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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사람들

아주 평범한 사람들

  • 크리스토퍼R.브라우닝
  • |
  • 책과함께
  • |
  • 2010-08-20 출간
  • |
  • 403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9122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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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아주 평범한 사람들
―101예비경찰대대와 유대인 학살

‘학살자들의 이야기’ 같은 주제를 다루는 역사 서술은 관련자들을 단순히 악마적 존재로 규정하는 어떠한 시도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집단 학살을 자행하고 강제이송을 담당했던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은 이 작전에 참가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거나 은밀하게 회피했던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었다. 따라서 내가 모든 학살자나 회피자의 행위를 최대한 이해하고 설명하기를 원한다면 동일한 상황에서 스스로 학살자 또는 회피자―양자 모두 인간―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 그럼에도 나는 설명이 변명을, 이해가 용서를 의미한다는 식의 상투적인 옛 설명 방식은 결코 수용할 수 없다. 설명은 변명이 아니며 이해는 결코 용서가 아니다. 범죄자들을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 없이는 홀로코스트 학살자들을 깊이 있게 다루는 어떠한 역사 연구도 불가능할 것이다. 유대계 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나치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 이렇게 썼다. “우리의 연구를 이끄는 목표는 결국 오직 한 단어 ‘이해(understanding)’이다.” 나는 바로 이 정신에 입각해서 이 책을 집필하고자 했다. _서문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부대에 대한 최초의 심층 연구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비극인 홀로코스트를 실제로 수행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유대인 집단 학살의 가해자가 되었을까?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1992, 재판 1998)은 이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저자는 홀로코스트 연구의 대가인 라울 힐베르크로부터 학문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힐베르크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1961, 한국어판 김학이 옮김,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개마고원, 2008)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중심으로 홀로코스트의 메커니즘을 밝혀낸 최대·최고의 저작으로 평가된다. 이 책의 저자인 브라우닝 또한 힐베르크와 같이 가해자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구체적으로는 집단 학살의 명령권자나 중간 책임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로 학살을 수행한 개인들이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와 학살 책임자에 대한 연구 성과에 비해 학살 수행자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에 접근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들인가, 평범한 독일인들인가
저자는 101예비경찰대대의 사례를 통해 홀로코스트가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거나 반(反)유대 정서를 내면화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말한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라면 누구라도 101예비경찰대대의 대원들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6년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다니엘 요나 골드하겐은 《히틀러의 자발적인 학살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1996)에서 브라우닝의 주장을 전면 부정하며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에 대한 충격적인 해석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학계에서도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브라우닝과 똑같이 101예비경찰대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골드하겐의 결론은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골드하겐은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독일인들’의 표본이라고 주장했다. 즉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오래전부터 이른바 “몰살추구적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었으며, (브라우닝이 밝혀낸바) 학살 임무를 거부할 수도 있었던 그들이 전문 살인자가 된 것은 (특수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골드하겐에 따르면 그들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은 “최종해결” 과정에서 극도로 잔인하게 발현했다. 브라우닝 또한 골드하겐의 주장을 반박했는데 그 구체적인 근거를 1998년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재판을 출간하며 〈후기〉(283~335쪽 참조)의 형태로 정리하여 실었다. 브라우닝은 골드하겐의 사료 이용의 문제점과 논지 전개의 취약성을 조목조목 밝혀내며, 무엇보다 그가 홀로코스트를 과거의 일회적이고 주변적인 사건으로 치부해버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오늘날의 세계에 미치는 중요한 문제의식까지 간과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홀로코스트의 불안은 오늘날의 세계에도 잠재한다
저자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요소, 그리고 특별히 반유대주의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는 비판에 대해, 인간 본성의 근본적 요소들은 문화를 초월하여 폭넓게 적용될 수 있으며 따라서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행동과 집단 동력은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주장하고 싶다”고 말한다(〈한국어판 서문〉). 실제로 반유대주의 정서에 영향을 받아 유대인 학살은 정당하다고 믿은 대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당시의 모든 독일인, 나아가 히틀러가 집권하기 이전 독일인들의 반유대주의를 대표한다는 주장은 수많은 모순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들은 학살을 수행하며 상황에 점점 익숙해졌고 결국 적응해갔을 뿐이다. 브라우닝이 (골드하겐처럼) 독일인들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증오의 개념으로 홀로코스트를 해석하는 데 반대하는 것은 결국 불안감에 기인한다. 골드하겐식의 해석은 독일은 이제 예전의 독일이 아니기 때문에, 즉 홀로코스트는 나치 시대의 일회적이고 주변적인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너무나 무책임한 낙관을 담고 있다. 독일 패망 이후 현재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끔찍한 인종 학살과 집단 학살이 벌어져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러한 낙관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브라우닝은 101예비경찰대대의 “범죄자들을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 없이는 홀로코스트 학살자들을 깊이 있게 다루는 어떠한 연구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서문〉). 그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무엇보다 홀로코스트는 악마나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 벌인 일이었다는 것, 그래서 홀로코스트의 불안은 오늘날의 세계에도 여전히 잠재한다는 것을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폴란드 유대인 학살부대, 101예비경찰대대의 베일이 벗겨지다
홀로코스트의 중심지 폴란드에서는 이른바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 방침에 따라 1942년 3월부터 1943년 2월까지 단 11개월 동안 거의 모든 유대인이 현지에서 학살되거나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다. 그런데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매우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며, 거주지는 대부분 소도시나 시골이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의문을 가졌다.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이 시기에 독일이 조직적으로, 신속하게 유대인 집단 학살을 수행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며, 인력은 어떻게 조달했는가? 수용소 유지에 필요한 인력은 소수였지만, 각 지역의 유대인을 집결시켜 수용소로 이송하거나 현장에서 사살하는 작전은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의문을 풀기 위해 저자가 찾은 곳은 독일 루트비히스부르크의 주 검찰청 본부였다. 주 검찰청 본부는 나치 범죄에 대한 형사소추를 총지휘했으며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범죄와 관련된 독일의 거의 모든 재판기록을 소장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곳에서 집단 학살을 실제로 수행한 한 부대에 대한 기소장을 접했다.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101예비경찰대대에 대한 것이었다. 101예비경찰대대 소속 210명(1942년 폴란드 파견 당시 500여 명)에 대한 취조 기록과 125건의 피고인 증언 자료에는 학살 임무를 실제로 수행한 이들의 생생한 육성이 담겨 있었다. 저자는 그 자료들을 토대로 이 책을 집필했다.

