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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소음이다

나머지는 소음이다

  • 알렉스로스
  • |
  • 21세기북스
  • |
  • 2010-06-30 출간
  • |
  • 896페이지
  • |
  • 148 X 210 mm
  • |
  • ISBN 9788950924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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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20세기에 귀를 기울이다
음악사와 문화사를 성공적으로 엮어낸 보기 드문 책
《뉴요커》의 탁월한 음악 평론가인 알렉스 로스는 음악의 세계에 밝은 조명을 비추고, 그것이 20세기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퍼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광범위하고 극적인 이야기에서 저자는 우리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빈에서 시작하여 20년대의 파리, 히틀러 치하의 독일, 스탈린이 다스리던 러시아를 거쳐 60년대와 70년대의 뉴욕 다운타운으로 데려간다. 우리는 대중문화, 대중 정치의 등장, 드라마틱한 신기술의 출현, 열전과 냉전의 발발, 실험, 혁명, 시위, 등장인물들 간에 맺어지고 깨어지는 우정 등을 지켜보며 그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종착점에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이것은 단지 20세기 음악의 역사만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본 20세기 역사임을 깨닫게 된다.

전 세계 14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
2007년 뉴욕타임스 선정 최고의 도서 BEST 10
-2007 전미 서평자협회상 수상
-2008 가디언 선정 올해 최고의 책
-2008 퓰리처상 최종 후보작
-워싱턴 포스트, LA타임스, 보스톤 글로브 선정 베스트셀러

현대음악을 둘러싼 소동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파블로 피카소와 잭슨 폴록의 작품이 100만 달러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되는 지금,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이후 만들어진 충격적인 음악 작품들은 여전히 청중들에게 불편한 느낌의 파문만을 보내온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현대음악의 영향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아방가르드 음향은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쓰인다. 미니멀리스트 음악은 벨벳언더그라운드에서 에이팩스 트윈에 이르는 록, 팝, 댄스음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나머지는 소음이다』는 독자들을 현대 음향의 미궁 속으로 안내한다. 이 책은 클래식 음악이라는 과거에 대한 숭배에 저항하고, 광범위한 청중의 무관심에 맞서 싸워왔으며, 독재자들의 의지에 도전한 독불장군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청중을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매혹시켰든, 순수한 소음으로 때려눕혔든, 그런 작곡가들은 항상 열정적으로 현재에 살면서, 클래식 음악의 전형성이라는 것을 다 죽어가는 예술로 보고 도전한다.

1900년 이후의 음악사는 목적론적 이야기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전진적인 거대한 도약과 속물적 부르주아들에 맞서는 영웅적인 싸움으로 가득찬, 목표에 집중하는 이야깃거리라는 것이다. 진보라는 개념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질 때는 새로운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수많은 작품이 음악사에서 지워지는 일이 생긴다. 폭넓은 대중의 호응을 얻었던 작품인 경우가 많이들 그러했다. 예컨대 시벨리우스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라든가 코플랜드가 쓴 <애팔래치아의 봄Appalachian Spring>,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 같은 것들이다. 지적인 또는 대중적인 두 가지 레퍼토리가 서로 별개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것들이 서로 뒤섞인다. 어떤 언어도 본질적으로 다른 언어보다 더 현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 책은 전기, 음악적 묘사, 문화사, 사회사, 장소를 매개로 하는 기억의 환기, 적나라한 정치, 참여자 본인의 입으로 듣는 1차 서술 등 다양한 각도에서 20세기 음악을 조망한다.

이 책의 목적은 20세기의 음악을 분석하거나 해설하는 데 있지 않다. 물론 줄곧 그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학술적, 음악사적인 의미 설명에 주력하는 것도, 그런 의미를 기준으로 하여 20세기 음악을 분류하려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음악과 함께 진행되어온 20세기의 역사를 함께 보고자 한다. 음악과 역사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짚어나가면서, 음악이 우리에게서 가지는 의미를 올바르게 짚어 나가자는 것이다.

음악이 역사를 어떻게 담고 있는지, 음악이 역사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그 속에서 음악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클래식 음악은 죽었는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가, 그렇게 맥을 이어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초적인 감정, 위안의 욕구만 충족시켜주면 충분할 것 같은 대중음악만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음악이 아직도 필요한가. 그런 음악이 아직도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가. 현대음악은 어떻게 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 이제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의문에 대한 충실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추천사 ]

‘현대음악의 위기’는 항상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 사람의 힘으로 벗어날 길이 발견되었다. 가능하리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희망이 생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내용이 충실한 알렉스 로스의 책을 벗 삼아 수많은 음악가들의 창조적인 기복을 빠른 속도로 훑어나가다 보면 누구나 음악에 대한 관심의 불씨가 다시 켜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_비욕Bjork

아름답고, 열정적이고, 재치있고, 완전히 몰두하게 만드는 언어의 향연. 알렉스 로스는 정말 보기 드문 책을 써냈다. 이 음악책을 읽으면 그가 이야기하는 모든 음표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진다. 걸작이다. _에마누엘 액스Emanuel Ax

『나머지는 소음이다』는 방대하면서도 치밀한 소설처럼 읽힌다. 거기에는 유토피아적인 꿈과 위안, 종말은 물론 음악과 그 외 역사에 출현했던 가장 비범한 인물들이 있다.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대단한 책이다. _오스발도 골리호프Osvaldo Golijov

[ 책속으로 추가 ]

