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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의 한국전쟁

또하나의 한국전쟁

  • 염인호
  • |
  • 역사비평사
  • |
  • 2010-05-26 출간
  • |
  • 722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7696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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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인민군의 선봉에는
10개의 만주조선인 연대가 있었다.”

1945년 말엽 북만주 조선의용군 간부들은 38선이 단순한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사회주의/제국주의 진영의 경계선임을 간파했다. 그들은 38선을 철폐하고 조국통일을 이루기 위해 만주에서 무장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한은 물론이고 소련이 진주한 북한 역시 통일혁명 무력을 양성할 기지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만주 국공내전을 통해 조선청년들을 단련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
실제로 많은 조선청년들이 만주 국공내전에 참전해 단련되었다. 국공내전 이후 4만 명 이상의 청년이 북한으로 이동해 6월 25일 ‘남진’하는 주력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날 새벽 ‘남진’을 시작한 북한 인민군 21개 연대 중 10개는 이처럼 만주에서 단련된 조선인 부대였다.
-"책머리에" 발췌

한국현대사의 잃어버린 퍼즐, 만주 조선인의 삶과 투쟁을 재발견하다

중국사의 일부로만 다뤄졌던 만주 조선인의 역사를 한국 현대사의 일부로 껴안고 새롭게 조명
신문, 당 문서, 문혁 자료, 시와 사진 등 생생한 1차사료에서 퍼올린 만주 조선인들의 육성 재현

그동안 한국사에서 만주 조선인의 역사는 해방과 함께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제시기 강제이주당한 조선 농민의 간도 개척사, 무장독립운동세력의 만주에서의 활약 등은 일제시대사 연구의 맥락에서 주목받았지만, 해방 이후 만주 조선인들은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사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한국전쟁-만주 조선인의 ‘조국’과 전쟁』의 저자 염인호는 ‘한국전쟁’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봉우리 위에서 만주 조선인의 역사를 재구성하면서, 그들이 지닌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뜨거웠던 한반도 조국애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연변, 길림, 목단강시 등에서 꾸준히 발행된 한글신문들, 중국 당안관 문서와 문혁 시기 자료들에서 퍼올린 당대인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잊고 있던 격동기 한국사의 치열했던 현장을 되찾고 온몸으로 역사와 부딪혀야 했던 만주 조선인들의 삶과 투쟁을 다시금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독서가 될 것이다.

만주조선인의 조국애와 민족정체성

한반도 정세에 대한 깊은 관심, 신탁통치나 10월 인민항쟁 등 이슈에 시민궐기대회 등 범사회적 반응
북한 지도자들의 만주 조선인사회에 대한 관심과 영향력 확대

해방 전 중국 관내지방과 소련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동군·북항일련군 출신 조선인 지도자들은 해방과 함께 만주로 들어와 조선인사회를 이끌었다. 그들은 중국인들에 의해 “일본의 앞잡이”, “중국민중을 착취하는 일제의 2등국민”으로 낙인찍혀 민족갈등 속에서 생명과 재산의 위협을 받고 있던 조선인들의 자생적 자위대오를 한반도 조국애로 무장한 조선인 부대로 발전시켰다.
만주 조선인들은 일제시기에도 3·1운동 열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등, 조선인으로서의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그들은 누구보다 민감하게 국내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신탁통치 결정이나 10월 인민항쟁 등 한반도의 이슈에 대해 대규모 시민집회나 파업, 선전전 등의 형태로 적극적인 의사를 표출했다. 한편 북한 지도자들은 만주 조선인들의 조국애를 주목하여 조선인사회 내에서 북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모스크바 삼상회의 당시까지만 해도 좌·우익의 정치적 색채가 없는 보편적 조국애 양상을 띠었던 만주 조선인사회의 분위기는 이후 좌익으로 기울었다. 김일성은 점차 민족의 지도자로 만주 조선인사회에서 크게 부각되었다.