학살 전문가가 된 평범한 사람들
101예비경찰대대는 1942년 독일군의 후방 지원 임무를 띠고 폴란드에 투입되어 1943년까지 약 38,000명의 폴란드 유대인을 학살하고, 약 45,200명을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352~353쪽 표 참조). 주목할 만한 것은 101예비경찰대대가 집단 학살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대의 구성원 대부분은 군 복무 경험조차 없었으며 하층 계급 노동자 출신의 중년 남성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치의 이념과는 다른 정치적 가치들과 도덕규범을 아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가장 덜 나치화된 지역으로 명성 있던 함부르크 출신이었으며 다수는 정치문화적으로 반(反)나치 정서를 갖고 있던 사회계급 출신이었다”.(본문 84쪽) 하지만 대원들은 몇 차례의 학살과 게토 소개(疏開) 작업을 수행하면서 학살 임무에 익숙해졌고,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무엇이 이 평범한 사람들을 전문 살인자로 만들었을까? 저자의 답은 담담하면서도 자못 충격적이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은 나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지도, 반유대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환경’이었다. 저자는 대원들의 개인별 취조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이들이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으며 홀로코스트의 가해자가 되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학살은 처음부터 거부할 수도, 도중에 그만둘 수도 있었다
이 책에 인용된 학살 당사자들의 증언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101예비경찰대대가 폴란드에 투입된 뒤 대대장은 모든 대원들에게 유대인 사살 임무를 설명한 뒤 ‘특별한 제안’을 했다.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대원은 빠져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때 약 500명의 대원 가운데 대대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단 10명 혹은 12명뿐이었다. 그들은 임무에서 제외되었고 별다른 징계 처분을 받지 않았다. 물론 학살이 진행되면서 상당수의 대원들이 충격과 공포, 죄의식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임무 면제를 신청했다. 일부러 사격을 엉터리로 하거나, 상관의 눈을 피해 숨는 대원들도 많았다. 하지만 임무를 거부하거나 회피한 대원 가운데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즉 이들에게는 학살에 가담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90퍼센트의 대원들은―적어도 초기에는―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에 대해 충격과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대부분 학살을 계속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공개적으로 비동조 행위를 보이는 것은 그들 대부분의 능력 밖에 있었다. 차라리 총을 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쉬웠다.”(본문 275쪽) 이 책에서 ‘동조(同調)’는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집단행동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분석 틀로 작용한다. 대원들은 동료나 상관에게 ‘사나이답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그들은 ‘체면’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저자는 유명한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과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의 결과를 중요한 예로 든다. 물론 500명에 달하는 대원들의 학살 동기를 한 가지 측면으로 해석하는 데는 제한이 있다. 지금까지 제시된 설명 모델만 해도 전시 야만화, 인종주의, 임무의 분업화와 관례화, 학살자의 특별 선발, 출세주의, 맹목적인 복종과 권력에 대한 경의, 이데올로기적 세뇌, 동료 집단에 대한 동조 등 수없이 많다(이들 모델들에 대한 검토는 18장 〈아주 평범한 사람들〉 참조. 본문 237~282쪽). 하지만 이 가운데 101예비경찰대대에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은 하나도 없다. 학살이 무조건 강요되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대원들의 80~90퍼센트가 어쨌든 ‘자의로’ 학살에 가담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아니라 특수한 환경의 지배를 받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사살조 임무를 면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못했던 어떤 대원들은 다른 방식으로 탈출구를 찾았다. 어떤 사수들이 너무 흥분해서 그리고 “의도적으로” 희생자를 명중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했기 때문에 지휘관은 자동소총을 가진 하사관들에게 이른바 확인사살(또는 안락사살)을 하도록 지시해야 했다. 다른 대원들은 이미 좀 더 일찍 탈출구를 찾았다. 예를 들어 1중대원 몇 명은 소개 작전 도중 빠져나와 가톨릭교회 신부의 사택 정원에 숨어 있었다. (…) 다른 대원들은 수색작업 동안 유대인들을 끌어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중앙 광장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또 다른 대원들은 중앙 광장에 있으면 유대인 사살조에 동원될 것이 두려워 계속 유대인 집들을 수색하고 다니면서 시간을 끌었다. _103쪽

