都: 지금의 사천성 성도) 사람이며 전한(前漢) 선제(宣帝) 감로(甘露) 원년(B.C. 53)에 태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한무제(漢武帝) 때 이름을 드날린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짙은 영향을 받았다.

후한(後漢) 초기 역사가인 반고(班固. 32~92)가 편찬한 《한서(漢書)》 중 제87~88권, 열전(列傳) 제57~58에는 양웅(揚雄. B.C. 53~A.D. 18)이란 인물이 배당돼 있다.
이 양웅전(揚雄傳)에 의하면 그는 문장(文章. 여기서 문장이란 문학작품 정도를 의미한다)으로 황제인 성제(成帝)의 눈에 띄어 급사황문(給事黃門)이란 관서(官署)의 말단 관리로 들어갔으며, 이후 전한 왕조에서는 성제를 거쳐 애제(哀帝), 평왕(平王)을 차례로 섬겼다 등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공자에게 뿌리를 두며 맹자와 순자를 계승하는 유자를 자처했으나, 주희(朱熹)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성리학적 관점과 같은 유학자로 간주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가 살다간 전한 말기~후한 초기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각종 경전을 점성술적?신비적?예언적으로 해석하는 소위 참위(讖緯)가 극성을 이루던 시대였으며, 아울러 황제와 노자를 추숭하는 이른바 황로학(黃老學)이 횡행하던 시대였는데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양웅 또한 벗어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유자임을 자처했으나, 그에게는 도가적인 색채도 물씬하다. 그런 면모는 이 자리에서 소개되는 《태현경》에서 엿보기에 충분하며, 아울러 3세기 때 인물인 황보밀(皇甫謐)이 찬한 ‘고사전(高士傳)’이란 역대 저명한 은일자(隱逸者)들의 전기물에 수록된 엄준(嚴峻)란 인물의 행적에 의하면 양웅은 성도(成都) 저잣거리에서 점치는 일로 생업을 이어가던 엄준을 따라다니며 배웠다고 한다. 엄준에게는 저명한 《노자(老子)》 주석서인 ‘노자지귀’(老子指歸)라는 저술이 있었으며 그 중 일부는 현재도 전해지고 있다.

점복(占卜)에 종사한 행적이라든가 《노자》 연구에 천착했다는 따위의 행적으로 볼 때 엄준은 참위설을 신봉하던 황로학적 사상가였다고 생각된다. 그를 스승으로 삼아 배운 양웅 또한 학문적 사상적 기반이 어떠했을 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생몰년(生沒年)에서 주시할 것은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교류가 남달랐던 유흠(劉歆. B.C. 53년 무렵~A.D. 25. 劉向 아들)이 그랬듯이, 한 왕조를 몰아내고 신(新) 왕조를 개창한 왕망(王莽. B.C. 45~A.D. 23) 정권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왕망이 전한 왕조를 대체해 공식적으로 황제에 즉위한 것은 서기 8년. 하지만 왕망이 실질적으로 집권한 것은 이보다 약 10년 전이었다. 왕망은 연이은 실정(失政) 끝에 건국 15년 만인 서기 23년에 멸망했다. 양웅이 죽고 난 5년 뒤에 왕망의 신(新)나라는 사라지고 만다. 그가 황제에 있었던 기간을 포함하면 왕망의 실질적인 집권기는 약 25년에 달한다. 이 중 후반기 5년을 제외한 약 20년 동안 양웅은 왕망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왕망 정권에 유흠과 함께 양웅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 대가로 양웅에게는 대중대부(大中大夫)라는 높은 관직이 주어졌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양웅은 그의 능숙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해 왕망을 찬양하는 ‘극진미신(劇秦美新)’이라는 저명한 글을 쓰기도 했다. 전한 정권을 버리고 왕망을 택한 이런 행태는 대의명분에 투철하고자 하는 후대의 유자(儒者), 특히 주희(朱熹)를 대표로 하는 성리학자들에 의해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양웅은 후한(後漢) 초기 사상가들인 환담(桓譚)이나 왕충(王充) 같은 이는 물론이고 유가적 대의명분을 주창한 당대(唐代)의 한유(韓愈)나 유종원(柳宗元),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9)과 왕안석(王安石) 등에게는 높은 추숭을 받았다.
하지만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라든가 북송의 소식(蘇軾),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등에게는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한때 공자나 맹자, 순자 등에 견주어 양자(揚子)로까지 추앙된 양웅은 주자성리학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상계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음에 따라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절조 없는 지식인의 대명사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처신은 사실 그 자신이 표명한 생활신조와 합치되는 면이 많다. 그는 선배 작가 중 굴원(屈原)을 “옥처럼 구슬처럼 밝게 빛났다(如玉如瑩)”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가 ‘이소(離騷)’를 짓고는 멱라수에 투신자살한 행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곧 《한서》 양웅전에 인용된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군자는 때를 만나면 크게 쓰일 수 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거하여 몸을 보존해야 한다.”고 했고 그와 비슷한 처세술은 그의 다른 저술인 《법언》 의 문명(問明) 편에 나오는 “다스려지면 모습을 드러내고 혼란해지면 몸을 숨긴다.”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왕망의 시대가 도래한 일을 양웅 스스로는 때를 만난 것으로 간주한 셈이 된다.