협화음, 인간의 귀에 불편하게 들리는 진동을 만들다
슈트라우스는 작품의 첫 부분을 근사하게 시작하는 재주가 있었다. 1896년에 쓴 한 작품의 시작 부분은 음악 역사상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첫 네 음표 이후 가장 근사하다. 그것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의 하산 장면이다. 이 부분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에 사용되어 굉장한 효과를 창출했다. 이 패시지는 음향의 자연법칙에서 그 우주적 힘을 끌어온다. 낮은 C음으로 조율된 현을 하나 퉁기고, 다음에는 길이를 반 줄여 다시 퉁기면 음정은 한 단계 높은 C음이 된다. 이것이 옥타브의 간격이다. (전체 길이의 3분의 1, 4분의 1 등으로) 그 간격을 더 작게 나누어나가면 5도 간격(C에서 G까지), 4도 간격(G에서 그 다음의 높은 C까지), 3도 간격(C에서 E까지)의 소리가 만들어진다. 이것들이 자연 배음倍音 시리즈, 혹은 배음렬倍音列의 저음부 단계이며, 진동하는 현에서 무지개처럼 희미하게 피어오른다. 이와 동일한 간격이 <차라투스트라>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며, 그것들이 쌓여 아련하게 빛나는 C장조 화음을 만든다.
<차라투스트라>보다 9년 늦게 작곡된 <살로메>는 이와 아주 다르게, 변덕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시작된다. 클라리넷으로 연주되는 첫 부분의 음표들은 단순한 상승 음계이지만 중간에서 쪼개진다. 전반부는 C샤프 장조, 후반부는 G장조에 속한다. 이 개시부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불안정하다. 먼저, C샤프와 G 사이에는 완전 5도보다 한 음 낮은 3온음(증4도)이라는 것이 끼어 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마리아Maria>는 3온음으로 시작하여 5도로 해결된다. 즉, 협화음으로 이행한다.) 이 음정은 옛날부터 인간의 귀에 불편하게 들리는 진동을 만들어왔다. 중세 학자들은 이것을 ‘음악의 악마diabolus in musica’라 불렀다. -21~22쪽

독일식 충동에 저항한 드뷔시
드뷔시는 화성의 기저에 놓인 물리적 사실에 대해 깊이 숙고했다.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1863년에 쓴 논문 『음악 이론의 생리학적 기초로서의 음향의 감각에 관하여』에서 자연 배음렬倍音列의 물리학을 설명하고, 인간이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지각하는 과정을 그것과 관련시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동시적으로 울리는 두 음향의 파동 형태가 교차하면서 그것들은 박자beat, 즉 공기 중의 맥동을 만들어낸다. 옥타브의 간격이 즐거운 느낌의 원인이 되는 것은, 헬름홀츠에 의하면, 위쪽 음표의 진동이 아래쪽
음표의 진동과 완벽한 2:1의 비율로 나란히 나아가기 때문이다. 즉, 거기서는 박자가 느껴지지 않는다. 완전 5도는 그 비율이 3:2이며, 역시 귀에 ‘깔끔하게’ 들린다. 드뷔시가 헬름홀츠의 연구를 알았을 수도 있다. 표준 화성을 배음렬에 연결지은 18세기 라모Rameau의 연구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드뷔시는 옥타브와 5도를 저음역에 설치하고 높은 음역에서는 더 좁은 간격을 늘어놓아 무지개처럼 반짝거리게 만들기를 좋아했다.
드뷔시의 등록상표와도 같은 초기 작품은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Prelude a l’apres-midi d’un Faune>인데, 이는 말라르메의 시를 제목으로 삼은 관현악적 설화로서, 1892년에 작곡되고 1894년 개작되었다. 그 시에서는 판pan牧神이 아름다운 두 님프의 기억을, 혹은 꿈을 어떻게 간직하면 가장 좋을지 궁리한다. 그는 플루트로 노래 한 곡을 연주해보고, 그 노래로는 자신이 겪은 생생한 체험을 모두 체현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 작품은 판이 연주한 바로 그 음악을 불러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플루트로 연주되는 나른한 선율이 3온음으로 하강했다가 다시 상승한다. 화성도 이와 비슷하게 3온음을 넘나들다가 울림이 풍부한 B플랫장조의 딸림 7도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 7도는 고전 화성에서라면 E플랫으로 해결되겠지만, 여기서는 자족적自足的인 유기체, 무제약적인 자연의 상징이 된다. 그런 다음 플루트가 선율을 반복하고 새 텍스처가 그 둘레에서 형성된다. 이렇게 하여 드뷔시는 자신의 테마 재료를 발전시키려는 독일식의 충동에 저항한다. 반주가 발전하는 동안 선율은 정체된 상태 그대로 유지된다. 온음계의 구름 같은 울림이 판이 보는 시야의 지평선을 표시해주며, 그곳에서 형체는 안개 속으로 해체된다. -73~75쪽

