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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연구(하)

조선사연구(하)

  • 정인보
  • |
  • 우리역사연구재단
  • |
  • 2013-04-05 출간
  • |
  • 956페이지
  • |
  • 152 X 225 X 40 mm /1782g
  • |
  • ISBN 9788996197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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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한글역주본 완간

1. 《조선사연구》 하권의 체제상의 특징

하권에서는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쇄사건으로 위당 선생이 ‘오천년간 조선의 얼’의 원고 집필을 중단할 때까지 연재되었던 제17장 「기루왕 이후 백제와 신라」로부터 제25장 「신라의 내정과 외치」에 이르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 관련 역사를 수록하고, 추가로 세 나라의 종교ㆍ학문ㆍ제사ㆍ예문ㆍ불교의 유래와 발전에 대하여 문화사적 관점에서 접근을 시도한 「전고 갑」을 제27장에 수록하고 있다. 또, 그동안 초고 형태로 보관되었던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 부분을 제26장으로 새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부록의 형식으로 위당 선생이 고대사 연구에 투신하게 된 계기와 일제의 역사왜곡을 경계하는 당부의 말을 담은 「조선사연구 부언」, 광개토대왕 능비 비문에 대한 연구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 고구려 관명에 대한 글인 「태대형ㆍ대형ㆍ소형에 관하여」를 모두 수록하였다. 역자는 이와 함께 최초의 발견 이래 위당 선생을 거쳐 100여 년이 흐른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주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는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에 대하여 문법학ㆍ어원학적 측면에서 분석ㆍ보완한 역주 내용을 추가로 수록하였다.
하권에서 체제상으로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논란이 거듭되고 있는 광개토대왕과 그 능비에 관한 내용이 집중적으로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본서 제26장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과 순한문체 연구논문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 그리고 역자가 새로 역주한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이 그것이다. 위당 선생이 단재 선생 이후로 유일하게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우리 역사 왜곡ㆍ조작에 맞서 이 일련의 논문을 집필하여 반론을 제기한 이래로 7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한ㆍ중ㆍ일 세 나라에서 광개토대왕과 그 능비에 대한 연구와 비문 해석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양적ㆍ질적으로 많은 진전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는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과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에서 특기할 만한 내용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몇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지금에 와서도 주목할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에 관하여

위당 선생의 《조선사연구》는 「동아일보」 일장기 말쇄사건으로 제25장 「신라의 내정과 외치」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 부분은 원래 위당 선생이 「동아일보」에 연재해 온 ‘오천년간 조선의 얼’의 기고문으로 집필된 것이다. 그러나 1936년 8월 29일 갑작스러운 「동아일보」의 정간으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의 연재가 중단되면서 초고 상태로 다른 곳에 보관되었으나, 1947년 「서울신문」을 통하여 그동안의 연재 내용을 《조선사연구》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할 때에도 미처 수록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83년 무렵 연세대학교에서 위당 선생의 저술ㆍ시작들을 수집하여 엮고 《담원 정인보 전집》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할 때 《조선사연구》의 마지막 장으로 수록되면서 비로소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장의 기술 내용은 고국원왕 시기의 국내외 정세, 고구려의 서진과 부여회복군의 동진, 신라와의 외교관계, 영락연간의 업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광개토대왕에 관한 기술 부분의 경우 ‘영락’이라는 연호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그의 대외정벌, 백제 정벌, 거란 토벌 등의 대외 정벌 활동을 기술하는 한편 그 이동 경로를 고증하는 데에 역점을 두어 지금의 학계에서도 참조할 만한 내용들이 많다. 단적인 예가 광개토대왕의 정벌 경로를 확인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되는 ‘염(나)수’의 위치에 대한 고증이다. 위당 선생은 염(나)수가 지금의 눈강인데 사학자들이 그 위치를 고증하는 과정에서 혼선을 빚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 역대 중국 역사가들이 요동 쪽 해구의 존재만 알고 북동해 저편 해구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던 점을 꼽고 있는데, 지금의 학자들도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본다.