대원들이 다시 비우고라이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침통했고, 화가 났고, 괴로워했고, 동요하고 있었다. 그들은 식사는 별로 하지 않고 술만 많이 마셨다. 술은 충분히 지급되었고 많은 대원들은 만취했다. 트라프 소령은 부대를 순회하며 책임은 고위층에 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면서 대원들을 위로하려 애썼다. 그러나 술도 트라프의 위로도 막사를 지배했던 수치심과 공포를 씻을 수는 없었다. 트라프는 대원들에게 숲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아예 말할 필요도 없었다. (…) 이렇게 101예비경찰대대 내부에는 유제푸프 학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전체 사실이 금기였다.” _111~112쪽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다. (…) 한 대원이 나중에 강조했듯이, 그 누가 “감히” 집결한 부대원 앞에서 “체면을 잃고자” 하겠는가? (…) 대열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정말 용기가 필요했었다는 것을 훨씬 잘 알았던 또 다른 대원은 아주 쉽게 표현했다. “나는 겁쟁이였다.” _114쪽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반유대주의 문제 전체를 침묵 속에 그냥 지나쳤다. 분명한 것은 경찰대원들에게는 동료들 눈에 비칠 자신의 체면에 대한 관심이 희생자와의 어떠한 인간적인 교감보다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대원들이 인간적인 의무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영역 밖에 서 있었다. (…) 예비경찰대원들이 나치의 반유대주의 이론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적어도 유대인들을 일반적인 적의 이미지로 파악했던 것 같다. _116쪽