슬픈 역사로 가득찬 20세기 초 미국 흑인음악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에 시작된 미국 흑인 작곡의 초기 역사는 슬픈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메이플 리프 래그Maple Leaf Rag>와 <엔터테이너The Entertainer>를 작곡한 스콧 조플린은 말년에 자작 오페라 <트리모니샤Treemonisha>를 상연하려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그 작품은 벨칸토 멜로디와 래그 리듬을 활기차게 융합한 작품이었다. 조플린은 뇌에 침범한 매독균 때문에 정신이상이 되어 1917년에 죽었다. 니그로 그랜드 오페라단Negro Grand Opera Company을 할렘에서 창단한 해리 로렌스 프리먼은 흑인 배역이 등장하는 바그너 스타일의 4부작 오페라 두 편을 썼지만, 그 중에서 한 번이라도 상연된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가장 슬픈 이야기는 모리스 아놀드 스트로소티Maurice Arnold Strothotte의 이야기일 것이다. 드보르작은 특히 그를 지목하여, 자신의 미국인 제자 가운데 가장 재능있고 기대되는 사람으로 꼽았다. 아놀드의 <미국 농장의 춤American Plantation Dances>은 1894년 국립음악원 연주회에서 갈채를 받으며 연주되었다. 지휘자이자 학자인 모리스 페레스는 우리 귀에 익은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Humoresque>가 아놀드의 작품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를 차용한 것임을 밝혀냈다. 불행하게도 그날의 음악원 연주회는 이 청년의 경력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그는 계속 음악을 썼지만-무성영화를 위한 음악인 <즐거운 베네딕트 수사>, F단조의 교향곡인 <아메리칸 랩소디American Rhapsody> 등- 거의 연주되지 않았다. 그는 오페레타를 쓰거나 바이올린 교습으로 생계를 이었다. 제임스 웰던 존슨의 『과거에 유색인이던 어떤 사람의 자서전Autobiography of an Ex-Colored Man』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그는 사실상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했고, 말년은 독일인이 주류를 이루는 요크빌에서 살았다. 그 역시 망각 속으로 파묻혔다.

(중략)

쿡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엉성하게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마바 그리핀 카터의 손으로 정리되었다. 1869년 중산계층 부모 밑에서 태어난 쿡은 워싱턴 D.C.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죽자 그는 채터누가에 있는 조부모와 함께 살았는데, 성격이 오만했기 때문에 비범한 재능을 가진 유소년들이 흔히 그러하듯 규율상의 문제를 빚곤 했다. 그는 채터누가 외곽에 있는 룩아웃 산 정상에 자주 올라가서 유명인이 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출판되지 않은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곳에서……어떻게 공부하고, 위대한 음악가가 되고, 인종 편견에 대해 뭔가 기여하리라고 나의 전 생애를 계획하면서 밤중까지 남아 있곤 했다.……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런 음악이 내 종족의 지위를 높이는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고 느꼈다. 나는 평생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 룩아웃 산 정상에서 얻었던 영감만큼 더 근사하고 장대한 꿈은 없었다.”

(중략)

‘유색인종의 날’에는 쿡의 오페라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발췌곡이 연주될 예정이었지만, 가수인 시시에레타 존스는 그곳에 올 여행 증명서를 받아내지 못했고, 공연은 취소되었다. 하지만 쿡에게는 그 박람회가 완전한 헛수고는 아니었다. 그는 드보르작에게 갈 소개장을 얻었으며, 드보르작은 그를 국립음악원에서 공부하도록 허가했다(음악원의 설립자인 지네트 써버는 흑인 학생들의 무료 입학을 교칙으로 삼았다). 뉴욕에서 지낸 첫 해에 쿡이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정황적으로 추측해보건대 인종주의가 그의 꿈을 순식간에 박살낸 것으로 짐작된다. 그에 관한 일화 하나가 듀크 엘링턴의 회고록 『음악은 나의 연인Music Is My Mistress』에 인용되어 있다. 쿡은 카네기홀에서 연주하게 되었다. 한 평론가가 그를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흑인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칭송했다. 쿡은 그 평론가에게 항의하러 가 그의 책상에 바이올린을 두드려 깨버렸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흑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란 말이오!” 마바 그리핀 카터는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아마 성질이 불같은 쿡이 연주회장 업계에 소문이 짜하게 날 만큼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는 했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계에 출입을 금지당하자 쿡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았다. 1898년에 그는 시인 폴 로렌스 던바와 협력하여 <클로린디; 혹은 케이크워크의 기원Clorindy; or, The Origin of the Cakewalk>이라는 음악 레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모든 배역에 흑인을 써서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었다. 처음 보면 이것은 온통 “쿤”과 “다키”로 가득찬 또 다른 자기비하적인 음유시인풍의 쇼처럼 보인다. 하지만 카터가 지적하듯이 대사에는 숨겨진 가시가 있어서, 백인 청중들에게 정면으로 잽을 날린다. 이 작품의 히트 곡인 <오늘밤 다크타운은 외출했다Darktown Is Out Tonight>는 앞으로는 흑인음악이 음악계를 지배하리라고 예고한다.
-196~201쪽