3.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에 관하여

위당 선생은 이 무렵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과는 별도로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이라는 제목의 고구려사 연구논문을 집필하였다. 위당 선생의 제자이자 연세대 교수였던 민영규 선생의 논문에 따르면, 위당 선생이 이 논문을 집필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1930년대 당시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제 관변 학자들의 광개토대왕 비문에 대한 억지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위당 선생은 이 논문에서 능비 비문의 문체상의 특징에 대해서 먼저 소개한 후 문헌 고증과 현지 지형에 주의하면서 해당 비문을 총 7개 단락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그는 “來渡海”, “百殘聯侵新羅”, “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등 그 후로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주요 쟁점들에 대하여 정밀한 분석을 시도하고 말미에서는 일제 관변학자들의 이 같은 억지해석이 “세상이 어지러운 데다 예문의 법도가 사라져 이런 글을 읽는 일이 드물어지고 거기다 편견과 사심까지 끼어들어 멋대로 재단하다 보니 문맥이 뒤틀리고 의미도 딴판으로 변해 버리고 만 것”이라고 질타하였다.
이 논문은 능비 비문의 문구 해석을 놓고 그 후로 많은 학자들에게 계발과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

4. 「전고 갑」에 관하여

당대 최고의 국학자로서의 위당 선생의 위상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전고 갑」 부분이다. 위당 선생은 여기서 한ㆍ중ㆍ일 세 나라의 고금의 문헌ㆍ전적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문화사적 측면에서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세 나라의 전통신앙ㆍ교육제도ㆍ국가제의ㆍ문학예술ㆍ천문역법ㆍ문자언어ㆍ불교신앙 등의 문화적 현상과 제도들의 유래 및 발전 양상에 대하여 상당한 지면을 활용하면서 심도 있는 탐구와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삼론종’ 확립에 큰 역할을 한 고구려승 도랑, 불교를 신라에 전파한 아도 등, 당시까지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불교 승려들과 불교 경전 및 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의 학문적 깊이와 통찰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5. 「정무론」- 우리 고대사 조작을 비판하다

하권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조작을 바로잡는 글’, 즉 「정무론」이다. 위당 선생이 한국 고대사 연구에 나서게 된 동기는 일제 치하의 어용학자들이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우리 역사를 조작하려 하는 시도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물론 《조선사 연구》 자체가 그 같은 위당 선생의 역사적 인식을 반영한 책이지만 이 같은 인식이 집중적으로 반영된 부분이 바로 「정무론」이다. 위당 선생은 당시의 관변 학자들이 낙랑 유물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정무론」을 써서 일제 식민사관 사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조작ㆍ왜곡을 경계하였다. 위당 선생은 중국 송대에 옛 비석을 옮기거나 관중 땅의 당대 ‘석경’이 강남의 필원에게 소장된 일, 북조시대의 조각상이 강남의 손성연에게 소장된 일, 촉 땅의 조각상이 남조에 전해진 일 등을 예로 들어 운반ㆍ이동이 가능한 물건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수시로 위치 변동이나 ‘원산지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고 보았다. (“그 글귀가 하도 반반해서 그 돌을 옮겨 왔다는 것이 너무도 티가 나는데도 그저 ‘여기가 옛 점제이다’라느니 ‘여기가 점제현의 치소 자리이다’라느니 하고 우기고 있으니 어쩌면 이다지도 방자하고 거리낌조차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위당 선생은 또 이런 말로 유물 조작의 가능성을 경계하였다.
“…… 사방팔방으로 나가서 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 언덕이나 고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그 속에 위조물이나 조작거리를 슬쩍 끼워 놓은 다음 자기 궤변을 합리화하려고 든다. 심할 때에는 일부러 그런 것들을 묻어 놓고 남들이 발굴하게 하기도 하고 일부러 그런 것들을 버려 놓고 남들이 발견하게 하기도 한다. 또, 어떨 때에는 일부러 그것에 묻은 흙을 털고 닦은 다음 그 글귀를 판독하는 척하다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정말 이 땅에서 이런 물건이 나왔네?’ 하고 떠들어 댄다. 그렇게 하면 그 광경을 보는 사람은 청동기나 비석 따위가 줄줄이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아무리 ‘안다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전혀 의심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불순한 목적으로 그런 짓을 벌이다 보니 오로지 자신의 그런 목적을 이루기에만 바쁠 뿐 옳고 그르고는 아예 따지지도 않는 것이다.”(842-843)
“아무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은 저들의 작태를 보면서도 저(어용학자)들의 작태를 보면서도 그저 ‘옛 것을 찾는 고생을 하는구나’, ‘역사 고증을 할 준비를 하나 보다’ 하고 여기면서 되려 그들 편을 들어 ‘남들은 우리 역사를 찾는 데에 돈과 공을 이 만큼이나 쏟아붓고 있는데 예전에 이런 일에 종사한 우리네 학자들은 대체 해 놓은 것이 뭐야?’ 하고 개탄만 할 뿐 저들이 그 일에 매달리는 것이 남의 옛 역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옛 역사를 허물려는 짓이며 남의 역사를 고증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역사를 없애려는 짓인 줄은 모르기 일쑤이다.”(844)

