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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학자 조식

조선의 유학자 조식

  • 허권수
  • |
  • 뜻있는도서출판
  • |
  • 2022-04-10 출간
  • |
  • 464페이지
  • |
  • 152 X 225 mm
  • |
  • ISBN 9791197117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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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와 절조(節操)로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람, 조식!

조식(曺植)은 유학의 나라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1500년대 경상도 일대의 산림에 은거해 학문에 몰두했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경상도 출신인 이황(李滉)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그 명성은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조선의 유학자라고 하면 지금은 대개 이황을 먼저 말하지만 당대의 학문적 위상은 조식이 이황보다 못하다고 할 부분이 조금도 없다. 이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말한다면 조식을 이황의 앞자리에 놓아도 무방하다.

유학은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철학적 이념이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사물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탐구했다. 그리고 이 같은 이론적 탐구의 결과물을 현실 세계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조식의 위대함은 바로 유학이 실천 학문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황이 성리학 이론에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면, 조식은 실천 유학자로서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조식의 학문은 흔히 ‘경의지학(敬義之學)’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서 경(敬)은 유학자들이 학문의 핵심으로 여기는 수기(修己)의 방법론이다. 공손하면서도 진지한 태도로 사물을 접하며,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자세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는 것이다. 의(義)는 해도 좋은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분별하는 사회적 실천의 기준이다. 사적 이익보다는 공적 이익을 앞세우는 올바름이고 마땅함이다. 대장부라면 어떤 두려움도 없이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경은 조식 학문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유학자들 대부분이 강조한 것이다. 이황과 같은 경우 학문과 인생에서 경을 바탕으로 실천궁행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식 학문의 남다른 부분은 조식이 의를 누구보다도 강조했다는 점이다.

경의(敬義)의 학문을 바탕으로 조식은 자신을 수양하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나아가 무도한 세상을 구하고자 했다. 조식은 경과 의에 대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 이 경(敬)과 의(義)라는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도 같다. 이 두 글자의 의미는 만고의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이다. 성현들이 남긴 많은 말씀의 마지막 귀결처를 생각해 보면 모두 이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학문을 한다면서 경을 위주로 하지 않는다면 거짓된 것이다. 맹자는, 학문의 방법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니 그 흩어 진 마음을 수습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경을 위주로 하는 공부이다.”

당시의 조정은 조식에게 여남은 번 이상 벼슬을 제수했다. 전례가 없던, 파격적인 품계였다. 조식을 인정하고 존경하던 이황이 벼슬에 나오기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식은 평생 동안 단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조식의 학문을 현실과 관계없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조식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마땅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뿐이다. 조식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出處)와 관련하여 “나는 공자처럼 학문을 통해서 세상을 구제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유학자라 하여 백성의 고통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조식의 생각이었다.

조식이 살았던 1500년대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의 시대였다. 간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뜻있는 현사(賢士)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조식은 이처럼 얼토당토않은 정치에 분노했다. 스스로 벼슬에 나아갈 수는 없는 때라고 판단했지만 이를 내버려둘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내던진다(見利思義 見危授命)”고 했다. 불의에 맞서는 일은 의로운 유학자의 의무였다. 조식은 간신들의 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1555년 을묘년에 명종에게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서는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다”고 썼고 수렴청정을 펼치는 문정왕후는 “깊은 궁중에서 살아온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가을 서릿발이 칼날처럼 쏟아지는 듯했다. 왕과 대비에게 이러한 상소를 올리는 일은 목숨을 내놓기로 결심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조식은 조선 대장부의 기개와 절조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유학자의 마땅함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올바른 유학자의 전형을 세웠다.

조식의 절친한 벗 성운(成運)은 ‘조식의 묘갈명’에서 이렇게 썼다. “풍채와 용모는 느긋하면서도 고상하여 절로 법도가 있었고, 비록 다급하고 시끄러울 때일지라도 늘 지켜 온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얼굴빛이 엄격하고 핵심적인 사항만을 간략하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삼가는 공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선조실록〉의 조식 졸기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식은 도량이 푸르고 높았으며 두 눈에서는 빛이 났다. 그를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언론(言論)은 재기(才氣)가 번뜩여 천둥이 치고 바람이 일어나듯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인 욕심이 사라지도록 했다.”

그 명성이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조식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실천을 중시한 학문적 태도로, 조식 스스로 자신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던 탓도 있다. 광해군 시기 북인 정권을 이끌었던 조식의 제자들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학맥이 끊어진 탓도 있다.

이 책 〈조선의 유학자, 조식〉은 조식의 생애와 학문을 ‘찬찬히’ 따라간다. 저자인 한문학자 허권수는 조식이 직접 남긴 기록은 물론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료 유학자와 제자들이 남긴 기록까지, 방대한 분량의 원전 자료를 섭렵했다. 조식이 살았던 경상도 삼가현, 김해부, 진주목 일대의 지리적 공간도 빠짐없이 추적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조식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배웠고 누구를 가르쳤는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았는지 등을 실감나게 알 수 있다. 조선 유학자 조식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허권수는 조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선생의 학문은 철저하게 현실을 바탕으로 하였다. 보통 선비라고 하면 단지 말만 앞세울 뿐 현실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데 선생은 진정한 선비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목차


서문 우리 시대의 남명 조식 읽기

1장 1501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나다
01 산처럼 큰 인물의 출현
02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문득
03 아버지 조언형의 억울한 죽음

2장 1530년, 김해부 탄동에 산해정을 짓다
04 산악처럼 우뚝하고 연못처럼 깊게
05 과거의 길, 효도의 길, 그리고 학문의 길
06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학문의 경지
07 까마귀의 검은색은 빗물로 씻어낼 수 없고
08 암울한 죽음의 시대, 때를 만나지 못한 현사(賢士)들

3장 1548년, 계부당과 뇌룡사를 짓다
09 닭이 고니의 큰 알을 품듯
10 가혹할 만큼 엄격한 출사(出仕)의 기준
11 후학을 가르치는 기쁨, 현사(賢士)와 사귀는 즐거움

4장 1555년, 명종 임금에게 을묘사직소를 올리다
12 벼슬길로 나오라는 이황의 권유
13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죽음을 결심한 상소
14 온 나라를 흔들어 놓은 을묘사직소의 파장
15 해인사에서 만나자는 약속
16 지금은 벼슬할 만한 때가 아니니

5장 1558년, 벗들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다
17 어진 사람은 산을 사랑하고
18 지리산 유람에서 만난, 세 군자의 숨결

6장 1561년, 지리산 덕산동에 산천재를 짓다
19 벽에 ‘경(敬)’자와 ‘의(義)’자를 붙인 까닭
20 부지런한 농부들이 연둣빛 들로 나올 때
21 이기론보다 쇄소응대(灑掃應對)를 강조하는 학문
22 얼토당토않았던 권간(權奸)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7장 1568년, 선조 임금에게 무진봉사를 올리다
23 대장부의 출처(出處)는 태산처럼 묵직해야
24 서울로 올라가 명종 임금을 만나다
25 선조 임금에게 ‘구급(救急)’ 두 글자를 올리다
26 백성은 귀중하고 임금은 가벼우니
27 아전의 폐해를 지적한 상소, 무진봉사(戊辰封事)

8장 1572년, 처사로서의 삶을 마치다
28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겠는가?
29 김굉필의 그림 병풍이 전해진 내력
30 죽고 사는 일은 평범한 이치이니
31 부침을 겪은 후인들의 추존 활동

붙임 성운(成運)이 쓴 남명선생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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