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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전투

진주성 전투

  • 지승종
  • |
  • 알마
  • |
  • 2014-12-30 출간
  • |
  • 176페이지
  • |
  • 140 X 190 mm
  • |
  • ISBN 979118543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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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옛 기록으로 생생하게 되살린 진주성 전투의 덧칠되지 않은 참모습!

기획의도
삶터의 뿌리 ‘지역’에서 한국문화의 섬세한 결을 짚다
서울 인구 1000만, 이를 포함한 수도권 인구 2500만. 한국사람 절반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이 메갈로폴리스에 살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 그 밖에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거의 모든 것이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오늘날 한국 삶의 표준화는 ‘서울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고, 삶을 보는 관점 또한 서울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나머지 곳은 뭉뚱그려 ‘지방’이라 불리며 이들이 제각각 지닌 개성은 ‘주변’ 또는 ‘변방’의 것으로 밀려나고 있는 현실이다. 여가 수요가 늘고 관광과 여행이 흥하면서 지방에 대한 관심이 느는 듯 보이지만 이것 또한 각 지역을 타자화하는 시선일 뿐이다. 지방을 관광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그 나름의 빛깔을 이해하고 섬세한 결을 짚어볼 때 한국문화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에 알마 출판사는 ‘한국문화’ 시리즈를 통해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삶의 현장, 살아 숨 쉬는 공간인 여러 ‘지역’이 품은 가치에 주목한다. 그 시작으로 경상남도 진주의 문화를 톺아보는 책들을 ‘진주 문화를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준비했다. 이 시리즈는 ‘진주의 옛 건축’ ‘진주성 이야기’ ‘진주농악’ 등으로 이어지며, ‘진주성 전투’ ‘논개’ 등 이전에 소개되었던 주제를 복간해 재조명한다. 단순히 ‘지역의 한 사례’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주체’로 진주 문화를 자리매김하고 살펴보는 일은 한국문화가 지닌 다양한 빛깔과 섬세한 결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신선한 기회가 될 것이다.

‘성웅이 이끈 호국의 역사’를 넘어 재조명하는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
영화 <명량>이 10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임진왜란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이 여전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단편적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에는 조선 사회의 정체와 저력에 대한 무지와 경멸이 있다. 도피만을 거듭하는 무능한 임금과 조정, 패전만을 거듭하는 무력한 관군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못난 조정을 대신해 승전을 이끈 신화적인 성웅들이 있다.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는 이순신이 그 선두이며 그 뒤로 곽재우, 사명대사와 같은 의병장들이 뒤를 잇는다. 이런 인식은 소설, 드라마, 영화 등 수없이 많은 매체에서 반복되어왔을 만큼 극적이지만 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이기도 하다.
전쟁은 조선이 갖고 있는 한계만이 아니라 저력도 드러냈다. 전쟁에 참여했던 동아시아 3국 중 7년여의 전쟁이 끝난 후 무너지지 않은 정체는 오로지 조선 하나였다. 이를 몇몇 인물들의 힘만으로 돌리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평가일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런 이해는 그 전쟁의 기간을 치열하게 견뎌내야 했던 수많은 조선 민중의 핏물 배인 경험을 의병과 피해자로 단순화하며 무대 뒷편으로 밀어낸다. 전투 과정에서 있었던 관군과 의병, 민중의 협력은 조선이 어떻게 전쟁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진주성에서 있었던 두 차례 전투를 지금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용사일기》 《난중잡록》 《고대일록》 등 다양한 사료를 통해 복원한 진주성 전투의 면면은 성웅들의 무용담으로 덧칠된 임진왜란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두 전투 돌아보다
《진주성 전투》는 남강 가 험준한 절벽 위에 석벽을 두른 천험의 요새 진주성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경상우도의 거점이자 호남을 방어하는 울타리였던 이곳에서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한국 전쟁사에서도 손꼽히는 치열한 전투가 두 차례 있었다. 이 책은 진주대첩의 빛나는 승리를 이끌고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뜨거운 혈전을 치러낸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되돌아본다.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에 엄격히 기반하되 되도록 쉬운 우리말로 풀어 써 진주성 전투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며, 임진년과 계사년의 전황을 오늘날의 지리에 비춰 설명해 공간적 이해를 도왔다.