왕망에 대해 양웅이 협력과 충성을 다한 것은, 역으로 전한(前漢) 왕조에 대한 그의 실망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 《한서》 양웅전 등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양웅 자신은 전한 왕조를 위해 그의 능력, 특히 문장으로써 있는 힘을 다한다고 했으나, 이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광대 대접에 지나지 않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는 전한 말기에 두 말이 필요 없는 당대 제1의 사부(辭賦) 작가로 부상해 있었다. 특히 그는 부(賦)에 관한 한 전대(前代)의 가의(賈誼. B.C. 200~168)나 사마상여(司馬相如)에 견줄 만한 능력이 있었고, 실제 그런 능력으로써 현실의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왕망에게 희망을 걸고 새로운 나라에 새로운 정치를 해보려고 협력했던 것이리라!

2. 팔방미인 양웅(揚雄)
양웅은 그 가문이 멀리 주(周)나라 때의 백교(伯僑)에게까지 올라갔다. 그의 선조를 확인할 만한 여타 자료가 없어 믿기가 심히 곤란하지만 어떻든 양웅 스스로가 기록한 가문의 역사에 의하면 그 자신은 백교에서 시작해 그 자신에 이르는 동안 양씨(揚氏)의 중시조격인 5대조 양계(揚季)까지 거론하고 있다.
이런 가문의 역사에 이어 양웅전에는 양웅이 말하는 양웅 자신의 성격, 말하자면 자화상이 설명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해 책이라곤 읽지 않은 게 없었고” “실로 옛 것을 좋아하고 도(道)를 즐기니 그 뜻은 문장을 구하여 후세에 명성을 떨치고자함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를 위해 양웅은 “경서(經書)로는 ‘역(易)’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고 해서 ‘태현(太玄)’을 지었으며, 전(傳)으로는 《논어(論語)》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고 여겨 《법언(法言)》을 지었고, 사서(史書)로는 ‘창힐(倉힐)’보다 훌륭한 것이 없다 생각해 ‘훈찬(訓纂)’을 지었으며, 잠언(箴言)에는 ‘우잠(虞箴)’보다 훌륭한 것이 없다 해서 ‘주잠(州箴)’을 지었다”고 고백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양웅은 치밀한 목적의식과 계획 아래 일련의 저술을 기획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셈이다. 양웅 스스로가 거론하고 있는 이들 네 저작물 중에서도 ‘역(易)’을 모방한 ‘태현(太玄)’과 《논어(論語)》를 모방한 《법언(法言)》과 《이아(爾雅)》를 모방한 ‘방언(方言)’ 등은 거의 온전한 상태로 현재까지 전하고 있으며, 나머지 두 저서인 ‘창힐훈찬(倉힐訓纂)’과 ‘우잠(虞箴)’은 일실되었고, 지금은 다른 문헌에 산발적으로 인용된 형태로밖에 전하지 않는다.

