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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점기계 신동파

득점기계 신동파

  • 허진석
  • |
  • 글누림
  • |
  • 2014-10-30 출간
  • |
  • 287페이지
  • |
  • 160 X 218 X 20 mm
  • |
  • ISBN 9788963272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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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현대 한국농구의 윤곽을 완성하는 데 기여한 선구자

1. 한국농구의 윤곽을 완성하다

신동파(申東坡, 1944년 9월 2일~ )는 1960년대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의 주요 선수였으며 훗날 여자실업농구팀 태평양화학과 여자농구 대표팀, 남자프로농구 SBS 스타즈팀에서 지도자로 활약하고 대한농구협회(KBA)의 부회장을 역임한 농구인이다. 광복 이후 한국 남자농구 스타 계보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로서 한국 남자농구가 1969년 최초로 아시아 남자농구 정상에 오르는 데 기여한 주요 인물군(群) 가운데서도 첫 손에 꼽힌다. 그는 두 손을 이용해 던지는 슛, 즉 ‘투 핸드 세트 슛(Two Hand Set Shot)’이 널리 사용되던 시기에 농구를 배웠다. 그러나 성장기에 독학으로 한 손만을 이용해 던지는 ‘원 핸드 점프 슛(One Hand Jump Shot)’으로 전환한 뒤 이를 체득함으로써 전례를 찾기 어려운 높은 득점 능력을 발휘하였다. 즉, 원 핸드 점프 슛이라는 새로운 트렌드(trend)를 받아들여 완성한 인물인 것이다. 또한 신동파가 현역으로 활약하던 시대에 한국의 남자농구 대표팀은 물론 그가 소속한 중소기업은행 남자농구팀에서도 그를 중심으로 한, 득점 전술을 수립해 수행함으로써 높은 득점 능률을 실현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남자농구는 ‘슈터(shooter)’를 중심으로 한 공격 전술이라는 독특한 득점 방식을 체질화하였다. 또한 이는 한국 남자농구의 팀 전술로 승계되어 최근의 남자농구 대표팀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신동파는 현대 한국농구의 윤곽을 완성하는 데 기여한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이며, 프로농구가 출범하여 인기 종목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는 근원이기도 하다.

2. 신동파라는 농구선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그러므로 신동파라는 농구선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활동은 10대 후반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후 특히 국제무대에서 성취한 범상치 않은 내용으로 이뤄졌다. 그가 우리 농구사에 남긴 족적은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닌다. 신동파는 한국 남자농구 사상 최초이자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세계선수권대회(1970년 유고)에서 최고 득점자(득점왕)가 되었다. 아시아 무대에서는 당대 최고의 득점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필리핀을 비롯한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신동파는 필리핀, 대만 등지에서 매우 존경을 받은 슈퍼스타이다. 특히 필리핀에서는 그의 이름이 ‘복(福)’, ‘행운’, ‘만사형통’ 등과 같은 의미를 지닌 보통명사로 사용됐을 정도로 신적인 추앙을 받고 있다. 현역 시절의 신동파는 절륜한 경기력을 구사하는 최고의 선수로서 스포츠 코리아를 대표하였으며, 해외에서는 높은 인기를 구가한 몇 안 되는 ‘한류(韓流) 스타’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한류란 2000년대 들어 등장한 용어로서 한국의 드라마와 가요 등 대중문화가 일본과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큰 인기를 모으며 현지화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런 점에서 신동파를 현재와 같은 한류의 개념에 포함시키기는 물론 어렵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국위선양을 스포츠-체육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던 1960년대 이후 국가아마추어주의(State Amateurism)의 시대에 신동파는 수출 가능한 최고의 문화 콘텐트 가운데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파가 활약한 시대는 한국 남자농구가 아시아 정상을 지향하면서 자기 개혁을 위한 노력을 경주한 시기이다. 미국인 코치를 초빙하여 수행한 일련의 훈련 프로그램 개혁과 해외 전지훈련 등으로 이전과 분명히 차별화된 경기력을 습득해 가는 과정에 있었다. 신동파는 이 시기의 대표적 인물로서 세심한 고찰과 평가가 필요하다. 1960년대 초·중반의 한국농구는 아시아 3~4위 수준의 경기력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시아 열강의 대열에 진입하는 시기는 1969년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와 1970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우승할 때이다. 이 시기는 신동파가 선수로서 절정의 경기력을 발휘하던 시점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1960년대 후반의 한국 남자농구가 거둔 성취를 평가하는 작업은 신동파의 역량과 기여에 대한 심도 깊은 관찰과 분석을 전제로 해야 한다. 또한 그 경기 내용과 기술, 기술 습득 과정과 훈련의 내용 등을 기록하여 자료화하는 일은 한국 스포츠 역사의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닌다. 이는 현재의 한국농구, 나아가 한국의 스포츠가 지향하는 국제수준의 경기력 확보와 지도자 및 선수의 자질 향상이라는 목표의 실현을 위해서도 주요한 참고 자료이자 선례의 일부로서 검토할 가치가 충분하다.