▶임진년 진주대첩, “온 나라가 함몰되고 남은 곳이 적으니 다만 이 한 성에 나라의 명맥이 달렸다”
임진왜란의 전황을 뒤집은 전투를 꼽으라면 단연코 바다의 한산대첩과 육지의 진주대첩이 첫 두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한산대첩은 일본군의 제해권을 빼앗고 전라, 충청에서 황해, 평안도에 이르는 조선의 서부 지역을 지켜낸 핵심 전투였다. 그러나 이 전투의 성과는 제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의 큰 승리가 없었다면 무의미했을지 모른다. 관민이 합심하여 일본군 3만여 명의 총공세를 저지함으로써 일본군의 전라 지역 입성을 막아냈을 뿐 아니라 일본 수군과 육군의 협격을 완전히 분쇄했다. 진주성에서의 패전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것을 꺼릴 정도로 일본군의 충격은 컸다. 특히 이 전투와 이어 벌어진 행주대첩에서 연이어 일본군이 패전하면서 전황은 완전히 뒤집어지게 되었다.
《진주성 전투》는 천험의 요새였던 진주성의 입지와 성벽의 구성, 조선 관군과 의병의 전략 전술과 무기 체계, 전투 상황을 알기 쉽고 명쾌하게 복원했다. 임진왜란 이전에 평범한 지방관에 불과했던 진주 목사 김시민이 놀라운 승리를 이끈 이야기가 꾸밈없는 진솔한 교훈을 준다.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 “의를 지켜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였으니 그 정충대절精忠大節이 천지간에 빛나다”
진주대첩의 승전은 안타깝게도 이듬해 참혹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제1차 진주성 전투의 패전에 대한 복수와 조선 남부 점령을 노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총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격한 것이다. 진주성의 군사는 수천에 불과했으나 일본의 군사는 10만에 가까운 대군이었다. 명나라 군의 소극적 태도로 인한 외교적 혼선과 조정의 혼란이 낳은 중과부적, 고립무원의 상황이었다. 임진왜란에서 가장 참혹했던 이 전투에서 사력을 다해 싸운 관군과 의병들 그리고 그들에 기탁해 성에서 전란을 피하고자 했던 백성까지 모두 6만에 이르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진주성 전투》는 그동안 ‘조국을 위한 장렬한 희생’에 초점을 맞추어 알려졌던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되살려냈다. 치열했던 전투 상황, 패전의 원인과 결과, 전체 전황에 영향을 미친 바를 분명히 밝히고 이 혈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본다.

책속으로 추가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는 10만에 가까운 적군이 진주성을 에워싸고 성을 함락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이렇게 적의 대군을 맞이하여 위기에 처했지만, 장기간 포위에 따르는 식량 부족 문제만 없다면 지킬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한 곳이 바로 진주성이었다. 살핀 바와 같이 진주성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분히 신뢰할 만한 천험의 요새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진주성 전투의 바탕에는 아군의 장기인 수성전에 대한 자신감과 더불어 진주성의 견고한 성지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_38쪽

2장 빛나는 승리
임진왜란 일어나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대마도에 모여 있던 일본군 가운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소 요시토시宗義智(대마도주) 등이 인솔한 제1진이 바다를 건넜다. 부산포와 동래를 차례로 함락한 일본군은 전장의 피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서울을 향해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오랜 세월 전란을 겪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왔던 이 땅의 백성들이 일본군의 총칼 앞에 유린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_41쪽

진주는 호남의 보장保障이니
일본군은 처음에는 진주로 진출하는 길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려 나서지 않았다. 진주에서 산음·함양을 거쳐 팔량치를 넘는 길보다는 의령 정진에서 거창·안음을 거쳐 육십령을 넘는 길이 더 좋은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북상하던 일본군은 정진과 거창을 경유하는 호남 침입로가 곽재우·김면金沔 등이 이끄는 경상우도 의병의 활약으로 봉쇄되자, 김산·지례에서 무주茂朱 쪽으로 우회하여 금산錦山 방면에서 전주로 나아가려 했다. 7월에 접어들면서 금산·이치梨峙·웅치熊峙·진산 珍山·전주 등지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는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호남 관군과 의병이 결사 항전하여 적을 좌절시켰다.
이렇게 남해 해로와 금산 방면 등의 육로가 막히자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우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두드러졌고, 이것이 적으로 하여금 대군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격함으로써 아군의 방어 능력을 분쇄하려는 작전 계획을 세우게 하는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진주는 경상우도의 보장인 동시에 호남의 보장으로서 그 전략적 중요성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고, 그것이 사태의 진전에 따라 전쟁 국면의 초점으로 떠오르면서 진주성 전투의 막이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_49~50쪽

