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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큰글자책] 중일전쟁 2

[POD] [큰글자책] 중일전쟁 2

  • 권성욱
  • |
  • 미지북스
  • |
  • 2022-08-31 출간
  • |
  • 512페이지
  • |
  • 210 X 297 mm
  • |
  • ISBN 9791190498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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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2천만 명의 사상자를 낸 8년 1개월간의 전쟁
1928년 관동군은 황구툰 사건을 일으켜 중국 동북의 지배자 장쭤린을 살해한다. 이 사건은 앞으로 일어날 전쟁의 예고편이었다. 1931년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차지하고 이어서 만리장성 이북을 점령하여 베이징으로 쇄도했다. 일본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1937년 베이징 근교에서 일어난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드디어 중일 전쟁의 막이 오른다. 화북에서 치솟은 전쟁의 불길은 곧 상하이로 번졌다. 무려 1백만 이상의 군대가 격돌한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에 패배하였고, 이후 1938년 말까지 일본은 중국과의 대규모 회전에서 모두 승리하며 수도인 난징, 쉬저우, 우한, 광저우를 차례로 점령한다.
일본은 중국의 심장부인 우한을 점령하면 중국이 항전 의지를 상실하고 화평을 제안하거나 자중지란으로 스스로 무너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우한을 함락시켰지만 중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장제스는 연전연패에도 불구하고 항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후 전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전선은 교착 상태가 되었고, 일본군은 더 이상 획기적인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중국 전선의 병력을 80만 명까지 늘렸지만 일본군의 공격력은 점점 무뎌졌다. 일본군의 앞에는 겹겹이 중국군의 방어선이 있었고, 후방에는 수십만의 중국군 유격대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중국은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중국 전선은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연합국은 유럽 전선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중국 전선은 무시되었다. 중국은 종전까지 강력한 일본을 상대로 외로운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그럼에도 장제스는 절망스러운 국면마다 중국이 이길 것이라고 호언하며 전략을 밝히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결국에는 중국이 이길 것이다.” 일본군은 중국 전선에서 끝내 돌파구를 열지 못하자 중국 봉쇄와 자원 확보를 위해 남방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끝없이 전선을 늘려갔고 점점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왜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는가?
쇄국 정책을 고수한 도쿠가와 막부와 달리 메이지 정부는 빠른 속도로 제국주의를 내면화하며 외부로 팽창했다. 1879년 류큐 왕국(지금의 오키나와)을 강제로 합병하고 타이완을 정벌하였으며,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대가로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 사할린 남부를 할양받았다. 1910년에는 조선을 완전히 병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국 진영에 가담하여 독일의 점령지를 차지하여 아시아에서 팽창을 거듭해 나갔다.
청조 멸망 이후 중국이 여러 군벌들로 분열되자 일본은 이를 침략의 기회로 삼았다. 1920년대 후반 시점에 만주 침략은 일본의 국가적 목표가 되었다. 촉망받는 장교였던 이시와라 간지는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 간의 인류 최후의 날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만몽(만주와 내몽골)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시와라 간지는 관동군 작전참모로 부임하여 만주 사변을 일으키는 주동자 중 한 명이 된다.

제국주의의 첨병, 일본군 장교 집단의 멘탈리티
일본군의 중국 침략 과정을 보면, 일선의 군대가 독단적으로 작전을 벌이고 일본 정부가 이를 수습하는 수순으로 사건이 진행됨을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 일본 군부는 결코 국가의 수족이 아니었다. 천황은 물론 전시 최고 사령부였던 대본영과 내각은 군부를 제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제국주의적 팽창을 거듭하며 일본은 점점 더 군대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갔다. 군부는 내부적으로도 결코 상명하복이 관철되는 일원화된 조직이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래 군부에서 파벌주의는 하나의 전통이었다. 일선의 장교들은 파벌이 다르면 하극상을 불사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하급 장교들이 군사반란을 일으키거나(2.26사건), 육군사관후보생들이 총리를 살해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5.15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파벌주의는 일본군 장교들의 엘리트주의와 소영웅주의, 그리고 연이은 승전과 맞물려 매우 독특한 정신세계를 만들어냈다. 일본 제국의 전선을 담당한 장교들은 누구의 명령 없이도 이미 충분히 제국주의적이었다. 일선의 지휘관들은 상부의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폭주하듯이 사건을 일으켰고, 전투를 개시했다. 그들에게 적의 객관적 전력이나 중장기 전략 같은 것은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황군’은 무패의 군대로 간주되었고, ‘황군’을 후퇴시키는 명령은 격렬한 반발을 샀다. 일본 중앙정치에서 신중론자들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졌고, 어느 누구도 군부를 막을 수 없었다.

왜 일본은 중국을 이기지 못했나?
원래 일본의 군사 전략에서 중국과의 전쟁은 소련이나 미국과의 전쟁보다 후순위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전무했고, 유사시 동원할 전력도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중국과의 개전 시 고작 최대 5~6개 사단을 동원하여 속전속결로 베이징과 상하이 등 요지를 점령한 다음 중국과 강화한다는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만약 중국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만주와 화북에서 다른 군벌들은 속전속결로 제압할 수 있었지만, 장제스의 중국군을 꺾을 수는 없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은 점점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갔다. 전선이 끝없이 확대되면서 일본은 병력을 계속 늘려야 했다. 일본은 전쟁 이전의 17개 사단 30만 명 규모의 병력을 1939년이 되면 41개 사단 150만 명으로 늘렸다. 그중에서 중국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25개 사단 80만 명에 달했다. 종전이 임박했을 때 지나파견군의 규모는 1백만 명 이상이었다. 일본 경제력으로는 이를 지탱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것이다.