3. 신동파의 활동에 관한 본격적인 저술

그런데 신동파의 활동에 관한 본격적인 저술이나 학술 수준의 연구는 충분하지 않는 상태이다. 신동파가 현역 선수로 활동하던 당시의 기록은 신문이나 잡지, "대한뉴스" 등에 보도된 내용이 전부이다. 이런 자료들은 그나마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신동파의 활동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한국이 아니라 필리핀에서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필리핀의 매체들은 신동파가 현지에서 열린 국제경기에 참가했을 때의 활약상과 기록을 한국의 미디어에 비해 세밀하게 반영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신동파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신문이나 잡지 등의 매체에 그가 은퇴한 뒤에 서술한 회고록 형식으로 흩어져 있다. 이러한 회고는 주로 개인적 체험을 술회하는 수준에 그쳐 심도 깊은 이해와 평가를 위한 자료로서는 매우 불충분하다. 또한 신동파와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 등의 회고가 각종 인쇄 매체에 산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신동파가 서술하지 않은 내용의 일부를 단편적으로 취합함으로써 그 윤곽을 짐작할 수는 있다. 사정이 이러한 까닭에, 신동파에 대한 생애사적 기록은 대부분 신동파 본인이 남긴 회고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기술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현존 인물이라는 점에서 본인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술 채록을 통해 미시적 확인이 가능하다. 이 역시 서둘러야 할 작업임에 틀림없다.
한편으로, 신동파 개인에 대한 문헌과 구술을 통한 생애사 검토 외에 그가 수행한 훈련과 경기의 내용에 대한 기록과 검토 역시 불가결하다. 왜냐하면 스포츠에 있어서 기능과 정신적 의지의 표현은 경기를 통하여 구현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빠뜨리고서는 결코 탁월한 경기인의 제대로 된 모습을 분명히 재현해낼 수가 없다. 신동파의 경우,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장 바람직한 검토의 대상은 그가 현역 선수로 활약할 당시의 시각 자료이다. 그 가운데서도 동영상 자료는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어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는 유력한 도구가 된다. 신동파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한편, 슈터 중심의 경기 운영이라는 전통을 확립하게 만든 특출한 슛 능력에 대해 분석하고 확인하는 데 동영상만큼 효과적인 도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자료의 질과 양은 매우 부족한 수준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국내·국외를 막론하고 비슷한 상황이라고 판단된다. 국내에는 정부기록물인 ?대한뉴스?를 제외하면 온전한 동영상 자료를 찾기 어렵다. 일본이나 대만, 필리핀 등지에 1960~1970년대 남자농구 경기 자료가 잔존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으나 그 존재 유무는 2013년 3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신동파가 출전한 경기의 전(全) 시간을 분석할 수 있는 동영상 자료는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신동파 본인이 소장한 자료 가운데 1980년대 국내 텔레비전 방송(KBS)을 통하여 방영된 것으로 보이는 약 5분 분량의 경기 동영상이 있다. 이 동영상은 1971년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팀이 대만과 벌인 결승리그 경기 장면을 담고 있다. 이 동영상을 통하여 아쉬운 대로 전성기 신동파의 슛 동작을 검토할 수 있다. 이와 함께 1969년 12월 6일자로 녹화된 ?대한뉴스?보도 화면에서 신동파의 정면 점프슛 동작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동영상 검토에는 물론 제한점과 한계도 있다. 첫째, 짧은 동영상 자료를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를 근거로 삼았으므로 표본수가 매우 부족하다. 따라서 표본수가 충분할 경우에 비해 오류의 가능성이 낮다고 볼 수 없다. 둘째, 동영상 자료가 신동파의 전형적인 슛 자세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에 과학적인 유추 내지 해석에 의존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동파의 현역 시절 경기 모습에 대한 시각적 검토와 분석은 그가 남긴 탁월한 기록과 본인 또는 주변 인물의 기억을 재구성한 문헌 및 일련의 구술과 더불어 의미 있는 수준에서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도록 외연을 확대하게 해준다. 이 가운데는 최초로 발굴된 자료가 상당수이며, 따라서 제한적인 범위를 뛰어넘는 의미 부여가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하여, 신동파에 대한 문헌 조사와 구술 면담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활약한 당시의 한국 남자농구 주변 인물들을 함께 인터뷰하여 신동파의 존재를 통하여 이룩한 한국 남자농구의 의미 있는 성과를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경기력 향상과 한국 남자농구가 체험하게 된 패러다임의 변화 및 정체성의 확정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구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를 위하여 당대와 이후의 주요 문헌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신동파는 물론 그와 함께 활약한 당대의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즉 김인건?