진주성을 지켜라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이 올린 장계가 도착하자 조정에서는 비로소 일본이 침략한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이윽고 선조는 의금부로 하여금 김성일을 잡아들여 국문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 지난해(1591) 3월 1일 김성일은 통신사 부사副使로서 상사上使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서 돌아와 복명(復命, 명 받은 일의 결과를 보고함)했다. 이때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 전쟁으로 인한 재앙)가 있을 것이라 아뢰었지만, 김성일은 그러한 정형(情形, 사정과 형편)을 보지 못했다고 아뢰니 두 사신의 주장이 대립했다. 김성일의 본뜻은 인심의 동요를 염려한 데 있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세를 오판하여 인심을 해이하게 만들고 국사를 그르쳤다는 중죄를 안게 된 것이다.
4월 29일, 이제는 죄인의 몸이 되어 서울로 향하던 김성일이 충청도 직산(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일대)에 이르렀을 때, 그를 찾아 내려온 선전관宣傳官을 만나니 뜻밖의 왕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죄를 용서하고 경상우도 초유사 招諭使에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지였다.
초유사는 안집사安集使 등과 같은 임시 벼슬이었다. 글자 그대로 흩어져버린 군사와 백성을 ‘부르고招 타일러서諭’ 도로 모이게 하는 일이 그 주된 임무였다. 김성일이 초유사로 부임하여 주로 한 일은 의병을 지원하고 관군을 증강하는 것이었다. _51~52쪽

왜적의 칼끝이 진주성을 겨누다
이윽고 10월 1일 일본군은 함안과 진주의 경계에 있는 부다현富多峴을 아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넘었다. 부다현을 넘어온 일본군은 반성창 班城倉}을 불태웠다. 10월 2일에는 소촌역召村驛까지 진출해 진을 쳤다. 여기서 다시 10월 5일에는 임연대臨淵臺 부근으로 행군해 들어왔다. 이날 병력 대부분이 남강을 건넜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날 일본군은 선봉 1,000여 기騎를 마현(馬峴, 말티고개)에 보내 진주성의 형세를 살폈다. …
임연대 부근으로 진출한 일본군의 위치를 알기 쉽게 풀어보면 대략 현재 문산읍 진주종합경기장 근처 강변 일대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임연대는 랜드마크 구실을 할 뿐이고 일본군은 수만 명 규모의 병력이었으므로 반드시 그곳에 모두 모여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경운은 《고대일록》에서 “왜적이 진주 경계로 들어왔는데 수미首尾가 100여 리에 뻗쳤다”라고 기록해두었다(《고대일록》 권1, 임진년 10월 6일). _57~58쪽

의병, 진주성을 구원하러 달려오다
이달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두골평頭骨坪에 진을 치고 왜적을 어지러이 공격하여 베어 죽였다. 그 후 10월 10일 최강·이달 부대는 진주성에서 후퇴하는 일본군을 반성班城까지 추격해서 20여 명을 참살했다.
망진산은 지금 이름과 같다. 간혹 망경산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으나 망진산이 올바르다. 그러나 망진산의 한자 표기는 문헌에 따라 ‘望晉山·網鎭山·網陳山·望陣山’ 등으로 달리 쓰인 경우가 많다. ‘그물 망 網’ 자는 비봉산 飛鳳山과 관련하여 붙은 것이다. 봉황은 그물을 보면 날아가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진양지》에서는 ‘望晉山’이라 하고 그 아래에 “《승람 勝覽》에서 이른바 망진望晉은 곧 망진網鎭이다”라고 설명했으니 진주 사람들은 ‘網鎭山’으로 흔히 썼음을 알 수 있다. 최강의 활약상을 기록한 《난중잡록》에는 ‘網陳山’으로 나온다. 망진산望晉山에 올라가면 글자 그대로 진주晉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望 수 있다. _71쪽

왜적이 진주성을 포위하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사용했던 조총은 납탄을 발사할 경우 유효 사거리가 100~200미터 정도이며 최대 사거리는 500미터 이상이었다. 명중률이 가장 좋은 거리는 100미터 이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50미터 정도에서 쏠 때 가장 정확했다고 한다. 이하 무기류에 대한 서술은 박재광의 논문 <진주성 전투에서의 조·일 양국의 무기체계>(《임진왜란과 진주성 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에 따랐다. 신북문이 있던 곳은 지금의 진주 중앙광장 기업은행 진주지점 자리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수정산(금산)까지 거리를 지도상에서 대략 재어보면 550~600미터 정도다. 따라서 순천당산 위의 일본군이 발사한 조총의 탄환은 동문 쪽 성곽에는 일부 도달했겠으나 실질적인 피해를 입힐 정도의 타격은 주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_86쪽