습관화라는 요소도 영향을 주었다. 이미 한 번 살인을 했었기 때문에 두 번째에서는 첫 번째와 같은 정신적 충격을 겪지 않았다. 다른 많은 일들처럼 살인도 적응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 이번 경우 가해자들은 첫 번째 경우처럼 트라프의 제안에 따라 그들 각자 짊어져야 했던 ‘선택의 고통’ 앞에 서지 않았다. (…) 이번에는 사살에 가담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대원들이 물러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 사살조에 편성된 모든 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사격대열에 나섰다. 그렇기 때문에 사격병은 이후 자신이 학살 행위를 피할 수도 있었다는 뚜렷한 죄의식을 지닌 채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 _133쪽

생존 유대인 수색 작전과 함께 유제푸프에서 시작한 101예비경찰대대의 활동은 거의 완전한 하나의 순환 서클을 형성했다. 학살·강제이송·경비·봉쇄·도피한 유대인 수색·총살, 초기의 충격적인 학살에 참여한 이후 그들이 참가한 많은 대규모 이송 작전 동안에는 실질적으로 전 대원이 적어도 봉쇄 조치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열차에 몰아넣었지만 열차여행의 저편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로부터는 내심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자신들이 강제이송한 유대인들의 운명과 자신들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확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사냥”은 달랐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희생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마주 섰으며 사살도 개인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보다 한층 중요한 것은 경찰대원들이 다시 각자 상당한 정도의 선택권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살조 참여나 회피냐의 선택권이 어떻게 행사되는지에 따라 대대가 얼마나 “강한 사나이들”과 “겁쟁이”로 분열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유제푸프 작전 이후 몇 달 동안 많은 대원들은 점차 무감각하고 냉담한 그리고 여러 경우에는 매우 열렬한 살인자로 변해갔다. _192~193쪽

독일 경찰들은 그들이 유대인에게 가했던 잔혹한 행동을 폴란드인에게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보기에는 잔혹 행위의 사례는 훨씬 적지만 폴란드인의 생명에 대해서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점점 무감각과 무관심이 증가했던 것 같다. (…) 호프너의 3중대 2소대는 오폴레에서 막 영화관에 가려던 순간, 한 독일 경찰대원이 폴란드인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작전 중에 공격당한 독일 경찰은 사망한 것이 아니라 단지 부상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프너는 12~15명의 노인들, 그것도 대부분 여자였던 폴란드 주민 전원을 사살하고 마을 전체를 불태우도록 조치했다. 집행을 마치고 그와 대원들은 오폴레로 돌아와 영화를 관람했다. _224쪽

옛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경우 반유대주의에 대해 상세히 증언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히 법적 고려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나치즘의 총체적 현상, 그리고 당시 자신과 동료들의 정치적 입장에 관해 전반적으로 침묵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훨씬 더 일반적이고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만일 자신의 행동이 지녔던 명백히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시인한다면, 다시 말해 재판이 진행되던 1960년대의 정치문화나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규범과 정반대인, 도덕적으로 완전히 거꾸로 선 나치즘의 세계가 당시 그들에게 전적으로 옳게 보였다고 인정한다면, 그들은 어떤 체제에나 그저 적응하는 정치적·도덕적 기회주의자로 비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 가운데 누구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었던 또는 마주하기를 원치 않았던 진실이었다.
_225쪽