만주를 기지로 조국통일역량을 기른다 : 만주기지론

미·소에 의해 장악된 남북한은 조국통일 역량의 산실이 될 수 없다
국공내전을 통해 청년들을 단련시키고 북한과 연변에서 혁명간부 양성을 계획

팔로군과 함께 만주에 들어온 조선의용군은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조선인 무장대오를 흡수해 조선의용군 부대로 개편했다. 그들은 38선의 분할을 매우 우려 깊게 바라보면서,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세력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통일·독립시키는 것을 조선혁명의 제1단계로 설정하고 중시했다. 이를 위해서는 만주를 기지 삼아 통일혁명역량을 키우는 것이 시급했다. 남한은 물론이고 소련이 점령한 북한 역시 통일혁명의 기지가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 방법은 국공내전에서 조선청년들을 혁명군에 가담시켜 단련하는 것, 북한과 연변 각지에 정치군사학교를 설립하여 혁명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만주기지론’은 실제로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청년들이 이후 입북해 조선인민군으로 편성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한편, 북한과 연변의 정치학교에서 양성된 조선인 간부들도 국공내전은 물론 한국전쟁에서 인민군 또는 중국 지원군 간부로 활약함으로써 실천으로 옮겨졌다.

만주조선인과 북한, 그리고 한국전쟁

북한의 국공내전 지원과 발언권 확대, 채권자의식에 기반한 영토편입 요구
중국공산당, “만주 조선인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이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위의무가 있음”을 인정
국공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은 중공의 유력한 후방근거지로서 중공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조달해주었고, 김일성은 만주 조선인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해 중공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만주 조선인의 의무임을 호소했다. 그로 인해 만주에서 북한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중공은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만주 조선인사회와 북한의 협력이 절실했다. 이를 간파한 북한은 한때 “만주 조선인의 피의 대가”로 연변 영토의 북한귀속을 요구하기도 했다. 비록 영토귀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중공은 “만주 조선인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조선인은 조국이 침략을 받으면 보위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할 정도로 북한과 만주 조선인사회의 유대를 인정해주었다.
만주 조선인부대는 1949년 7월부터 순차적으로 입북하여 최종 10개 연대 규모로 ‘귀환’했다. 지금까지 이들의 입북을 중공의 ‘파병’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지만, <또 하나의 한국전쟁>에서 저자는 ① 중국 공산당 스스로 만주 조선인의 조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임을 인정했다는 점, ② 조선인부대의 간부 및 일반병사들이 만주기지론과 조국애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입북을 ‘귀환’이라 간주했다는 점, ③ 입북은 부대 단위로 이루어진 반면 집단적으로 돌아간 예가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만주 조선 사단의 입북은 중공의 파병이 아닌 조선인의 귀환”이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1949년 7월 두 개의 만주 조선인 사단이 입북했다. 이들은 북한에서 각각 조선인민군 5사단과 6사단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1개의 조선인 사단과 1개의 조선인 연대가 입북했다. 이들은 조선인민군 제12사단과 조선인민군 제18연대(제4사단 휘하)로 개편되었다. 개편되면서 대원들은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해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한국전쟁 개전 후 인민군 제6사단은 짧은 기간 안에 호남 일대를 점령하고 진주를 거쳐 마산까지 진출했고, 사단장 방호산은 이중영웅 칭호를 받았다. 제18연대는 6월 28일 서울점령의 선봉부대로 중앙청을 점령하고 인공기를 게양한 부대로서 ‘서울 18연대’라는 칭호를 얻었다. 인민군 5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남진해서 포항에서 국군과 격돌했고, 부산과 대구에 큰 위협을 주었다.
-본문 발췌

전세변화에 따른 만주조선인의 조국관 변화

인천상륙작전과 북한의 열세,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
피의 대가를 요구하는 채권자의식의 소멸, 만주 조선인사회의 특수성 약화
한반도=조국관의 소멸

남북대결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곧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초기, 만주 조선인부대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이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을 때 만주 조선인사회는 축제분위기였다. 하지만 미군의 참전소식이 알려지자 비관정서가 팽배했다. 상황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반전되었다. 불리했던 전세가 다시금 역전되자, 만주 조선인사회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채권자의식이 사라짐에 따라 자연히 연변의 북한귀속론도 사라졌다. 중공은 순조롭게 연변에 조선족자치구를 성립시켰다. 둘째, 중국 내의 여타 소수민족과 달리 자기 조국(한반도)을 지닌 존재로서 ‘국방의 의무’를 규정받았던 만주 조선인의 특수지위가 약화되었다. 중국 지원군 참전을 계기로 만주 조선인사회는 점차 중국 일반사회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셋째, 두 가지 변화의 귀결로서 만주 조선인의 공식적인 조국관이 변화하게 되었다. 더 이상 한반도는 만주 조선인의 조국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후 1950년대 후반 반우파투쟁, 민족정풍운동을 거치면서 ‘중국유일조국관’이 정착하게 됨에 따라, 만주 조선인들을 일컫는 ‘조선족’이라는 명칭도 일반화되었다.