왜적이 진주성을 공격하다
김시민은 군사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힘써서, 밤이면 악공 樂工을 시켜 문루 門樓 위에서 피리를 불도록 하여 한가로움을 보였다. 적진에는 어린아이들이 매우 많았는데 서울말을 쓰는 아이도 있었고 사투리를 쓰는 아이도 있었다. 이 아이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성 주위를 돌아다녔다. “서울이 이미 함락됐고 팔도가 다 무너졌는데, 너희 새장 같은 진주성을 어찌 지킬 수 있겠느냐. 어서 빨리 항복하는 게 나을 거다. 오늘 저녁 개산介山 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 셋의 머리를 깃대 위에 매달아버릴 거야”라고 떠들어댔다. 성안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분노해 큰소리로 꾸짖으려 하자, 김시민은 말상대 하는 것을 금지했다.
【주】 개산은 김해 사람인데 그 아비가 임진왜란 초부터 일본군 편에 붙어서 성을 함락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진주성에 와서까지 ‘개산 아비’를 들먹일 정도면 꽤 악명이 높은 자였을 것이다. _89쪽

진주대첩을 이루다
4경 중(오전 2시쯤 된 시각)에 왜적이 두 패로 나뉘어, 1만여 명의 한 패가 동문 쪽 새로 쌓은 성벽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왜적은 각자 긴 사다리를 지녔는데, 화살이나 돌을 피하려고 어떤 자들은 방패를 짊어졌고, 다른 자들은 향교의 보궤(??, 향교 제사에 쓰는 그릇의 한 종류)를 머리에 쓰거나 멍석을 잘라 머리를 싸맸고, 그 밖에 쑥대나 풀을 엮은 것을 관 冠 삼아 쓰고 있었다. 왜적이 3층으로 된 가면 쓴 추인을 만들어 차츰 사다리 위로 올려서(즉 인형을 왜적처럼 보이게 해서) 아군을 속인 연후에 성벽을 기어올라왔다. 그 뒤를 따라 왜적의 기병(騎兵, 말을 탄 병사) 1,000여 명이 돌진해 들어왔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고 외치는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왜장은 거침없이 말을 달려 칼을 휘두르며 전투를 독려했다.
목사 김시민은 동문 북격대北隔臺에서, 판관 성수경은 동문 옹성(甕城, 성문 방비를 위해 성문 밖에 지은 작은 성에)서 활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힘써 싸웠다. 혹은 진천뢰·질려포를 쏘고, 혹은 큰 돌덩이를 던지고, 혹은 불에 달군 쇠를 던지고, 혹은 짚을 태워 어지러이 던지고, 혹은 끓는 물을 적에게 들이부었다. 왜적은 마름쇠를 밟은 자, 화살이나 돌에 맞아 죽은 자, 머리와 얼굴이 불탄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진천뢰 파편에 맞아서 죽은 왜적의 시체가 삼麻 줄기처럼 즐비했다. _96~97쪽

진주대첩의 의의
진주대첩의 성과는 거꾸로 일본에는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은 진주성 침공의 목표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막대한 손실만 입고 패퇴하고 말았다. 패전의 쓰라림과 함께 일본군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는 군량 조달 문제였다. 진주대첩 결과 경상우도의 아군이 건재했으므로 일본군의 후방 보급로는 여전히 불안했고 호남을 점령하지 못한 채 맞이한 그해 겨울 내내 군량 부족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진주대첩은 단순히 진주성 하나를 지켜냈다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전쟁의 판세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전투였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진주대첩의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그만큼 당시 진주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컸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진주대첩은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의 활약에 버금가는 공적이었고 육전陸戰을 대표하는 승첩이자 임진왜란의 3대첩 가운데 하나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이었다. _101~102쪽

진주대첩과 김시민
김시양의 말에 따르면, 김시민은 어려서부터 ‘체구가 크고 기상이 씩씩했다魁梧壯偉’ 하니 무인으로 타고난 풍모가 있었던 모양이나, 그의 생애 마지막 6개월 동안의 활약 이전에는 어떠한 명성도 얻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당대의 명장으로 손꼽히던 신립申砬이나 이일李鎰 등과 같은 이들도 해내지 못한 커다란 공적을 이루어냈다. 그에게는 탄복할 만한 지략이라든지 무용담 같은 것도 없었고 백의종군과 같은 어떤 극적인 사건이나 일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김시민은 판관으로서 또 목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오로지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성실히 수행해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임진년 10월, 진주성에 그가 있었고 끝내 대첩을 이루어내었다. 모종의 ‘입혀진 스토리’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약간 실망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은 오히려 이와 같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모습에서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더욱 진실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_106~108쪽