“독일에 필요한 것은 인간 사회에 대한 깊은 진실을 말해주는 음악이다”
슈레커 오페라의 마술은 프리츠는 알아차리지 못한 음악을 청중들은 첫 마디에서부터 듣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것은 독일이라기보다는 이탈리아 스타일에 더 가까운 들뜬 듯한 서정적 성악과, 바그너보다는 드뷔시에 더 가까운 음영을 지닌 금빛으로 흐릿해진 오케스트라 음향, 2막의 <대 창녀집>에서 집시 악단과 뱃노래와 합창 세레나데를 한데 합치는 코즈모폴리턴적인 관능성 등이다.
<자니>는 슈레커의 업적을 재현하고자 하지만, 그보다는 더 현대적 수단을 사용한다. 제목이 된 주인공은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는 흑인 재즈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일종의 오스트리아판 윌 매리언 쿡 같은 존재다. 그는 승리감으로 외친다. “바다를 건너 신세계의 우수한 재능이 왔도다/ 춤과 함께 낡은 유럽을 물려받는다네.” 등장인물 가운데는 막스라는 작곡가도 있는데, 그는 오페라가 시작될 때 무시무시한 빙하 곁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그 빙하를 “그대 아름다운 산이여”라고 부른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나오는 프리츠처럼, 막스는 멀리서 들리는 음향, 아마 쇤베르크 풍일 것으로 추정되는 음향을 추구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마치 제2 빈 악파의 선전 문구를 인용하는 것처럼, 막스가 빙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언외의 의미는 명백해진다. “그것에 대해 알게 되면 누구나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 빙하는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 합창이라는 매개를 통해 막스에게 “삶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클라이맥스라 할 기차역 장면에서 막스는 알지 못할 곳으로 막 떠나려는 사랑하는 아니타를 따라잡는다. 자니는 정거장의 시계 위로 뛰어오르며, 코러스는 그의 승리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 크셰넥의 원래 노트에 따르면, 이 오페라는 작곡가의 이름이 새겨진 78회전 레코드가 축음기에서 회전하는 이미지로 끝맺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전체 플롯은 자전적이다. 재즈나 다른 대중적 재료에 대한 취미가 눈을 뜨기 전에 크셰넥은 쇤베르크와 바르토크를 안내자로 모시고 눈에 핏발이 선 반半무조성 단계를 거쳤다. <자니>를 쓰면서 그는 자신의 빙하 세계를 자니의 바이올린의 온기에 노출시켜 막스의 통찰을 능가하려고 애썼다. 뿐만 아니라 아니타라는 인물의 모델은 구스타프와 알마의 딸인 안나 말러인데, 안나와 크셰넥은 질풍노도처럼, 잠시 결혼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작곡가는 20년대 중반의 유럽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은 샘 우딩의 재즈 레뷔 <초콜렛 키디스Chocolate Kiddies>를 보러갔다. 그는 우딩의 온건한 재즈 편곡을 중부 유럽식 절망감의 심연에서 자기를 끌어올려줄 생명줄처럼 붙들었다. 흥미롭게도 그 레뷔에는 초기 듀크 엘링턴의 노래 한 곡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지그 워크Jig Walk>인데, 그 곡은 <자니>의 히트 곡목과 약간 비슷하다. 하지만, 크셰넥과 미국 흑인음악의 약혼은 고작해야 자니를 연기하는 가수의 얼굴에 칠해진 검은 분장의 두께만큼만 지속되었다.
시대의 오페라는 바이마르의 과도하게 확장된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쪽 끝에서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나치는 그것을 퇴폐적 예술이라고 공격했다. 또 한편으로 공산주의 작곡가인 한스 아이슬러는 《붉은 깃발Die Rote Fahne》에 <자니>에 대한 글을 실었다. “독특한 스타일이 녹아있기는 해도, 이것은 다른 당대의 오페라 작곡가들이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상적이고 쁘띠부르주아적인 물건이다.” 아이슬러는 힌데미트의 “실용을 위한 음악”에 대해서도 똑같이 불친절하며, “음악의 상대적 정체화”(relative stabilization; 독일 경제 전문 용어를 비틀어 모방한 단어)로 치부하여 무시해버렸다. 모든 현대음악은 의미나 공동체를 박탈당한 환각적인 삶Scheindasein을 살고 있다. 아이슬러는 1928년에 이렇게 썼다. “대형 음악 축제들은 노골적으로 주식시장이 되어버렸고, 거기서 작품의 가치가 평가되고, 다음 시즌을 위한 계약이 결정된다. 하지만 이 모든 소음은 말하자면 유리종 안의 진공상태에서 수행되므로, 바깥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공허한 참견이 야단스러운 족내혼의 잔치를 축하하며, 일체의 공적인 것에 대한 흥미도, 참여도 철저하게 결여되어 있다.”
독일에 필요한 것은 인간 사회에 대한 더 깊은 진실을 말해주는 음악이라고 아이슬러는 말했다. 그는 작곡을 할 때는 창문을 열라고 동료들에게 가르쳤다. “거리의 소음이 그저 소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임을 기억하라.……인간을, 진짜 인간을 발견하고, 너의 예술을 위한 일상생활을 발견하고, 그런 다음에는 아마 너도 재발견될 것이다.” 그때쯤, 혁명은 시작되었다. <서 푼짜리 오페라>가 쉬프바우에르담 극장에서 좌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 앞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287~290쪽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희생양…소비에트 예술
여러 해 동안 집단화, 산업화, 기근이 이어지자 소비에트 대중은 반발했고, 30년대 초반에 스탈린은 새로운 안락과 자유의 약속으로 백성들을 달래려고 애썼다. 예술가들은 스탈린의 유창한 표현인 “생활은 나아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방송하도록 지시받았다. 이를 위해 예술가들의 생활은 최소한 물질적인 의미에서는 개선되었다. 소비에트 작곡가조합은 작곡가들에게 건강 계획, 정양소?養所, 모스크바에 있는 협력 건물을 제공했다. 1932년 10월, 막심 고리키의 모스크바 저택 모임에서 스탈린은 생각에 잠겨 작가들이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작가들 사이에서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 모임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이 출현했다. 그에 따르면 소비에트의 예술가들은 민중의 삶을 사실주의적이면서도 영웅적으로, 마치 장래에 실현될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시점에서 보는 듯이 묘사하게 된다. 소설, 서사극, 오페라, 교향곡 따위의, 기존의 19세기 형식들이 그것을 표현하는 적절한 도구로 인정되었다. 당의 이론가 니콜라이 부하린은 1934년 작가 총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좀더 섬세한 정의를 제시했다. 그는 “비극과 갈등, 동요와 패배, 갈등하는 조류들 간의 투쟁”의 이야기를 요구했다.
소비에트 예술의 새로운 단계에 쇼스타코비치가 기여한 첫 번째 공헌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쓴 소설을 대략적인 토대로 삼은 대본은 1860년대 러시아의 시골 마을에 사는 의지력 강한 여성 카테리나 이스마일로바의 이야기를 한다. 자기 생애에 있는 남자들에게 여러모로 시달려 지겨워진 그녀는 그들을 없애버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먼저 자신에게 지긋지긋하게 추근대는 시아버지 보리스를 살해하는데, 쇼스타코비치는 그를 전형적인 쿨락kulag 나으리, 즉 부농富農으로 설정한다. 그런 다음 그녀는 애인이던 세르게이-장래의 쿨락-와 공모하여 질투심 많고 난폭한 남편 지노비를 죽인다. 마지막 막은 두 애인이 수용되어 있는 시베리아의 감옥에서 진행된다. 세르게이의 눈길이 다른 여자에게 향하는 것을 본 카테리나는 경쟁자를 함께 끌어안고 스스로 강에 몸을 던진다.

