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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유고 4

고산유고 4

  • 윤선도
  • |
  • 한국고전번역원
  • |
  • 2015-06-30 출간
  • |
  • 152 X 225 mm
  • |
  • ISBN 978892840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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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윤선도의 고산유고(孤山遺稿) 최초완역!!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와 더불어 국문 고전시가의 3대 시인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의 문집이 마침내 국내 최초로 전 4권으로 완역되었다.

■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의 삶 ː 혼란의 시대에 대처하는 지식인의 자세
고산이 살던 시대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당파싸움의 격화와 사화(士禍), 광해군의 즉위에 따른 정치적인 혼란, 이이첨(李爾瞻) 세력의 전횡, 인조반정, 이후 일어난 병자호란의 참화, 효종의 승하와 이를 둘러싼 예송 논쟁 등 어느 하나 조용히 넘어갈 수 없는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산은 부침을 거듭하는 한평생을 살았다.
1616년(광해군8) 고산은 30세의 나이로 이이첨의 전횡을 탄핵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 정계에 갓 입문한 신예 관료가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과 직접 대결한 이 일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후 고산의 삶을 결정지었다. 고산의 강직한 성품이 잘 드러난 대신에 결과적으로 이이첨 세력들로 인하여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는 만년에까지 계속되는 유배의 시작이 된 것이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도 고산은 바로 출사하지 못하고 42세인 1628년(인조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면서부터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다. 뒷날의 효종인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에 제수되고, 주요 관직을 거쳤으나 결국 정적들의 견제로 고향 해남(海南)으로 물러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고산은 배를 타고 강화로 가다가 도성이 함락되고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렸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고산은 ‘왕을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不奔問]’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자신의 사부였던 고산을 특명으로 부르자, 〈진시무팔조소(陳時務八條疏)〉를 올려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붕당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당시의 실력자인 원두표(元斗杓)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다시 관직을 삭탈당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69세인 1655년(효종6)에 다시 서용(敍用)되었지만 이후 끊임없는 반대로 결국 퇴직하고 말았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고산은 73세로 효종의 산릉을 간심(看審)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때 본격적인 예송 논쟁이 시작되면서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하였으나, 이 논쟁에서 패하여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었다. 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고산은 부용동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5년여 간 유유자적하게 보내다가 1671년에 85세로 별세하였다.
위에서 보듯 고산의 일생은 청년기에서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임병양란의 사회적 혼란과 사색당파의 어지러운 정치 현실 속에서 파란만장한 부침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신념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자신의 주장을 펴고 불의와 맞서 싸우다 박해를 받았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고 있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문인의 이미지와는 사뭇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인은 늘 혁명가를 꿈꾸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지식인으로서 혼란한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 살아간 윤선도의 치열했던 삶은 그 시대 못지않게 혼란한 오늘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 《고산유고》 ː 문학서이자 경세서

1.
《고산유고》 번역서는 모두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에는 시 250여 제가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간혹 시편에 주석이 붙어 있어 시적 성취뿐 아니라 고산의 개인사와 관련한 여러 상황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제2권에는 소(疏)와 서(書)가 수록되어 있다. 소(疏)에는 이이첨 등의 주벌을 청한 〈병진소〉, 양전(量田)의 문제에 대해 논한 〈을해소〉, 새로 즉위한 효종(孝宗)에게 진언한 〈기축소(己丑疏)〉, 삭출(削黜)의 계기가 된 〈논원두표소〉, 정개청을 변호하고 그의 문집 간행을 청한 〈국시소〉, 자의대비 복제의 삼년설을 주장한 〈논예소〉 등이 실려 있다. 서(書)는 안부 편지와 특정 사안의 문답이 많다.
제3권에는 서(書), 제문(祭文), 서(序), 기(記), 설(說), 비명(碑銘), 잡저(雜著), 의(議), 잡록(雜錄) 등 다양한 종류의 산문이 실려 있다. 해남에 있으면서 지은 〈금쇄동기(金鎖洞記)〉, 복제(服制) 문제로 삼수(三水)에 유배 갔을 때 지은 〈서회(敍懷)〉, 효종의 산릉을 정하기 위해 올린 〈산릉의(山陵議)〉 등이 실려 있다.
제4권은 별집(別集)으로 장편시(長篇詩)와 부(賦), 논(論), 책(策) 등 각종 과제(科製)로 지은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뒤에 특히 국문 문학의 백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고금영(古琴詠)〉, 〈어부사시사〉, 〈몽천요(夢天謠)〉,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이 실려 있다. 끝에는 부록으로 1677년(숙종3) 홍우원(洪宇遠)이 지은 시장(諡狀)이 있다.