또 《이아》는 한대(漢代) 경학의 훈고학적 성과를 총결산한 위대한 금자탑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견줄 만한 저작으로 그는 ‘방언’을 완성한 것이다. 지금도 온전하게 전하는 ‘방언’ 역시 ‘창힐훈찬’과 마찬가지로 소학류(小學類)에 속하는 것으로, 당시 한 제국의 영토 안에서 지방에 따라 같은 사물을 지칭하면서도 각기 다르게 쓰이는 단어들의 소통을 꾀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양웅은 이 외에도 앞서 말했듯이 당대를 대표하는 사부(辭賦) 작가의 최고봉이었다. 비록 나중에 그 스스로 회의에 빠지면서, 그 자신이 그토록 매진하며 열정을 보였던 사부, 특히 부(賦)에 대해서는 혹평을 퍼부어댔지만, 이처럼 다채로운 그의 면모에는 팔방미인이었다는 수식어가 적격일 것이다.
이들 저서 외에 양웅에게는 ‘촉왕본기(蜀王本紀)’라는 사서(史書)가 있었음이 《화양국지(華陽國志)》의 서지(序志)에 보이며, 《한서예문지(藝文志)》의 유가류(儒家類)에는 그의 저술로 ‘악(樂)’ 4편이 발견되었고 그 밖의 수십 편의 부(賦)도 발견되었다.

3. ‘태현(太玄)’과 《태현집주(太玄集注)》

‘태현(太玄)’은 그 저작물과 저자를 존칭해서 《태현경(太玄經)》이라고도 하고 《양자태현경(揚子太玄經)》이라고도 한다. 간단히 ‘현경(玄經)’이라 하기도 한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는 이 전집이 편찬되던 당시 청(淸)나라 황제인 강희제(康熙帝)의 이름 현엽(玄燁)을 피휘(避諱)해 《대원경(太元經)》이라 하고 있다.
양웅이 이 글을 지을 때 붙인 명칭은 ‘태현’이었음을 《한서》 양웅전 등의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하기야 자기가 지은 글을 자기 스스로가 경전으로 간주해 《태현경(太玄經)》이라고 붙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던 ‘태현’은 후세에 그것이 경전으로까지 추숭되자 경(經)이라는 접미사가 생겨나게 됐다.
원래 명칭 태현(太玄)은 말할 것도 없이 현(玄)이라는 말을 높여서 부른 데 지나지 않는다. 궁극을 의미하는 말 극(極)을 높여 태극(太極)이라 하고, 숫자 1을 높여 태일(太一)이라 하며, 공허(空虛: 텅 비다)를 의미하는 허(虛)라는 글자를 더욱 높여 태허(太虛)라고 하는 것과 같다.
태현이란 저작물은 글자 그대로는 ‘현(玄)에 관해 탐구한 글’이라는 정도로 풀어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현(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양웅 스스로도 말했듯이 ‘태현’은 《주역(周易)》을 모방했다고 했다. 《주역》에 현(玄)이란 말이 나오기는 곤괘(坤卦)의 上六爻에 “玄黃(현황)”이라고 처음 거론했고, 곤괘문언전(坤卦文言傳)에 “대저 현황(玄黃)이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하늘을 현(玄)으로 표현한 것의 처음이다.
곧 땅은 황색이라는 점에 대비되어 하늘은 현(玄)하다는 ‘천현’(天玄)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둘을 합친 합성어 천지현황(天地玄黃)은 양나라 때 주흥사(周興嗣)라는 사람이 꿰어 맞추었다고 하는 ‘천자문(千字文)’ 첫 구절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말이며 이는 《주역》에 있는 문자이기도 하다.