1929년에 스탈린이 “계급으로서의 쿨락을 해체하자”는 인종말살적인 캠페인을 시작했으니, 이 시나리오는 정치적으로 시의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처형을 하든 감옥에 가두든 아니면 유형을 보내든, 해체의 방법이야 무엇이든 상관없다. 쇼스타코비치 본인은 그 대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맥베스 부인>에서 나는 현실의 가면을 벗기고 러시아 상인 가정을 에워싸고 있는 전제적, 굴욕적 분위기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이런 “하찮고”, “저속하고”, “잔인하고”, “탐욕적”인 상인들은 같은 시기에 나치 삽화에 등장하는 매부리코를 한 유대인 금융업자의 소비에트식 동료들이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비非쿨락화”의 프로그램이 실행된 결과로 300만 명이 죽었다고 추산한다.
그렇다면 한쪽 시각에서 볼 때 <맥베스 부인>은 거의 인종말살을 위해 복무하다시피 한 오페라인 셈이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프로파간다적인 작품이 아니다. 작곡가는 그것을 “풍자-비극”이라 불렀고, 그 양면성이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그 어떤 것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음향과 이미지 사이의 불화에 대한 아이젠슈타인의 이념을 확장하여, 쇼스타코비치는 삽화적인 음악적 전형성을 사용하여,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행동을 예시하기보다는 그것을 훼손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카테리나의 요리사인 악시니아가 강간당할 뻔한 장면은 월트 디즈니의 <실리 심포니Silly Symphony> 시리즈에 어울릴 만한 미친듯한 말발굽 소리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카테리나에 대한 보리스의 탐욕은 주정뱅이같은 빈 왈츠를 통해 제시된다. 오페라가 진행됨에 따라 냉혹한 그로테스크함은 고백과 비탄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난다. 보리스가 2막에서 죽임을 당할 때 그에 대한 음악적 반응은 처음에는 얼음 같은 무감동이지만, 사제가 상인을 위해 진혼곡을 읊겠다고 말한 뒤 오케스트라는 파사칼리아 형식의 거창한 만가로 무대를 뒤덮는다. 이 비가는 베르크의 <보체크>에 나오는 D단조 애도가threnody를 모델로 삼아 좀 평범하게 바꾼 곡이다. 이 음악이 어떤 극적 기능을 가지는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이 예상치못하게 흉악한 보리스를 위한 동정의 선언인가? 그것은 카테리나의 입장에서 느끼는 내적 동요를 표현하는가? 아니면 운명의 일반적인 냉혹한 작동인가? 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쿨락에 대한 끓어오르는 혐오를 선언하는 프로그램을 진척시키지 못한다.
오페라는 사랑의 광기의 우화, 관능성의 맹목적인 힘의 이야기로 보아야 더 의미가 통한다. 그것은 작곡가가 1932년에 결혼하게 되는 물리학자 니나 바자르의 매력에 빠져 있던 기간에 작곡되었다. 소프라노 갈리나 비시네프스카야는 카테리나가 니나의 열정적인 성격을 좀 과장하여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광기는 사실은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것이었을 수 있다. 2년 뒤 그는 젊은 통역자 엘레나 콘스탄티노브스카야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결혼생활에 위기를 불러오며, 그 뒤로도 그의 애정 생활은 끝까지 비희극적 면모를 보여준다. 작가인 갈리나 세레브리야코바는 이렇게 회상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의 테마를 재창조하고 싶어 목말라 했다. 그 어떤 한계도 모르는 사랑,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것처럼 악마 본인이 암시한 범죄라 할지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사랑 같은 것 말이다.” 카테리나 역시 자기 주위의 절대적 부패에 대항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의 제물이 되었다. 하지만 살로메처럼 그녀는 자기가 사는 세계의 비정상성을 과다할 정도로 체현함으로써 그것을 폭로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페라는 스탈린의 세계에 대한 전체적으로 더 암울한 기념비가 된다. -347~350쪽