2.
조선 시대 사대부들에게 한시는 단순한 문학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가진 지적 역량이나 학문적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전하는 대부분의 문집에는 한시와 한문 산문이 대등한 비중으로 수록되어 있거나 때로는 한시만 수록되어 있는 경우까지도 있다.
그런데 고산 윤선도는 우리에게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와 함께 고전 국문시가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일컬어져 왔고, 많은 사람들이 고산을 〈오우가〉 혹은 〈어부사시사〉의 작가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산의 문집을 살펴보면 국문시가는 문집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 대부분은 한시나 한문으로 쓴 문장들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문학창작 활동은 한문학이 중심일 수밖에 없다고 볼 때, 국문학 작가로서 고산의 문학적 성취를 살피는 것은 고산 문학의 극히 일부만을 살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산에게 강호에서의 생활은 타의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었다. 하지만 격동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부침을 거듭하던 고산의 일생은 오히려 강호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흥취를 얻고 향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얻은 심미적 체험은 그에게 시작품을 통해 자연 경물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창작 동기와 여건을 아울러 얻게 해 주었다. 따라서 사물의 다양한 모습은 그의 시에서 중요한 주제가 된다.
《고산유고》의 경우 번역서 제1권과 제4권에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국문시가보다 분량도 훨씬 많을 뿐 아니라 내용 또한 매우 풍부하고 다양하다. 고산이라는 한 작가의 작품이 국문과 한문으로 표현 매체를 달리하여 나온 것이라고 본다면, 고산의 국문시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한문으로 창작된 시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완간된 《고산유고》 번역서는 고산의 한시에 대한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기존의 국문시가 연구도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고산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것은 운문이 아니라 산문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이첨의 전횡을 탄핵한 〈병진소(丙辰疏)〉의 일부를 보자.

신하 된 자가 만약 나라의 권세를 한 손에 쥐게 되면, 자기의 복심(腹心)을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여 위복(威服 상벌(賞罰))의 권한이 자기에게서 나오게 할 것입니다. 설사 어진 자라도 이렇게 하면 안 될 것인데, 더군다나 어질지 못한 자가 이렇게 한다면 나라가 또한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지금 성상(聖上)께서 임어(臨御)하시어 군군신신(君君臣臣)하는 때이니 당연히 이와 같은 사람은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삼가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이첨(李爾瞻)이 하는 짓을 보건대, 불행히도 여기에 근사(近似)하기에, 신은 삼가 괴이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신하가 임금의 권세를 가로챘을 때의 문제점을 직접 거론하고 있다. 고위관직에 있는 상대의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숨김없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산은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갔다. 게다가 당시 많은 선비들이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북쪽으로 유배를 당했는데, 이이첨은 이것마저도 불쾌하게 여기고 “북쪽으로 귀양 간 사람들이 호지(胡地)에 가까이 있는 만큼 필시 오랑캐와 내통할 것이니, 모두 남쪽 변방으로 옮겨야 한다.”라고 하여 고산은 기장(機張)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인조반정 후에는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로만 믿고, 제멋대로 기세를 올리며 교만하게 굴자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였으므로, 고산이 또 상소를 올렸다.

원두표는 재주는 많아도 덕은 없고, 이익만 좋아할 뿐 의리는 없으며, 성질이 사납고 음흉하며, 표독스러우면서 화심(禍心)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가에서 이야기하는 자들이 모두 좋게 죽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원두표를 먼 외방에 한가히 머물게 하여 공신(功臣)을 보호하는 도리를 곡진히 하소서.

이 때문에 고산은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다. 그런데 원두표는 이때부터 자신을 억제하며 단속하려고 힘썼으므로, 그가 생애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공이 상소한 덕분이라고 사람들이 말하였다고 한다.
예법 문제로 상소를 올리려고 할 때 동료가 그 소를 그만두도록 권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고산은 그에게 이렇게 답하였다고 한다.

나의 소장(疏章)이 가로막혀서 위에 진달할 수 없다면 그만이지만, 어찌 내가 스스로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처음부터 나의 이해를 계교(計較)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위세(威勢)와 화복(禍福)에 겁을 먹은 나머지 뜻을 굽혀 세상에 아부할 수가 있겠는가.