《주역》에서는 현의 깊이 있는 뜻을 간단하게 표현했으나, 그것을 깊게 연역한 《노자도덕경》에서는 현(玄)을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주축 개념으로 쓰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도덕경》이 시종일관 우주만물의 절대 법칙으로 설정하는 도(道) 그 자체이거나, 그것의 속성을 표현하는 주축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현(玄)은 단순히 색깔이 검다는 뜻이 아니라 현묘(玄妙) 혹은 미묘(微妙)라는 말로 이해된다. 도(道)는 현묘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으며,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름 지으려 해도 이름 지을 수도 없고 했다. 따라서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道)는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太極)과 같은 위상, 같은 개념을 지닌 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도(道)-태극(太極)의 연결고리를 통해 《주역》은 《도덕경》으로 치환하며, 《도덕경》은 《주역》으로 치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현행 통용본 《노자도덕경》 제1장에서는 이와 같은 道의 속성을 일러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玄之又玄)고 표현하고 있는데, 양웅이 ‘태현’이라는 저술에서 말하고자 하는 현(玄)은 바로 ‘현지우현’(玄之又玄)의 현(玄)이 아닌가 느껴진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양웅은 《주역》에서 거론한 현(玄)을 의미 깊게 새기고, “경서(經書)로는 ‘역(易)’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고 여겨 ‘태현(太玄)’을 지었다”고 강조했다. 도대체 ‘노자’적인 현(玄)과 ‘태현’은 어디에서 접합점을 이룰 것인가? 이런 의문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주역》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사상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주역》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미래를 예언하는 일종의 점복서라는 데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있기 힘들다. 《주역》이라는 말이 주나라의 역(易)이라는 의미이고 보면, 그것이 설파하고자 하는 사상의 핵심은 역에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역이란 말은 기본 개념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사멸하는 변화의 이치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역》이란 이 변화의 이치를 해명하고자 하는 고대인, 특히 하(夏) 은(殷) 주(周)나라 사람들의 욕망이 빚어낸 나름의 법칙에 대한 ‘메모리 칩’을 분석해야 한다.
역(易)은 변화 혹은 변동이라는 주축적인 개념임이 확실한 이상, 거기에 내재된 것으로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변화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풀어보면 미래에 대한 불가측성이다. 하지만 이런 불가측성은 역설적으로 불가측성 속에서도 변화의 법칙을 구명하고자 하는 욕망을 배태하게 된다. 《주역》이란 책이 불가측성과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미래를 점치기 위한 점서의 일종임이 확실하다면, 그것은 ‘예고된 미래의 길’을 법칙화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든 현행 통용본 《주역》은 양웅이 살던 그 시대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으며 또한 참위설(讖緯說)과 결합해 더욱 힘을 발휘했다. 이 시대에는 소위 각종 경전을 점성술적·신비적·예언적으로 해석하는 참위설들이 그들이 내세우는 예언의 실증성을 뒷받침하는 도구로써 《주역》이 매우 요긴하게 활용되는 양태가 나타났다. 이 참위설은 사상사적으로는 전국시대 중·후기에 극성을 이루게 되는 음양오행설을 절대적인 기반으로 했다.
《주역》은 우주만물이 늘 변화무쌍한 가운데서도 거기에 내재된 ‘변화의 절대법칙’을 추구한다는 점인데 반해, 《노자도덕경》에서는 그것을 자연의 원리와 결부시켜서 천지보다 앞서면서 만물의 어머니가 되는 ‘현묘하고 또 현묘한’(玄之又玄)한 도(道)와 결합할 수 있다는 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절대불변과 가변의 법칙을 확립하고 추구하는 《주역》과 《노자도덕경》의 결합은 사상사적으로는 유가와 도가의 통합운동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주역》과 《노자》 모두 우주만물이 생성하는 과정에서 음양설을 절대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양웅이 시도한 것과 같은 《주역》에 대한 《노자》식의 이해는 유가와 도가 외에 음양가까지 가미된 통합운동의 하나라고도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 ‘태현’이라는 저작물에 대해 많은 연구자가 현(玄)을 중심사상에 놓고서 유(儒)?도(道)?음양(陰陽)의 삼가사상을 통합하고자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한 예로 도가와 결합시킨 동한(東漢) 시대 말기의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가 있는데 이는 《주역》과 연단술과 노자의 대도(大道)가 섞여 통한다는 내용이며 후한의 위백양(魏伯陽)이 쓴 저서이기도 하다. 나아가 ‘태현’에서 양웅이 제창한 현(玄)에 대한 형이상학적 집착과 탐구는 위진남북조 시대를 장악하게 되는 이른바 현학(玄學)의 열풍에 커다란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양웅은 ‘태현’에서 당시 사회에 일대 유행하던 음양오행사상과 천문역법지식을 이용한 점복(占卜)의 형식으로써 세계에 대한 도식화를 꾀하고 있었다.
이는 ‘태현’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1현(玄), 3방(方), 9주(州), 27부(部), 81가(家), 729찬(贊)이란,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과 양의(兩儀)와 4상(四象)과 8괘(卦)와 64중괘(重卦), 384효(爻)에 각각 대응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주역》은 6효(六爻)인데, ‘태현’은 9수(九首)를 두어서 下下, 下中, 下上과 中下, 中中, 中上과 上下, 上中, 上上의 천지인(天地人)의 개념을 3단계로 도입하고 주야(晝夜)를 구분해 한 단계를 더 늘려 놓았다는 것이다.
또 ‘태현’의 찬사(贊辭)는 《주역》의 효사(爻辭)에 해당한다. 《주역》에서 단전(彖傳)과 상전(象傳)을 비롯한 이른바 10익(十翼)을 두어 본문인 경(經)을 설명하고 있듯이, 《태현경》 또한 현충(玄沖)과 현착(玄錯)을 비롯한 10편을 덧붙여 본문에 대한 보충 설명을 꾀하고 있다.
제목이 상징하듯이 그 책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어인 ‘현(玄)’이란 현묘(玄妙)하다고 할 때 바로 그 현이라는 의미이자 심오함을 뜻하는 말로서, 그 원래 출전은 《주역》 곤괘의 ‘현황(玄黃)’이며, 그것을 《노자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玄之又玄(현묘하고 또 현묘하다)”과 궤를 같이 한다.