장제스와 중국군의 경이로운 항전
오랜 내전을 겪었던 중국군은 장비도 훈련도 매우 빈약했으며 근대전에 대한 경험도 거의 없었다. 1930년대 중반에 와서 독일 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군대의 근대화에 착수했지만, 노력이 결실을 맺기 전에 중국은 일본의 전면적인 공격에 직면하였다. 장제스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적어도 평시에는 60개, 전시에는 2백 개의 근대화된 사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이 보유한 근대화된 사단은 겨우 30개에 불과했다. 인구와 영토를 제외하고는 군사적 격차와 근대화 수준에서 어느 모로 보나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었다.
중국군은 화력과 기동성에서 훨씬 열세했지만 손자병법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전통적인 전술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일본군을 끝없이 괴롭혔다. 종종 일부 군벌들이 비겁한 행태를 보이기는 했지만, 장제스의 직계 부대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중국군은 침략자에 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다. 중국군은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끈질기게 공격과 방어를 반복했으며 많은 부대가 문자 그대로 전멸을 감당하였다. 중국의 항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한 달 만에 몰락했던 폴란드나 프랑스와는 분명히 달랐다.

중국 전선,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이 되다
유럽에 독소 전쟁이 있었다면, 아시아에는 중일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은 물론 세계사의 향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전선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일본은 남방으로 눈을 돌렸고, 이 선택은 일본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진주만 공습이 대성공을 거둔 후 일본은 쾌속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필리핀, 싱가포르, 영국령 홍콩이 차례로 일본의 손에 떨어졌고, 태국은 일본의 반식민지가 되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마저 일본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예상을 뛰어넘는 승리에 기고만장해진 군부는 끝없이 전선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마지막 팽창이었다.

전쟁의 용광로에서 현대 중국이 태어나다
1945년 9월 9일 중국은 오랜 항전 끝에 마침내 승전국이 되어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
중일 전쟁을 거치며 중국은 하나의 중국으로서 통일을 경험했다. 모든 군벌의 군대가 국민혁명군의 깃발 아래 모였고 일본에 맞서 싸웠다. 경제와 정치도 통합되어 통일 중국의 밑바탕이 되었다. 전쟁은 바로 반일 감정과 항전의 의지로 무장한 국민들이 있었기에 지속될 수 있었고, 전쟁을 거치며 중국 민중은 근대적인 민족 정체성을 형성해 갔다. 또한 중국은 이 전쟁을 통해 아편 전쟁 이래 1백여 년에 걸쳐 열강들에게 짓밟혀온 오욕의 역사에서 벗어났다. 외세에 한없이 비굴했던 청조와 북양 정권의 위정자들과 달리 장제스는 북벌 직후부터 열강과 교섭에 나서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모든 불평등 조약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절반의 승리였다. 중일 전쟁 동안 꾸준히 힘을 길러온 중국 공산당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합작의 두 주체였던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전쟁이 시작되고 국민당은 패배하고 만다. 그와 함께, 중일 전쟁의 기억은 공산당 승리의 역사로 도배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포화가 쏟아지는 전장을 직접 헤쳐 가며 전쟁의 주역, 승리의 주역을 다시 확인시켜줄 것이다.


목차


(1권)
들어가며

제1부 회오리치는 일장기
1. 풍운의 만주
2. 만주 사변, 관동군 폭주하다
3. 상하이 사변과 만주국의 수립
4. 오늘은 만주, 내일은 화북
5. 항일을 위해 십 년을 준비하라
6. 군대가 지배하는 나라
7. 관동군, 만리장성을 넘다
8. 폭풍 전야

제2부 중일 전쟁, 발발하다
9. 한 병사의 설사가 전쟁을 부르다
10. 개전 선포
11. 베르?? 이래 최대의 격전
12. 3개월의 공방전
13. 난징! 난징!
14. 화북도 무너지다
15.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
16. 타이얼좡의 승리와 쉬저우 회전
17. 노몬한 전투의 서전-장구펑 사건
18. 우한 함락

부록1 중국 육군과 일본 육군이 계급
부록2 중일 전쟁에서 사용된 주요 무기
부록3 중일 전쟁 기간 군 편제 및 전투 서열

연표
참고문헌
찾아보기


(2권)
제3부 전반전 종료
19. 왕징웨이의 배신
20. 진흙탕에 빠지다
21. 중국, 반격하다
22. 관동군, 불곰에게 참패하다
23. 동계 대공세
24. 팔로군의 전쟁
25. 일본, 남방을 노리다
26. 중국 창공의 혈전

제4부 진주만에서 일본의 몰락까지
27. 패망으로 향한 길
28. ‘까다로운 죠’, 중국에 오다
29. 파죽지세의 일본
30. 제3차 창사 전투와 절공 작전
31. 중국의 스탈린그라드-창더 전투
32. 카이로에서 얄타까지
33. 중국을 관통하라
34. 스틸웰, 버마 탈환을 꿈꾸다
35. 레도 도로를 열다
36. 뒤늦은 반격
37. 자주 독립을 향한 노력
38. 소련, 만주를 침공하다
39. 절반의 승리, 새로운 전쟁
40. 전쟁, 그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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