음악가들의 정치참여와 여성 지휘자의 탄생
수많은 여성들이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다. 흑인인 딘 딕슨은 《타임》 지에서 WPA의 떠오르는 지휘자로 소개되었다.
또 FMP는 새로운 음악이라는 대의를 채택하여 작곡가의 포럼-실험실이라 불리는 시리즈를 마련했고, 작곡가들이 대중과 상호 접촉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예술적 고립에서 깨고 나올 수 있게 했다. 이에 대한 보도자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을 쓰는 사람이 청중의 반응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작곡을 수정하거나 변경할 기회를 가지게 되는 기술이 완벽해졌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작곡가는 청중들로부터 자신에게 제기된 모든 물음에 답한다.” 작곡가의 포럼-실험실은 적극적인 인민전선파이자 《신대중》의 음악 평론가인 애쉴리 프티스에 의해 운영되었다. 뉴욕에서의 첫 행사는 젊은 작곡가 로이 해리스에게 헌정되었는데, 그는 이 행사를 “아주 위대한 웅혼한 음악……매우 빠른 속도로 광대한 영역에서 움직이는 음악, 수많은 색채를 지닌 음악, 거대한 부피를 지닌 음악, 미국 문명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음악”을 주문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해리스는 또 한 명의 모범적인 뉴딜 음악가였다. 그는 캐스팅 회사가 탐낼만한 위대한 미국 작곡가로서의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오클라호마의 석유 붐으로 번성한 도시인 챈들러의 통나무집에서, 그것도 링컨의 생일에 태어났다. 《타임》 지는 그 통나무집이 “손으로 다듬어낸” 집이었으며, 어린 시절의 작곡가가 트럭을 몰았다고 말했다. 이는 곧 해리스가 결코 고전적인 여성 취향이거나 부르주아적인 도련님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해리스는 1938년 교향곡 3번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는 전 미국적인 송가이자 오케스트라를 위한 춤곡으로서, 현악은 폭넓고 열린 종지형의 선율로 연설하듯 떠들어대며, 금관은 송가를 부르고 군중 속의 카우보이처럼 크게 외치며, 팀파니는 마디 중간에서 강한 박자를 두드린다. 우람한 덩치를 가진 그런 음향은 성실한 미국 교향곡이 마땅히 가져야 할 모습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시킨다. 1940년에 토스카니니가 황송하옵게도 이 작품을 지휘했을 때 피츠버그 파이레이츠 야구단의 소유주는 작곡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그 교향곡에서 한 것만큼 힘 있게 공을 던지는 투수가 우리 팀에 있다면 나는 아무 걱정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연방 음악 기획 FMP가 의도는 좋고 열심히 일하는 기구이면서도 그 목표가 무엇인지가 끝내 분명해지지 않은 반면, 정치 참여적 성향을 지닌 작곡가들이 몰려가던 연방 연극 기획(FTP·Federal Theatre Project)은 그 목표가 너무 뚜렷했다. 작곡가 포럼-실험실의 첫 번째 연주회가 뉴욕에서 열리기 몇 주일 전, FTP의 의장이자 러시아 실험주의 연극의 권위자인 할리 플래내건은 “이것이 올바른 시간과 장소인가?”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극, 연방의 지원을 받으면서 러시아에서의 메이에르홀트의 스튜디오와 나치 이전 시대 베를린에서 브레히트가 세운 기획의 노선을 따르는 급진적 연극의 비전을 펼쳐보였다. FTP의 각 지역 감독들의 첫 모임이 열렸는데, 장소는 워싱턴 D.C.의 에벌린 월시 맥린의 저택이었다. 플래내건은 이 궁전 같은 무대-집 주인은 호프 다이아몬드의 소유주였다-가 “부자들이 구매하는, 부자들이 소유하는 상품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의 상징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10년 전 소련을 여행했을 때 본 광경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427~429쪽

아우슈비츠에 울려퍼진 오케스트라
아우슈비츠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남성 오케스트라가 1941년과 1942년에 결성되어, SS단원의 교양을 위해 연주했다. 야심적인 SS의 여성 장교 한 명은 1943년 여성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기로 작정하고, 아마추어와 전문적 연주자로 구성된 잡동사니 악단을 결성했다. 여성 악단은 재능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알마 로제Alma Rose-구스타프 말러의 조카딸-가 음악감독으로 오게 되자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리처드 뉴먼과 카렌 커틀리가 로제의 전기에서 서술한 것처럼, 로제는 50명 가량의 연주자로 구성된 앙상블을 엄격한 규율로 훈련시켰고, SS를 설득하여 지휘봉과 지휘대 따위의 보급품을 얻어냈다. 그들의 레퍼토리에는 행진곡, 슈트라우스 왈츠, 오페라 발췌곡, 베토벤 5번의 1악장,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일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등이 있었는데, <트로이메라이>는 멩겔레가 특히 좋아한 곡이었다.
“그녀는 딴 세상에 살았다.” 한 생존자는 로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에게 음악은 사랑과 실망, 슬픔과 기쁨, 영원한 갈망과 신념을 의미했고, 이 음악은 수용소 위쪽 저 높은 공중에서 떠돌고 있었다.” 한 폴란드인 첼리스트는 자신이 F샤프를 켜야 할 곳에서 F음을 연주했다고 로제가 격노하여 자신을 꾸짖던 일을 회상했다. 그 때 이 젊은 첼리스트는 화가 몹시 났지만, 돌이켜보면 자신이 미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이같은 완벽함에 대한 무의미해 보이는 고집 덕분이었다고 생각했다. 또 한 번은 연주 도중에 SS대원이 뒤에서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자 로제는 화를 내며 연주를 멈춘 일이 있었다. 이는 빈에서 무신경한 청중들을 질책하던 그녀 삼촌의 행위가 섬뜩하게 반복된 행동이었다.
알마 로제는 1944년 4월에 병이 들었다. 아마 식중독이었던 것 같다. 멩겔레는 그녀를 살려보려고 아마 진심으로 노력한 것 같지만, 그녀는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그녀가 훈련시킨 연주자 여러 명은 살아남았다. 아마 로제가 그들에게 확보해주었던 특별한 지위가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앨리스 슈트라우스의 할머니인 파울라 노이만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어느날 슈트라우스 가족은 그녀의 사망증명서가 담긴 소포를 받았다. 사망원인은 “열병”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 소포에는 이시도르 카우프만이 그린 유대인 소년의 초상화도 들어 있었고, 슈트라우스는 그것을 책상 곁에 걸어두었다. -507~508쪽