3장 거룩한 충절
다시 위기를 맞은 진주성
일본의 진주성 공격은 한 편의 복수극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고, 그 배경에는 다른 중요한 전략적인 목적이 깔려 있었다는 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명나라 군사가 개입하던 무렵, 전쟁 상황은 이미 일본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닷길을 차단당하고 진주대첩에서도 패해 호남 지역 진출에 실패한 일본은 군량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부산에서 서울 등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길어진 후방 보급로가 경상우도 등 각처 관군·의병의 활약에 위협을 받음으로써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고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책략으로 강화 교섭에 나섰던 것인데, 이것이 주효하여 일본군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그들에게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는 경상도 연해지역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부분적인 성공 따위는 그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낯선 땅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별다른 소득 없이 물러나야 할지도 모르는 현실이 그들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_113~114쪽

중과부적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대첩 때와는 명백히 다른 양상의 전투였다. 일본군이 거의 전군을 집중해 공격해오는 만큼 진주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군사 작전이 수립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계사년 진주성의 비극은 중과부적衆寡不敵과 고립무원孤立無援으로 인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진주성은 방치되었고 사실상 버림받았다. _124쪽

고립무원
만약 김천일에게 ‘원군은 없다’고 확실하게 말해주었더라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진주성 수성전을 고집했을까? 수많은 민간인을 붙잡아두면서까지 절망적인 전투를 해야 한다고 끝내 고집했을까? 바보나 미치광이가 아닌 다음에는 그러한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수성군은 절대 열세의 불리함 속에서도 9일 동안이나 버텨내는 감투 정신을 발휘했다. 이 정도의 시간이라면 원군이 효과적인 작전을 펼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고립무원’은 김천일 등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원군을 보내지 않은 자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계사년 진주성의 비극을 중과부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며, 비극을 초래한 잘못을 외로운 진주성을 목숨 바쳐 의롭게 지켰던 사람들에게만 돌릴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_148쪽

성은 무너지고 충절은 빛나다
왜적이 성에 올라와 칼을 휘두르며 날뛰었다. 여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이종인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김천일을 부축해 일으키며 물러나 피하도록 권했으나, 김천일은 굳게 앉아 일어나지 않으면서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했다. 드디어 그 아들 김상건金象乾을 부둥켜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왜적이 성벽을 헐어 평지로 만들었다. 성중에 죽은 사람이 6만여 명이었다. _159쪽

시 한 수, 이야기 한 편
“촉석루 안 삼장사는, 矗石樓中三壯士
한잔 들며 장강 물을 웃으며 가리키네. 一杯笑指長江水
장강의 물은 도도히 흐르나니, 長江之水流滔滔
저 물결 마르지 않듯 넋은 죽지 않으리 . 波不渴兮魂不死”

진주성 전투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촉석루삼장사시’다. 학봉鶴峰 김성일이 초유사로 진주에 왔을 때 읊은 한시인데, 세간에서는 삼장사가 누구냐를 두고 분분했던 모양이다. 알려진 대로 학봉의 시 속에서 삼장사는 그 자신과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송암松巖 이로를 말한다. 그러나 글쓴이가 이 시를 떠올리며 생각하는 ‘촉석루 안 삼장사’는 이 세 사람만이 아니다. 임진년과 계사년에 죽음을 무릅쓰고 진주성을 지켰던 이들 모두가 ‘장사’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떠난 그 모든 이의 넋 또한 남강의 푸른 물결과 더불어 길이 남으리. _167쪽


목차


· 발간사
· 머리말
1장 진주성 전투와 진주성
진주대첩과 제2차 진주성 전투 | 천험의 요새 진주성
2장 빛나는 승리
임진왜란 일어나다 | 진주는 호남의 보장保障이니 | 진주성을 지켜라 | 왜적의 칼끝이 진주성을 겨누다 | 의병, 진주성을 구원하러 달려오다 | 왜적이 진주성을 포위하다 | 왜적이 진주성을 공격하다 | 진주대첩을 이루다 | 진주대첩의 의의 | 진주대첩과 김시민
3장 거룩한 충절
다시 위기를 맞은 진주성 | 중과부적 | 고립무원 | 성은 무너지고 충절은 빛나다 | 시 한 수, 이야기 한 편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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