안타깝게도 홀로코스트는 무엇보다 극소수의 영웅, 그리고 너무 많은 범죄자와 희생자들의 이야기이다. (…)경찰들은 유대인들을 도운 폴란드인들이 있었고, 그 때문에 폴란드인들이 독일인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했다. 그리고 폴란드인들은 경찰들이 그토록 위선적이라고 비판하는 행동을 했지만 당시 그러한 “배반”과 밀고를 하도록 선동한 것이 바로 자신들이었다는 사실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반유대주의적이었던 다른 동유럽 국민들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폴란드 주민들 가운데서는 대규모 살인 보조부대―악명 높은 자원 보조경찰대―에 한 명도 모집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독일 경찰의 증언은 폴란드인이 얼마나 반유대주의적인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폴란드인에 대한 독일 경찰의 시선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폴란드인들에게 자신들의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많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_235~236쪽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몇몇 고참 대원들이나 러시아에서 폴란드로 이전 배치되었던 하사관 몇 명을 제외하면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은 아직 불구대천의 적들과 전투나 유혈 충돌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화가 나서 총 한 방을 쏘아본 적도, 자신이 사격의 대상이 된 적도, 그리고 전쟁 중에 동료가 옆에서 죽어가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따라서 이전에 있었던 전쟁 경험에서 나온 또는 이후의 전쟁에서 증폭된 전시 야만화는 유제푸프에서 경찰대원들의 행동에 직접 영향을 준 요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학살이 시작되자 이들은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해갔다. 마치 전투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최초 한 사람을 향해 총을 쏠 때 느꼈던 전율과 공포가 지나고 살인이 일상적 임무가 되어가면서 그것은 점점 더 쉬워졌다. 이런 측면에서 경찰대원들의 야만화는 그들이 저지른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 차라리 결과였다. _240~241쪽
참혹한 학살 공포와의 직접적 대면은 더 이상 학살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대원들이 수를 주목할 만큼 크게 증가시켰다. 반면 유대인 학살과 강제이송 및 경비에서 작업 분담이 이루어지고 학살 행위가 죽음의 수용소로 넘겨지자마자 대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유대인 학살에서 여전히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일말의 책임 의식도 느끼지 않았다. 직접적인 감시 없이 수행된 밀그램의 실험에서처럼 많은 경찰대원들은 직접 감시받지 않을 때는 명령에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개인적 위험 부담 없이 행동할 수 있을 경우에는 온건하게 행동했지만 대대가 학살 작전에 참가할 때는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 _263쪽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은 기타 독일 사회와 마찬가지로 인종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선전의 홍수에 휩싸여 있었다. 나아가 치안경찰은 기초 교육에서뿐 아니라 단위부대 차원에서도 지속적인 세뇌 작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그칠 줄 모르는 선전의 홍수는 독일인이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전반적인 생각과 유대인에 대한 “확실한 반감”을 크게 강화하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많은 세뇌 교재들은 나이 많은 예비경찰대대 대원 대부분을 대상 집단으로 삼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며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그들에게 매우 부적절하거나 아예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아직 남아 있는 관련 자료 중에는 유대인 학살 임무를 담당할 경찰대원의 정신을 무장시킬 목적으로 특별 제작된 교재들이 전혀 없다. (…) 사회 분위기에 의해 매우 포괄적으로 영향받고 시대 상황에 지배되었던 많은 대원들이 특히 유대인의 열등함과 이질감뿐 아니라 그들 자신, 즉 독일인의 우월감과 인종관에 의해 고취되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분명하고 그들 대부분은 유대인 학살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다는 것이 명백하다. _275쪽

101예비경찰대대가 보인 집단행동은 우리를 매우 불안하게 하는 깊은 함의를 지닌다. 오늘날 인종주의 전통에 물들고 전쟁과 전쟁 위협 때문에 포위 심리에 사로잡힌 사회들이 많다. 어디서나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권위를 존중하고 권위에 따르도록 가르치며 사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거의 기능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어디서나 사람들은 각자의 직업 분야에서 출세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모든 근대 사회에서 드러나는 삶의 복잡성과 그로 인해 초래되는 관료화·전문화는 공식적인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개인적 책임감을 점점 희석시키고 있다. 실질적으로 모든 사회 공동체에서 개인이 속해 있는 집단은 개인들의 행동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도덕적인 가치기준을 설정한다. 만약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_282쪽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지도

1. 유제푸프에서의 어느 아침
2. 치안경찰
3. 치안경찰과 최종해결: 1941년 러시아
4. 치안경찰과 최종해결: 강제이송
5. 101예비경찰대대
6. 폴란드에 도착하다
7. 집단 학살의 서막: 유제푸프 학살
8. 집단 학살에 대한 성찰
9. 워마지: 2중대의 추락
10. 8월 트레블링카행 강제이송 열차
11. 9월 말의 학살
12. 다시 시작된 강제이송
13. 호프만 대위의 이상한 병
14. “유대인 사냥”
15. 마지막 집단 학살: “추수감사절 작전”
16. 그 이후
17. 독일인, 폴란드인, 유대인
18. 아주 평범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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