번스타인, 베토벤을 미국화하고 민족을 뒤섞어버리다
20세기 중반에 막 등장하는 젊은 미국인 작곡가라면 교향곡으로 자신을 부각시키라는 기대를 받게 마련이다. 번스타인은 1942년에 쓴 <예레미야Jeremiah>로 이 장르에 막강한 기여를 했다. 예레미야의 비탄에 음악을 붙인 이 작품은 당시 유럽 유대인들의 고통에 바쳐졌다. 하지만 그가 가장 우선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사랑한 것은 극장이었다. 하버드 대학 졸업 논문에서 그는 모든 음악 전통, 유럽 전통과 미국 전통, 클래식과 대중음악, 흑인과 백인 음악 등이 한데 녹아 뭉쳐지는 비전을 그렸다. 1942년 뉴욕으로 이사한 그는 그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착수했다. 먼저 제롬 로빈스의 발레극 <팬시 프리Fancy Free>에서, 다음에는 베티 콤든과 아돌프 그린의 뮤지컬 <온더타운On the Town>에서 그는 자신이 받은 일류급 훈련을 얼핏 저급하게도 보이는, 휴가를 받아 시내에 온 세 명의 선원이라는 소재에 적용했다. <온더타운>의 대표 곡목인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5번의 시작 부분 마디에서 가져온 것일 수도 있는, 4음표짜리 상승 음형으로 시작한다. 이와 동일한 모티프가 1952년의 오페라 <타히티에서의 말썽Trouble in Tahiti>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재즈풍의, 손가락을 딱딱거리는 표현 형태가 중산계급의 신경증에 대한 잔혹한 풍자를 담아낸다. 이 음표 네 개는 이제 미국의 전후 시대의 풍요에 정면으로 구멍을 터뜨리는 “근교suburbia”라는 단어를 발음한다.
번스타인이 이룬 가장 눈부신 전통의 변형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어딘가에Somewhere>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의 느린 악장의 중심 주제가 갱들이 설치는 맨해튼 웨스트사이드의 길거리에서 푸에르토리코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백인 소년의 사랑 노래로 변한다. 그것은 정치적 성향을 띤 도둑질, 즉 베토벤을 미국화하고 민족을 뒤섞어버린 것이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비밥 멜로디, 라틴 리듬, 오래 된 틴 팬 앨리의 서정적 기술에서 연료를 얻은 아름답게 가공된 대중 극작품이다. 그것은 또 20세기 스타일에 관한 현학적 논문이기도 하다. 서주의 처음 몇 마디는 귀에 익은 음정인 5도 더하기 3온음의 복합이다. 이 복합은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의 음악 곳곳에 등장하며, 영원한 노력과 갈등을 상징한다. 비슷하게 긴장된 이 두 음정은 번스타인 음악의 알맹이이며, 그의 가장 유명한 멜로디에 심겨져 있다. 때로는 그것들이 최후반기 낭만주의적인 갈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토니의 사랑 노래 <마리아Maria>에서 첫 두 음표는 3온음을 펼쳐내며 세 번째 음표는 완전5도보다 반음정 더 높이 올라간다. 하지만 이런 음표 그룹이 증4도 더하기 증3온음으로 배열되면 그것은 “증오”의 모티프, 상어파와 제트파 간의 끝없는 갈등의 모티프가 된다. 나중에 <쿨Cool>에서는 어딘가 12음렬 비슷한 기법이 사용되어 비밥 푸가를 작동시킨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전적으로 현대적인 작품으로 간주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대담한 언어, 예측 불가능한 스타일상의 변신, 또 정치적으로도 참여적이고 현대 미국 생활에 깊이 발을 담근 작품이다.