6. 끝으로 하는 말

과학과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는 21세기를 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불변의 진실’이라고 굳게 믿던 사실이나 가치들도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세계도 그러하다.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유물이나 역사기록만을 역사적 진실 그 자체라고 단정하는 것쯤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학자라면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것들이 ‘누구’에 의해 ‘어떤 경로’를 통하여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거침없이 반문하고 또 기존의 결론과 정설에 끊임없이 도전할 줄 알아야 한다.
위당 선생은 《조선사연구》에서 역사는 곧 민족 ‘얼’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그동안 우리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주로 역사방법론에만 집착하여 위당 선생의 ‘얼’ 사관이 “민족 내의 계급투쟁을 간과했다”라거나 “극단적인 정신사관이었다”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물론, 《조선사연구》에서 위당 선생이 제기한 주장이나 관점들 중에서 문제나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조선사연구》로 상징되는 위당 선생의 한국 고대사 연구와 그 성과들은 그것이 위당 선생에 대한 긍정이었든 부정이었든, 심지어 위당 선생에 대한 표절이었든 간에 이후의 남ㆍ북한 학자들이 역사관을 정립하고 방법론을 모색하는 데에 많은 계발과 자극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당 선생은 훌륭한 역사학자이며, 또 역사학자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의 ‘얼’ 사관과 연구 업적에서 수용하고 계승할 것들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들을 오롯이 인정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 이웃나라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라거나 “독도가 일본 땅이다”라는 식의 강변을 서슴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학자로서의 자존심도 객관성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정한 행동강령에 따라 우리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또 그것을 기정의 사실로 만들려고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위당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 집필과 신문 연재, 역사 강연 등을 통하여, 일제의 역사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 우리의 ‘얼’을 지키고자 진심으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이웃나라의 역사 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얼’을 지키기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 문성재)

[중앙일보] 2012.11.07. 4단
식민사관에 맞선 정인보 대표작 한글로 본다
『조선사연구』 완역본 첫 출간 일제때 신문 연재 뒤 75년 만에 ‘낙랑군 위치는 평양’설 반박