《태현경》은 이러한 ‘玄’으로써 중심 사상을 삼고는 당시 사상계에 통행되고 있는 백가의 사상, 즉, 유가(儒家)와 도가(道家), 음양오행가(陰陽五行家) 등의 사상을 종합하고자 했다.
그 속에는 국가(國家) 종족(宗族) 길흉(吉凶) 화복(禍福) 동정(動靜) 상하(上下) 주야(晝夜) 한서(寒暑)와 인혁(因革) 등의 대립을 상호 통합하여 통일적인 관계를 천명하고자 했다.
또 모든 사물에는 9개 발전 단계가 있다고 간주하면서, 그 첫 단계인 ‘구찬’(九贊)에서 사물이 유래하게 되는 맹아(萌芽)와 그것이 발전해 왕성함을 맞아 쇠퇴하고 종국에는 소망(消亡)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이는 하늘에는 ‘구천’(九天)이 있고, 땅에는 ‘구지’(九地)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구등’(九等)이 있고, 가족에도 ‘구속’(九屬)이 있다는 등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동한(東漢)의 송충(宋衷)과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인 육적(陸績)이 《태현경》에 주를 붙이는 작업을 하고,진(晉)나라 사람인 범망(范望) 또한 앞선 두 사람의 주를 정리하는 한편 자주(自註)와 찬문(贊文)을 달았다. (그 밖의 내용은 이 저서의 사마광 서문과 說玄을 참조하기 바란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은 7가(七家: 각 주석가)의 주석을 집대성하고 다시 자신의 주석을 보태 《태현집주(太玄集註: 제1~6卷)》를 냈고, 뒤의 제7~10권은 양릉(襄陵)의 허한(許翰)이 주(注)를 냈다. 고증학이 성행한 청대에는 진본례(陳本禮)가 《태현천비(太玄闡秘)》를 저술했다. 《태현집주》에는 청대의 가경각본(嘉慶刻本)이 있고, 《태현천비》에는 청말의 각본이 있다.

여기서 사마광(司馬光)이란 누구인가? 북송의 정치가이며 호는 우부(迂夫)이고 자는 군실(君實)이다. 산서성 하현(夏縣)출생이며 송나라 인종(仁宗)의 보원(寶元) 연간에 급제하고 영종과 신종과 철종의 4대에 걸쳐 활동했다. 뒤에 재상이 되어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에는 지치통감(自治通鑑) 294권 가범(家範) 온국공문집 등이 있다.