번스타인은 이제 운명적인 결정을 내린다. 이 뮤지컬이 워싱턴 D.C.에서 전국적으로 개막될 바로 그 무렵 그는 뉴욕필하모닉의 음악감독직을 수락한 것이다. 그곳에서는 옛 친구이자 바바리아의 음악 장교이던 카를로스 모즐리가 행정 부서의 맨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아마 번스타인은 자신의 우상인 말러처럼 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즌 동안에는 지휘를 하고 여름휴가 동안 작곡을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말러는 강연을 하거나 토크쇼와 퀴즈쇼에 나가는 일은 없었고, 파티를 열고 정치적 연설을 하지도 않았다. 번스타인이 필하모닉에서 대단한 업적-걸작 프로그램인 청소년음악회, 동료 미국 작곡가들의 선전, 찰스 아이브스의 재발견-을 이룬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11년 동안 그가 쓴 대규모 작품은 두 개-빈틈없이 다듬어진 <치체스터 시편Chichester Psalms>과 느글거릴 정도로 설교조인 교향곡 3번인 <카디쉬Kaddish>- 밖에 없었다. 한편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하층민 거주 지역은 뉴욕필하모닉의 새 둥지이자 고급문화의 거인인 링컨 센터가 들어설 자리를 만들기 위해 철거당했다. 번스타인이 만약 체념하고 다른 사람들 음악의 해석자로서 생을 마치려 한 것이라면, 그런 생각을 그에게 주입한 책임은 다름 아닌 코플랜드에게 있었다. 일찍이 1943년에 코플랜드는 번스타인에게 “우리 당의 노선을 잊지 말게. 자네는 큰 의미에서의 지휘를 향하고 있네. 그 방향으로 이끌어가지 않는 사람이나 사건은 우리 정치단체에서는 모두 쓰레기라네” 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1969년에 필하모닉을 떠난 뒤 번스타인은 중단했던 작곡을 다시 시작하려고 분투했다. 1971년에 있었던 케네디 센터의 개관식을 위해 재키 케네디, 당시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부인은 그에게 음악극인 <미사Mass>를 위촉했다. 이는 신적인 장면 설정과 쇼의 선율과 비틀즈 시대의 팝송을 한데 엮은 만화경 같은 작품이었다. 번스타인의 후기 작품에서 자주 그렇듯이, 당혹스럽게 만드는 순간이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과 공존한다. 하지만 “주께 새 노래를 불러드리겠다I will sing the Lord a new song”라는 대사에 맞춰 작곡된 투명한 수정 같은 음악만으로도 그 작곡가는 충분히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
평론가들로부터 외람되다는 조롱을 받은 번스타인은 지휘계로 물러났다. 쓰겠다고 약속했던 홀로코스트 오페라는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필하모닉에서 번스타인을 이어받은 사람은 피에르 불레즈였는데, 그 역시 몰려드는 지휘 계약 속에서 창작의 동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번스타인과 불레즈가 각자 직업의 마지막 시기를 동일한 형태-메이저 음반 회사와 계약을 맺은 유명한 지휘자-로 끝낸다는 사실은 모든 것이 정치에서, 혹은 경제학에서 끝난다는 샤를르 페기의 격언을 깔끔하게 확증해준다. 번스타인은 실현하지 못한 야심을 말러 교향곡의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연주에 쏟아 부었다. 그가 시간이나 에너지나, 그밖에 또 그에게 부족했던 뭔가를 더 가졌더라면 자신의 음악에서 발언했어야 했던, 또는 발언하려고 했던 주제를 그 연주에 몽땅 실은 것이다. -610~614쪽

전후 시대 혁신자들의 조언자로 등장한 메시앙
50년대가 되면서 메시앙은 그 자신의 “냉전 위기”를 겪었다. 스트라빈스키가 같은 시기에 행한 모더니스트적 책략과 비슷한 실험과 자기 의혹의 기간이었다. 무한히 단순한 화음으로 표현되는 “무한히 단순한” 신에 대한 메시앙의 신앙이 흔들렸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한밤중이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여러분들처럼 나도 길을 잃었다.” 그는 어느날 파리 음악원의 수업에서 이렇게 말했다.
메시앙은 전후 시대의 여러 주요 혁신자들에게 조언자 역할을 했다. 불레즈, 크제나키스, 슈톡하우젠은 모두 한두 번씩은 그에게서 배웠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메시앙의 수업은 급진주의의 둥지라는 평판을 얻었다. 젊은 혁명가들이 비서구적 음악에 대한 스승의 관심이나, 새로운 리듬적 과정의 육성이나, 전자악기에 대한 이른 관심, 무엇보다도 원조 음렬주의라 할 『음가와 다이내믹스의 스케일』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들은 화성에 대한 그의 좀더 보수적인 생각에 끌려오지는 않았다.
불레즈는 메시앙을 깔보는 듯, 조롱하는 듯 취급했으므로 둘 사이의 역할이


목차


서문
1부 1900~1933년
1장 황금시대 슈트라우스, 말러, 세기말
2장 파우스트 박사 쇤베르크, 드뷔시, 무조주의
3장 대지의 춤 제전, 민속, 재즈
4장 보이지 않는 사람들 아이브스에서 엘링턴까지, 미국 작곡가들
5장 숲 속에서 나온 유령 장 시벨리우스의 고독
6장 그물의 도시 20년대의 베를린

2부 1933~1945년
7장 공포의 예술 스탈린 치하 러시아에서의 음악
8장 만인을 위한 음악 FDR의 미국에서의 음악
9장 죽음의 푸가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의 음악

3부 1945~2000년
10장 개시 시각 미군과 독일 음악, 1945~1949년
11장 멋진 신세계 냉전과 50년대의 아방가르드
12장 “그라임스! 그라임스!” 벤자민 브리튼의 열정
13장 자이언 파크 메시앙, 리게티, 60년대 아방가르드
14장 베토벤은 틀렸다 비밥, 록, 미니멀리스트들
15장 가라앉은 성당 세기말의 음악

에필로그
감사의 말
역자 후기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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