20세기 전반 한국학의 초석을 놓은 위당(爲堂) 정인보(1893~?) 선생의 대표작 『조선사연구』(상권, 우리역사문화재단) 한글 완역본이 처음으로 출간됐다. 1935년 1월 1일부터 36년 8월 29일까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지 75년 만의 일이다.
 해방 직후인 46년 서울신문사에서 국한문혼용체 원문을 영인한 단행본이 나왔고, 83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펴낸 『담원 정인보 전집』(전6권)에도 포함됐으나 한글 완역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글본의 상권만 848쪽 방대한 분량이다. 중국문학을 전공한 번역자 문성재 박사가 조사한 각주 800여 개가 포함됐다. 하권도 약 900쪽 분량인데 내년 초 나올 예정이다. 
문 박사는 “번역에 3년이 걸렸다. 고대 한자어는 물론 만주어와 몽골어에다 일본식 한자 표기까지 겹쳐 있어 번역이 쉽지 않았다”며 “언어학·지리학·문헌학·금석학·사상사 등을 망라하며 우리 역사의 시야를 동북아로 넓힌 『조선사연구』는 70여 년 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참신한 시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제는 1915년 3월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통해 식민사관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낙랑군 위치를 평양으로 단정하면서 한민족의 역사를 타율적이고 정체된 것으로 보는 식이다. 위당의 『조선사연구』는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서며 조선의 자존심을 세우는 작업이었다.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漢四郡) 소재와 고조선 강역을 동북아 요동(遼東) 지역으로 파악했다. 고대사 체계를 ‘고조선-부여-고구려’의 구도로 이해하고, 한국학 연구의 기초를 실학(實學)에서 찾은 이도 위당이었다. 단군을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최고 통치자에 대한 존호로 봤고, 삼한(三韓)이란 용어도 지명이 아니라 ‘한(汗)’이나 ‘간(干)’처럼 ‘크다’ 또는 ‘임금’의 뜻을 가진 존호로 해석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이란 용어도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숙신(肅愼)’·‘주신(珠申)’ 등과 마찬가지로 만주어 발음을 옮긴 것이라고 했다. 당초 위당은 단군조선부터 이씨조선까지 5000년 한민족 역사를 통괄할 계획이었으나 삼국시대에서 그쳤다.일제가 ‘일장기 말소사건’을 빌미로 1936년 8월 29일 동아일보를 강제 정간시켰기 때문이다.
배영대 기자

[동아일보] 2012.11.07. 2단
위당 정인보 ‘조선사연구’
쉬운 한글판으로 읽는다

일제강점기에 국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1893∼1950)의 역작 ‘조선사연구’(사진)가 한글판으로 처음 출간됐다. ‘조선사연구’는 위당이 1935년 1월 1일부터 1년 8개월간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한국고대사 통사(通史)다. 일제의 왜곡된 식민사관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얼을 지키는 탁월한 저술로 평가받으며 당시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혔으나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근 우리역사연구재단이 이를 현대 우리말로 풀고 상세한 주석을 달아 ‘조선사연구’ 상(上)편을 펴냈다. 내년 초 하(下)편이 출간돼 완간될 예정이다. 책임편집을 맡은 정재승 우리역사연구재단 이사는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단 세 명, 즉 위당과 기획자, 문선공뿐이라는 농담이 지식인 사이에 퍼질 정도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며 “훌륭한 역작이 방치되는 것이 안타까워 중학생 이상이면 읽을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3년에 걸쳐 풀어냈다”고 말했다. 번역과 주석은 문성재 중문학 박사가 맡았다.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위당은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우리 고대사를 왜곡하는 일제에 맞서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단군조선부터 5000년의 역사를 관통할 계획이었으나 1936년 8월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을 당하면서 연재도 282회로 중단됐다. 이 연재물은 1946년 서울신문에서 ‘조선사연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1983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담원 정인보 전집’(전 6권)의 일부로 출간됐다.위당은 ‘조선사연구’의 서론에서 국학(國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고 국학 연구의 기초를 실학에서 찾았다. 그는 또 문헌 고증과 답사를 병행해 역사를 다각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초기 민족사학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조선사연구’에서 그는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고 선언하면서 일제의 단군조선 부정론에 대항하고 신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단군을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불러냈다. 또 중국 고대 은나라 사람 기자(箕子)가 동으로 건너와 조선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한서’ 지리지에 열거된 한사군의 군현들에 대해서는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었다”며 한사군이 한반도를 400여 년간 지배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위당은 1935년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아 1934∼38년 안재홍 등과 함께 정약용의 방대한 저술을 망라한 문집 ‘여유당전서’(신조선사) 영인본 간행을 주도하며 실학 발전에 기여했다. 막대한 간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동아일보가 모금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위당의 셋째 딸인 정양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83)는 신간의 발문에서 “아버지는 광복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그것은 잃어버린 내 얼을 되찾는 길이요, 그 얼을 되찾는 길은 국학의 진작(振作)에 있다’고 보았다”며 “1950년 6·25의 변란이 터져 아버지가 북으로 납치되었으니 슬프고 애달프고 원통하다”고 밝혔다.