당당하고 이해에 얽매이지 않는 고산의 기상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 《고산유고》 번역서 완간의 의미
이제까지 고산의 문학에 대해서 우리는 주로 국문 시가 위주의 연구를 해 왔다. 그 이유는 그의 작품 대부분이 난해한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2011년 하반기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고산유고》 번역서가 전 4권으로 완간됨으로써 그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국문시가 외에 그동안 살피지 못했던 한문으로 이루어진 고산 문학의 정수를 쉽게 살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기존에 다루어 왔던 국문시가에 대한 이해 역시 보다 더 깊이 있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껏 국문문학 중심으로 논의되었던 고산의 문학세계 전반을 비로소 균형 있게 총체적으로 살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번역서의 발간은 매우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물론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대하여 소신을 밝힌 상소문, 예송 등 당대 주요 논쟁에 대하여 소견을 피력한 것이 많아 정치적,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연구 자료로 활용 가치가 매우 높다. 이 번역서가 발간됨으로써 조선 중기의 정치 ? 사상 ? 문학 등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추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목차


일러두기 ‥ 4


고산유고 제6권 상 별집

시 詩
인간의 역사책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각기 다른 왕조의 임금을 섬긴 내용을 접하고서 느낀 소회를 적다 신해년 人間讀史各君臣 辛亥 ‥ 11
문인이 〈육아〉 시편을 전폐한 것에 대하여 신해년 門人廢蓼莪 辛亥 ‥ 16
시름 임자년 愁 壬子 ‥ 19
전당의 호수를 봄날에 바라보며 錢塘春望 ‥ 23
맑은 바람 밝은 달은 돈 한 푼 안 들여도 바로 나의 것 신해년 淸風明月不用一錢買 辛亥 ‥ 28
눈을 무릅쓰고 고산을 방문하다 冒雪訪孤山 ‥ 33
가구가 수레보다도 적은 사람 家具小於車 ‥ 40
객의 마음을 흐르는 물에 씻다 무자년 客心洗流水 戊子 ‥ 50

부 賦
취선루의 과제(科題)에 답한 부 醉仙樓賦 ‥ 57
스승이 천자에게 일러줄 때에는 북면(北面)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 詔於天子無北面賦 ‥ 64
위로 올라가서 옛사람과 벗을 하는 것에 대한 부 신해년 尙友賦 辛亥 ‥ 72
사마천(司馬遷)이 자기의 저서를 명산에 보관한 것에 대한 부 著書藏名山賦 ‥ 79

논 論
동중서와 가의의 우열에 대해서 논하는 글 董仲舒賈誼優劣論 ‥ 86
꽃가지 하나를 꽂은 것에 대해서 논하는 글 簪花一枝論 ‥ 95
증점이 요순의 기상을 지닌 것에 대해서 논하는 글 曾點有堯舜氣象論 ‥ 100

책 策
봄에 대한 대책문 對春策 ‥ 107
병가의 장기에 대한 대책문 對兵家長技策 ‥ 120
명절에 대한 대책문 對名節策 ‥ 134
비오고 볕 나는 것에 대한 대책문 對雨暘策 ‥ 147
법제에 대한 대책문 對法制策 ‥ 168
경전의 종지에 대한 대책문 對經傳宗旨策 ‥ 179

표전 表箋
당나라 한림학사 백거이가 장수를 통제하고 군대를 통령하는 자리에 중관을 임명하지 말라고 청한 것을 본떠서 지은 표문 擬唐翰林學士白居易請勿以中官爲制將都統表 ‥ 187
태산의 오송을 대신하여 대부에 봉해 준 것을 사양하는 표문
代泰山五松辭封大夫表 ‥ 193
고려 예부 원외시랑 곽여가 약두산 한 봉우리를 하사해 준 은혜에 대해 사례한 것을 본떠서 지은 전문
擬高麗禮部員外侍郞郭輿謝賜若頭山一峯箋 ‥ 200
당나라 한림학사 이강이 역적의 재산을 절서의 백성들에게 하사하여 금년의 조부로 대신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을 본떠서 지은 표문 擬唐翰林學士李絳請以逆人資財賜浙西百姓代今年租賦表 ‥ 206


고산유고 제6권 하 별집

가사 歌辭
산중신곡 山中新曲 ‥ 217
만흥 漫興 ‥ 217
조무요 朝霧謠 ‥ 218
하우요 夏雨謠 ‥ 219
일모요 日暮謠 ‥ 219
야심요 夜深謠 ‥ 219
기세탄 饑世歎 ‥ 219
오우가 五友歌 ‥ 220
산중속신곡 2장 山中續新曲 二章 ‥ 221
추야조 秋夜操 ‥ 221
춘효음 春曉吟 ‥ 221
고금영 古琴詠 ‥ 221
반금에게 주다 을유년 贈伴琴 乙酉 ‥ 224
초연곡 2장 初筵曲 二章 ‥ 225
파연곡 2장 罷宴曲 二章 ‥ 226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 227
봄 ‥ 227
여름 ‥ 230
가을 ‥ 233
겨울 ‥ 236
어부사 여음 漁父詞餘音 ‥ 241
몽천요 3장 夢天謠 三章 ‥ 242
견회요 5편 遣懷謠 五篇 ‥ 245
우후요 雨後謠 ‥ 247


고산유고 부록

시장 諡狀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행 통정대부 예조 참의 윤공의 시장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政大夫禮曹參議尹公諡狀 ‥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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