현존 《태현집주》는 10권이나 사마광은 앞 6권에 대해서만 집주를 했고, 나머지 4권에 대해서는 북송 말엽~남송(南宋) 초기 때 인물인 허한(許翰. ?~1133)이라는 사람이 보충했다. 허한은 한강백(韓康伯)이 《주역》 계사(繫辭)를, 왕필(王弼)이 작업한 64괘에 대한 주(注)와 합쳐 ‘주역전서(周易全書)’를 만든 일을 본받아, 사마광이 미처 집주하지 못한 후반부 4권에 대해 ‘현해’(玄解)라는 제목을 달아 붙임으로써 《태현집주》 10권을 완성시켰는데 4권의 그의 ‘현해’는 주석이 별로 취할 것이 없다.

이번 번역본은 명(明)나라 가정(嘉靖) 3년(1524)에 간행된 장사호본(張士鎬本. 전 6권)을 저본한 중화서국(中華書局) 발행 《태현집주(太玄集注)》(2003.12.2版) 유소군(劉韶軍) 점교(點校)를 기본으로 삼아 모든 주석을 완역했고, 후미에 자구색인(字句索引)도 덧붙였다.

4~5년에 걸쳐 틈틈이 시간을 할애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분석하고 연구해 완벽한 주석본을 내려고 노력했으나 천학비재한지라 만족할 만한 주석본이 되지 못한 것 아닌가 한다. 독자들의 아낌없는 질정을 부탁드릴 뿐이다.

2006. 1. 20.
문천(文泉) 김태식(金台植)은 쓴다.


목차


‘태현경(太玄經)’이란 어떤 책인가?/3

태현경을 읽다[讀玄]/14
태현경을 설명한다[說玄]/18
태현집주서(太玄集注序)/22

≫원본 태현경 상(原本 太玄經 上)/27

제1권 태현경(太玄集注卷第一)/28
제1장 현수서(玄首序)/30
제2장 현측서(玄測序)/32
제3장 현수(玄首)와 찬(贊)/34
中(중)/周(주)/?(현)/閑(한)/少(소)/戾(려)/上(상)/干(간)/저(저)/羨(선)/差(차)/童(동)/增(증)

제2권 태현경(太玄集注卷第二)/92
銳(예)/達(달)/交(교)/?(연)/?(혜)/從(종)/進(진)/釋(석)/格(격)/夷(이)/樂(락)/爭(쟁)/務(무)/事(사)

제3권 태현경(太玄集注卷第三)/147
更(경)/斷(단)/毅(의)/裝(장)/衆(중)/密(밀)/親(친)/斂(렴)/彊(강)/?(수)/盛(성)/居(거)/法(법)/應(응)

제4권 태현경(太玄集注卷第四)/203
迎(영)/遇(우)/?(조)/大(대)/廓(확)/文(문)/禮(예)/逃(도)/唐(당)/常(상)/度(도)/永(영)/昆(곤)

제5권 태현경(太玄集注卷第五)/257
減(감)/?(금)/守(수)/翕(흡)/聚(취)/積(적)/飾(식)/疑(의)/視(시)/沈(침)/內(내)/去(거)/晦(회)

제6권 태현경(太玄集注卷第六)/311
?(몽)/窮(궁)/割(할)/止(지)/堅(견)/成(성)/?(질)/失(실)/劇(극)/馴(순)/將(장)/難(난)/勤(근)/養(양)

?贊一(기찬일)/367

?贊二(영찬이)/367

≫원본 태현경 하(原本 太玄經 下)/369

제7권 태현경(太玄集注卷第七)/370
제1장 현수도서(玄首都序)/370
제2장 현수(玄首)/370
제3장 현측도서(玄測都序)/371
제4장 현측(玄測)/372
제5장 현충(玄衝)/372
제6장 현착(玄錯)/375
제7장 현리(玄?)/378
제8장 현영(玄瑩)/384

제8권 태현경(太玄集注卷第八)/392
제1장 현수(玄數)/392

제9권 태현경(太玄集注卷第九)/404
제1장 현문(玄文)/404
제2장 현예(玄?)/411

제10권 태현경(太玄集注卷第十)/416
제1장 현도(玄圖)/416
제2장 현고(玄告)/422

※원문자구색인(原文字句索引)/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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