신성미 기자

[연합뉴스] 2012.11.05.
위당 정인보 "조선사연구" 한글판 첫 발간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중국 역사가들은 우리말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억지로 글자를 짜맞추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물론 이방인들의 그 같은 오독이나 또 그로 인한 와전을 나무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반면에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우리의 구차스러운 행태는 무엇으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 위당(爲堂) 정인보(1893~?) 선생은 저서 "조선사연구"에서 중국 역사가들의 역사 기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국내 역사학계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조선사연구"는 1935년 1월 1일부터 1936년 8월 29일까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정인보 선생의 한국 고대사 저술이다.선생은 단군 조선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통사(通史) 형식으로 집필했다. 특히 선생은 이 책에서 한사군의 한반도 지배설 등 일제강점기 일본 관변 사학자들의 주장을 문헌에 근거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정인보 선생이 국한문 혼용체로 집필한 "조선사연구"의 한글판이 처음으로 나왔다. 우리역사재단이 펴낸 한글판 "조선사연구" 상(上)편이다. 문성재 박사가 국한문 혼용체인 "조선사연구"를 현대 우리말로 옮기고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우리역사재단의 정재승 이사는 5일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조선사연구"는 국한문 혼용체지만 고대 역사책 내용을 한문 그대로 인용한 것이 많아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다"면서 "중고생 이상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현대어로 알기 쉽게 풀어썼다"고 말했다. 정 이사는 "정인보 선생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민족 사학을 계승한 분인데 너무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에 "조선사연구"를 번역을 하게 됐다"면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주장을 문헌 고증을 통해 반박하는 등 현재 "동북공정"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도 이미 1930년대 고증해 밝혔다"고 말했다.정인보 선생은 "조선사연구"의 첫 장 "시조 단군"에서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며 신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던 단군 조선을 역사 연구 대상으로 재인식했다. 중국 고대 은나라 사람 기자(箕子)가 동으로 와서 조선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자동래설"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또 "한서" "지리지" 등에 열거된 한사군의 군현들도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었다"고 주장, 한사군이 한반도를 400여 년간 지배했다는 식민 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정인보 선생의 딸인 정양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조선사연구"는 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자주독립시키려면 남의 장단에 손짓 발짓 허우적대지 말고 내 일을 찾아 단단히 잡아야 된다고" 쓴 글이라고 소개했다. 현대 우리말로 풀어쓴 문성재 박사는 "위당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사연구"의 저술과 신문연재, 대중을 상대로 한 여러 차례의 역사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역사 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 우리의 "얼"을 지키고자 진심으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면서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이웃나라의 역사 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얼"을 지키기 위해 과연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뉴시스] 2012.11.10.
위당 정인보 ‘오천년 간 조선의 얼’…!