재만한국독립당의 만주활동과 심양대탈출

한독당의 우익판 만주기지론
광복군 확군과 교민사회 장악시도
국공내전의 결말, 패배에 뒤이은 필사의 탈출

조선의용군 출신 지도자들이 미국의 남한점령을 경계하면서 만주를 기지로 한 조국통일 역량의 배양을 이야기했듯이, 재중 한국독립당의 우익세력 역시 비슷한 맥락의 통일전략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소련의 북한점령은 곧 남한 공산화 시도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만주를 민주기지로 강화하고 미국과 협력하여 북한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애초에 그 구체적 방안은 임정과 광복군을 조기귀국시켜 남한의 정국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임정과 광복군을 강화하기 위해 한독당은 곧 광복군 확군운동에 착수했다. 그러나 관내지방에서 한독당의 광복군 확군운동은 주체의 역량부족과 미국의 임정불승인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수만 명 규모로 입북했던 조선의용군 대오와 달리, 이범석의 지휘하에 1946년 5월 남한으로 돌아온 광복군 대오는 500여 명에 불과했다.
관내지방에서 실패를 경험한 한독당은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중국과 합작하여 민주세력을 다소라도 마련해놓고 남한과 호응하여 북한의 공산세력을 구축”한다는 전략이었다. 만주의 국민당 점령지역 곳곳에서 한독당은 조선인사회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다. 그러나 1947년 공산당의 하계공세 이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은 결정적인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한독당의 활동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8년 고립된 채 중공군에게 포위된 심양시 인근 국민당지구 조선인들은 ‘피의 숙청’을 두려워하며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유산자와 지식인들은 전세비행기로, 가난한 농민들은 걸어서 천진을 향했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남한으로 귀국했다.

1948년 3월 중순, 공산당의 동계공세가 끝나고 포성이 잠시 멎자 심양 조선인들의 대탈출이 감행되었다. 돈이 없거나 지체가 낮은 사람은 걸어서 공산당 통제지역을 통과해 국민당 거점인 금주에, 그리고 천진에 도착했다. 반면 한독당 간부나 유산자·지식인·목회자 등은 미국 수송기를 전세내 절망의 땅을 탈출했다. 비행기로 탈출한 2천여 명을 포함해 만여 명의 탈출자들은 천진에서 배를 타고 남한으로 귀국했다. 남겨진 민주자위군 대원들은 심양함락(1948. 11. 2) 직후 심양 인근 교외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한편 이에 앞서 한독당은 민주자위군 간부양성을 위해 청년 50여 명을 선발해 사천성 성도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보냈다(황포 22기). 그들이 성도 군관학교를 졸업할 무렵, 천하의 대세는 이미 공산당에게 기울어 있었다. 그들은 대만을 거쳐 남한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존재는 한독당의 만주 활동이 거둔 거의 유일한 가시적 성과였다. 곧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들은 곧바로 한강 방어전선에 투입되어 다수가 전사했다. 그들과 한강에서 마주쳤던 인민군이 만주에서 온 조선인 부대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본문 발췌


목차


책머리에
서론

제1부 연변 조선인의 ‘조국’과 한국전쟁
제1장 한국전쟁과 연변 조선인의 ‘조국’
제2장 조선인 부대의 창설·활동과 조·중 민족갈등
제3장 친일잔재 청산투쟁·토지개혁과 위축되는 조선인사회
보론 연변민주대동맹의 결성과 역할
제4장 “연변은 북한에 귀속되어야”
제5장 연변대학 설립 및 체제개편과 북한
제6장 연변 출신 조선인 부대의 활동과 귀국
제7장 한국전쟁 발발과 연변 조선인사회의 대응
제2부 북만주지역 조선인사회와 독립동맹의 조국통일전략
제8장 목단강시 조선인사회와 한반도의 관계
제9장 목단강지구의 민족갈등과 조선인 부대
제10장 독립동맹 북만특위의 활동과 조선의용군의 조국통일전략
제11장 조선인 부대 제164사단의 만주에서의 활동과 한국전쟁 참전
제3부 중국국민당지구 한국독립당의 조국통일전략과 좌절
제12장 한독당의 ‘남한 반공·반소기지’노선과 한국광복군 확군운동
제13장 한국독립당의 만주진출과 남북통일전략
제14장 재만 한국독립당 군대 민주자위군의 위상
제15장 국민당지구 조선인의 남한으로의 대탈출, 그리고 만주 반공기지정책의 좌절

결론
부록: 참고문헌 / 인명색인 / 기타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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