이인표?방열?박한?최종규?하의건?유희형?최영식?김무현?조승연 등의 구술을 채록하였다. 이들의 구술을 통하여 당시 남자농구 대표팀의 운영과 훈련 내용, 주변 상황과 신동파의 훈련 및 경기 내용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가능했다. 또한 신동파 농구의 실체로서 신동파의 경기, 특히 슛 동작 및 경기 내용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신동파의 농구 및 그 경기력의 과학적인 데이터화를 위한 가능성도 확인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1960~1970년대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의 운영과 훈련 내용을 현재 공간 위에 선명하게 구현한다. 필리핀?대만?일본 등에 열세를 보이던 한국 남자농구가 아시아 정상급 경기력을 갖추게 되는 과정이 세세히 드러난다.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학술 부문, 특히 체육사 연구의 유력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으므로 그 가치가 적지 않으리라 기대한다. 또한 신동파라는 특출한 선수를 매개로 확충된 콘텐츠를 추출해 특히 현재와의 관련성이라는 관점에서 생산적 학습의 경험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동파는 뛰어난 득점 기술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물론 아시아를 넘어 세계무대에서도 경쟁력을 발휘한 한국 남자농구의 대표적인 스타플레이어였다. 그는 한국인 최초이자 유일한 세계농구선수권대회 득점왕(1970년 유고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경기당 32.6점)으로 국제농구연맹(FIBA)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남긴 기록은 2012년 3월 현재까지 역대 2위에 해당할 만큼 탁월한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신동파는 투 핸드 점프슛 또는 투 핸드 세트 슛이 혼용되던 시기에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술에 속한 원 핸드 점프 슛을 완전히 체득하여 본격적인 슛 플레이를 수행하였다. 그는 높은 릴리스 위치와 일관된 슛 모션을 통하여 매 경기 기복이 적은 균일한 경기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수행한 경기력과 그에 따른 업적은 훗날 등장하는 이충희?김현준?문경은 등 우수한 슛 전문 선수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국 농구사에서 신동파는 광복 이후 첫 대중스타라고 할 수 있는 김영기의 뒤를 이어 남자농구의 가장 대표적인 인기선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남자농구 선수로서 그의 경기력과 인기에 버금가는 인물로는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하는 이충희,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해 모든 연령을 초월해 신드롬을 일으켰던 허재가 있다. 이 가운데 이충희는 신동파의 경기 스타일과 슈터 중심의 농구라는 콘셉트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직접적인, 또한 마지막 계승자로 평가할 수 있다. 신동파는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체득해 자기화함으로써 세계적 수준의 경기력을 확보한, 한국 농구 선수로서는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그를 통하여 선진 기술의 신속한 도입과 숙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신동파는 한국 남자농구가 1969년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와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잇달아 제패하면서 아시아의 정상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한국농구는 1967년 유니버시아드 2위, 1970년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 11위 등 한때 세계 농구의 정상권에 근접한 경기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2014년 현재 한국농구의 위상은 세계무대는커녕 아시아에서도 정상권에 머무르고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할 때, 신동파의 개인적 분발과 그를 둘러싼 한국 농구계의 노력은 교훈과 모범으로 삼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목차


프롤로그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전설의 시작
야구왕 박현식을 꿈꾼 갈비씨 소년
야구에 버림받고 농구의 부름을 받다
신동파의 롤 모델, 위대한 체육인 김영기
60년 전에 마이클 조던의 점프슛을 던지다
김영기를 이긴 고교생 국가대표, 한국농구의 탑건이 되다

신동파, 미국을 보았다
한국농구는 미국농구를 직수입했다
기린아 이성구
바이런 반하트와 YMCA농구
전봉운, 존 번, 내트 홀맨
미8군 장교 찰리 마콘과 제프 고스폴
NBA가 안방에 들어왔다
제3공화국
면도날 같은 사나이, 마콘
마콘, 한국을 떠나며 고스폴을 소개했다
한국농구 미국을 누비다

신동파의, 신동파를 위한, 신동파에 의한 농구
신동파 찾기
동파스 플레이와 G1, G2
한국 남자농구, 최초로 아시아를 제패하다!
세기의 대결, 축구 vs 농구 술내기
한국농구 역사상 유일한 세계대회 득점왕
응급실에서 경기장으로, 마닐라의 전율
신동파라는 이름의 한류(韓流)
신동파의 유산, 이충희와 허재

에필로그 : 황혼의 신화
신동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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