【서울=뉴시스】유상우 기자 = 오천 년간 조선의 얼-조선사연구 上 (정인보 지음·우리역사연구재단 펴냄)숙신은 바로 조선이다. 숙신은 초기에 ‘조선’의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고조선의 발상지, 즉 고조선의 옛 도읍 일대를 가리키므로 웅심산과 압록수, 즉 백두산과 송화강에 해당한다. (제7장)‘한서’가 저술되던 당시만 해도 요동만의 바다 면적이 그다지 넓지 않아 동쪽과 서쪽이 서로 마주 보일 정도로 가까워서 번갈아 바다를 건너가 영유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 같은 내막도 모르면서 진나라 장성의 기점까지 압록강 동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헛수고를 한 셈이다. (제9장)‘조선사연구’는 1935년 1월부터 1년7개월 간 ‘오천년 간 조선의 얼’이란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국학자 정인보의 한국 고대사 저술이다.위당(爲堂) 정인보(1893~1950)는 조정에 출사(出仕)한 집안 내력과 조선 양명학을 대표하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영향으로 오랜 기간 유가경전과 제자백가를 위시해 불교, 역사, 언어, 민속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섭렵해 ‘한국학의 독보적인 거성’으로 추앙받은 학자다.서론에서 고조선 역사 연구의 근본을 단군조선 이래로 5000년간 면면히 이어져 온 ‘얼’에서 찾고 한민족의 역사는 바로 이 얼의 역사임을 강조했으며 ‘국학(國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국학 연구의 기초를 실학(實學)에서 찾았다.‘얼’이야말로 주체적인 자아이자 보편적인 인간 존재의 ‘고도리(가장 중요한 본질)’이며 빈 것과 찬 것,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가치의 척도라고 봤다.이채로운 것은 고조선과 한사군, 삼한 소국들, 삼국시대의 지명, 인명, 관명에 대한 독특한 역사언어학적 접근, 분석법이다. ‘조선’이라는 이름에 대한 고증이 대표적인 보기다.위당은 국내외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중국 사서 속의 ‘식신(息愼)’ ‘숙신(肅愼)’ ‘직신(稷愼)’ ‘주신(珠申)’ 등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우리말의 ‘뜻[訓]’을 옮긴 것이 아니라 ‘발음[音]’을 전사(轉寫)한 이름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그러면서 만주어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조선’이 ‘관경(管境)’을 뜻하는 만주어 ‘주신’과 계통적으로 친연관계에 있다고 봤다.


목차


「우리국학총서(國學叢書)」를 펴내며
해 제
일러두기
17. 기루왕 이후 백제와 신라
1. 장령, 사도의 방어시설
1) 장령(長嶺) 2) 사도(沙道)
2. 신라의 지속적인 내치 정비와 사치 금지령
1) 징병 2) 군사 편제 3) 병기 관리
3. 이때의 백제
1) 양국의 장단점과 그 원인 2) 나·제 충돌의 재개
3) 나·제의 거듭된 공방과 수시로 뒤바뀌는 승부
4) 말갈의 침입을 제지 5) 고이왕의 법제 개혁
18. 명림답부의 반정
1. 고구려 태조대왕의 양위와 차대왕의 폭정
1) 직언자의 수난 2) 태조대왕의 변함없는 우애 3) 왕위 선양
2. 요해(遼海)의 정세 변화
1) 국경 방어선의 후퇴 2) 강성해지는 선비(鮮卑) 세력
3) 백성들의 폐위운동
19. 고구려의 부흥
1. 요동 출병과 좌원(坐原) 대첩
1) 요동 출병 2) 좌원 싸움의 경과
2.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치적
1) 국경을 침범한 공손도의 군사를 대파하다
2) 세습귀족제도의 붕괴와 을파소의 등용 3) 진대법의 시행
3. 발기의 자결
1) 고국천왕의 국상과 왕위계승 문제 2) 발기의 원군 요청과 자결
20. 수많은 전쟁 속에 개척된 강토
1. 동천(東川)의 왕위 계승
1) 동천왕의 생장과 그 사람됨
2. 활발한 대외정벌과 복잡한 외교관계
1) 동천왕 초기의 국력 2) 요동 토벌과 위, 오와의 교류
3. 위나라 관구검의 약탈
1) 서안평 싸움과 그 관계 2) 낙랑국 통치 문제
3) 대격돌을 앞둔 양측의 준비와 부여의 국론 분열
4) 비류수, 양맥곡에서의 위군의 연전연패
5) 동천왕의 몽진과 유유의 살신 구국
4. 반도 내의 한인 세력 제거
1) 과거의 정세 2) 백제의 요해 기습 3)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
5. 평양 천도와 동천왕의 붕어
1) 대동강 위에 세워진 또 다른 왕성 2) 9월의 국상
6. 고구려의 성진(城鎭) 확대와 잇따르는 외란
21. 요해 수복
1. 첫 단계의 현토 토벌
1) 미천왕의 왕위 계승 2) 전쟁의 시작
2. 점차 수복되는 옛 강역
1) 서안평 수복 2) 낙랑, 대방 두 군의 수복
3) 극성 출병 4) 난하 부근에서 잇따르는 충돌
22. 백제의 해상 진출
1. 요서 패권 쟁탈전
1) 책계왕과 분서왕의 전사2) 산동의 백제 유적
3) 녹산에서의 부여 습격 4) 모용씨와의 전쟁 5) 비류왕의 즉위
2. 요서에 ‘진평’군을 두다
1) 모용, 우문, 단료의 각축 속에 점차 확장되는 백제의 영토
2) 전쟁 속에도 이어지는 통상
23. 고구려와 모용연
1. 의도된 화친과 석조와의 제휴
2. 북부의 피습
1) 고국원왕 이후의 국력 2) 북도(北都)와 우문씨의 관계
3) 모용연의 침입 4) 무의 북도 대첩과 모용황의 창황한 퇴각
3. 볼모들의 복수
1) 고구려의 볼모 2) 이후의 고구려와 부진의 관계
24. 아아, 대외 진출이 내부 분쟁으로
1. 고구려의 남도(南都)와 백제
1)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 2) 남도에 집중하다
2. 치양(雉壤) 싸움에서 평양 공방전까지
1) 전쟁의 서막 2) 고구려군의 연패와 고국원왕의 전사
3) 백제의 한수 이북으로의 천도
25. 신라의 내정과 외치
1. 어진 임금의 왕위 계승
2. 심화되는 정치 개혁
1) 국법 적용에는 친소와 귀천을 따지지 않다
2) 화백 전통의 제도적 확충 3) 관리의 임용
4) 중농정책의 지속 5) 호민(豪民)과 외래 민호의 정착
3. 신라의 해상 방위
1) ‘동우(東憂)’의 시작 2) 각간 우로의 죽음
3) 유례왕의 일본 정벌 4) 변방의 성들
5) 강세(康世)의 농성과 내물왕의 섬멸전
26. 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
1. 고국원왕 전쟁 이후의 국내외 정세와 상호관계
1) 거란의 당시 위치 2) 후연(後燕)의 두 도읍 화룡과 계의 위치
2. 고구려군의 서진과 부여 회복군의 동진
3. 신라와의 관계 회복
4. 영락 연간의 업적
1) 즉위와 연호 사용 2) 사방으로 펼쳐진 정벌
3) 관미성 정벌과 그 위치 4) 거란 토벌의 장거(壯擧)
27. 전고갑(典故甲)
1. 종교와 학문에 관한 전고들
1) 우리 겨레 공통의 종교와 그 종지 2) 학관(學官)제도와 학교시설
2. 제사에 관한 전고들
1) 천제(天祭) 2) 국사(國社)와 산천 3) 시조묘
3. 예문(藝文)에 관한 전고들
1) 저술과 문헌 2) 문자
3) 문자의 발전단계 4) 과연 누가 그렸을까
4. 불교에 관한 전고들
1) 부진과의 교류와 불교 수용 2) 백제 불교와 인도 승려 마라난타
3) 도랑(道朗)의 삼론종(三論宗) 확립
부록1. 조선사연구부언(附言)
「부언의 서두」
1. 정무론(正誣論) 상편 2. 정무론(正誣論) 중편
3. 정무론(正誣論) 하편 4. 정무론 원문
「부언의 결어(結語)」
「부언에 다시 덧붙임(附言補遺)」
부록2.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
부록3.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부록4. 태대형, 대형, 소형에 관하여
쉽게 풀이한 《조선사연구》 뒤에
번역을 마치면서
위당 선생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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